♣ 盈科後進/고전향기

[고전의 향기 241] 아내를 소박할 뻔했던 이함형(李咸亨)

도솔산인 2012. 11. 7. 13:25

 

[고전의 향기 241] 아내를 소박할 뻔했던 이함형(李咸亨)

 

 

갈수록 이혼하는 부부가 늘다가 이제는 황혼이혼이란 말까지 심심찮게 들려온다. 머리에 서리가 내려앉고 얼굴에 골이 파이도록 함께 살아온 부부가 서로를 버리고 쉽게 갈라서다니, 이는 부부의 문제 이전에 사람을 존중할 줄 모르는 경박한 풍조가 만연하기 때문일 것이다. 《퇴계집(退溪集)》에는 이런 세태에 꼭 읽어보라고 권할 만한 편지 한 통이 있다. 이황(李滉)이 어린 제자 이함형(李咸亨)에게 보낸 것으로, 부부 사이가 좋지 못했던 이함형에게 간곡히 충고하는 내용이다. 자신의 부끄러운 가정사를 들어가면서 자상하게 타이르는 스승의 편지에 이함형은 깜짝 놀라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부부 금슬이 다시 좋아졌다고 한다.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천지가 있고 난 뒤에 만물이 있고, 만물이 있고 난 뒤에 부부가 있고, 부부가 있고 난 뒤에 부자가 있고, 부자가 있고 난 뒤에 군신이 있고, 군신이 있고 난 뒤에 예의를 베풀 곳이 있다.”고 하였네. 자사(子思)께서 말씀하시기를 “군자의 도는 부부에게서 시작되니, 지극함에 이르면 천지에 밝게 드러난다.”고 하고, 또 “《시경》에 ‘처자 간에 잘 화합함이 금슬(琴瑟)을 연주하는 듯하다’고 하였는데, 이를 두고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렇게 되면 부모가 편안하실 것이다’고 하셨다.” 하였네. 부부의 도리가 이처럼 중요한 것이니, 마음이 잘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소홀하고 박절하게 대해서야 되겠는가.

 

《대학(大學)》에 “그 근본이 어지러우면서 지엽이 다스려지는 자는 없으며, 후하게 할 데에 박하게 하면서 박하게 할 데에 후하게 하는 경우는 있지 않다.”고 하였는데, 맹자께서 이 말을 부연하시기를, “후하게 할 데에 박하게 한다면 박하게 하지 않을 데가 없을 것이다.”고 하였네. 아! 사람됨이 박하고서야 어떻게 부모를 섬길 수 있겠으며, 어떻게 형제․친척․이웃과 잘 지낼 수 있겠으며, 어떻게 임금을 섬기고 백성을 부릴 수 있겠는가. 공(公)이 금슬이 안 좋다고 내 들었는데, 무슨 이유로 그런 불행이 생긴 것인가?

 

세상을 보면, 이런 문제가 있는 사람이 적지 않으니, 아내의 성품이 나빠 고치기 어려운 경우도 있고, 아내의 얼굴이 못생기고 우둔한 경우도 있고, 남편이 방종하여 행실이 좋지 못한 경우도 있고, 남편의 호오(好惡)가 괴상한 경우도 있네. 경우들이 많아 일일이 거론할 수는 없네. 그러나 대의로 말한다면 그 중 아내의 성품이 나빠 교화하기 어려워 스스로 소박을 당할만한 죄를 지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남편이 스스로 자신을 반성하고 애써 아내를 잘 대해주어 부부의 도리를 잃지 않으면 되네. 그렇게 하면 부부의 큰 인륜이 무너지는 데 이르지 않을 것이고, 자신은 ‘박하게 하지 않을 데가 없는’ 지경에 빠지지 않을 것이네. ‘성품이 나빠 고치기 어렵다’는 것도 몹시 패역(悖逆)하여 인륜의 도리를 어지럽힌 경우가 아니라면 역시 상황에 따라 대처하고 갑자기 인연을 끊어버리지 않는 게 좋네.

 

옛날에는 아내를 버려도 아내가 다른 데 시집갈 수 있었기 때문에 칠거지악(七去之惡)을 저지르면 아내를 바꿀 수 있었네. 그러나 오늘날의 아내는 거개가 한 지아비만 끝까지 따르니, 어찌 정의(情義)가 맞지 않다는 이유로 남처럼 대하거나 원수처럼 대하여, 한 몸처럼 살아야 할 사이가 서로 반목하게 되고 한 이부자리에 기거하면서 천리나 떨어진 것처럼 되어, 가도(家道)가 시작될 곳이 없고 만복(萬福)이 길어질 뿌리가 없게 해서야 되겠는가?

 

《대학》에 “자신에게 잘못이 없는 뒤에 남의 잘못을 지적한다.”고 하였으니, 이 부부간의 문제에 대해 내가 예전에 겪은 것을 말해주겠네. 나는 두 번 장가들었는데 하나같이 아주 불행한 경우를 만났네. 그렇지만 이러한 처지에서도 감히 박절한 마음을 내지 않고 애써 아내를 잘 대해준 것이 거의 수십 년이었네. 그 동안에 마음이 몹시 괴로워 번민을 견디기 어려운 적도 있었네. 그렇지만 어찌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해서 부부의 큰 인륜을 무시하여 홀어머니께 걱정을 끼칠 수 있었겠는가.

후한(後漢) 때 질운(郅惲)이 “부부간의 정은 아비도 아들에게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한 것은 참으로 인륜의 도리를 어지럽히는 간사한 말이니, 이런 말을 핑계 삼고 공에게 충고하지 않을 수는 없네. 공은 반복해 깊이 생각하여 잘못을 고쳐야 할 걸세. 이런 잘못을 끝내 고치지 않는다면, 학문은 어떻게 하겠으며, 행실은 어떻게 하겠는가.

 

[孔子曰: “有天地然後有萬物, 有萬物然後有夫婦, 有夫婦然後有父子, 有父子然後有君臣, 有君臣然後禮義有所錯.” 子思曰: “君子之道, 造端乎夫婦; 及其至也, 察乎天地.” 又曰: “《詩》云: ‘妻子好合, 如鼓瑟琴云云.’ 子曰: ‘父母其順矣乎!’” 夫婦之倫, 其重如此; 其可以情好之未恊, 疎而薄之乎? 《大學》曰: “其本亂而末治者否矣; 其所厚者薄, 而其所薄者厚, 未之有也.” 孟子申其說, 亦曰: “於所厚者薄, 無所不薄也.” 噫! 爲人旣薄, 何以事父母, 何以處兄弟宗族州里, 何以爲事君使衆之本乎? 似聞公有琴瑟不調之歎, 不知因何而有此不幸? 竊觀世上, 有此患者不少. 有其婦性惡難化者, 有嫫醜不慧者, 有其夫狂縱無行者, 有好惡乖常者, 其變多端, 不可勝擧. 然以大義言之, 其中除性惡難化者實自取見疎之罪外, 其餘皆在夫反躬自厚, 黽勉善處, 以不失夫婦之道, 則大倫不至於斁毁, 而身不陷於無所不薄之地. 其所謂性惡難化者, 若非大段悖逆得罪名敎者, 亦當隨宜處之, 不使遽至於離絶, 可也. 蓋古之去婦, 猶有他適之路, 故七去可以易處; 今之婦人, 率皆從一而終; 何可以情義不適之故, 而或待若路人, 或視如讎仇, 牉體歸於反目, 衽席隔於千里, 使家道無造端之處, 萬福絶毓慶之原乎? 《大學》傳曰: “無諸己而后, 非諸人.” 此事請以滉所嘗經者告之. 滉曾再娶, 而一値不幸之甚. 然而於此處, 心不敢自薄, 黽勉善處者, 殆數十年. 其間, 極有心煩慮亂不堪撓憫者, 然豈可循情而慢大倫以貽偏親之憂乎? 郅惲所謂父不能得之於子者, 眞是亂道邪諂之言; 不可諉此而不忠告於公. 公宜反覆深思, 而有所懲改焉. 於此終無改圖, 何以爲學問, 何可爲踐履耶? ]

   

- 이황(李滉, 1501~1570)〈이평숙에게 보냄(與李平叔)〉《퇴계집(退溪集)》

 

 

▶《퇴우이선생진적(退尤二先生眞蹟)》(보물 제585호)에 실린 계상정거도(溪上靜居圖). 퇴계선생이 도산서당에 앉아 있는 광경을 겸재 정선이 그린 그림이다.

 

 

 이함형(李咸亨, 1550~1586)은 자가 평숙(平叔), 호가 산천재(山天齋)이고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효령대군의 후손으로 서울 사람인데 처가가 있는 순천(順天)에 내려가서 살다가 1569년에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하에 들어갔으니, 스승을 모신 기간이 매우 짧았다. 그렇지만 그는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과 함께 《심경(心經)》,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에 관하여 제자들이 묻고 이황이 답한 것을 모아 《심경석의(心經釋義)》와 《주자서강록(朱子書講錄)》을 펴내었다. 실로 독실한 제자였다. 이 편지를 보낼 때 이황은 70세, 이함형은 21세였다. 그리고 이 해에 이황은 세상을 떠났다.

 

 위 공자의 말은 《주역(周易)》에 보이고, 자사(子思)의 말은 모두 《중용(中庸)》에 보인다.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가 죄 없는 곽황후(郭皇后)를 폐위할 때 질운(郅惲)에게 의견을 묻자, 질운이 “신이 듣건대 부부의 정은 아비도 자식에게 어찌할 수 없는데, 하물며 신하가 임금에게 어찌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하였다. 이런 말이 있다고 해서, 부부간에 사이가 좋지 않은 이함형을 그대로 두고 충고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 것이다.

 

이황은 《주역》ㆍ《중용》ㆍ《시경》ㆍ《대학》 등 경서를 두루 인용하여, 부부의 사이가 만사의 근본이며, 만복(萬福)의 근원이라고 하면서 아내의 성품이 아주 못되어 고칠 수 없는 경우가 아니면 부부의 인연을 쉽게 끊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그 이유로 옛날에는 여인들은 개가(改嫁)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고 오직 일부종사(一夫從事)하게 되어 있으니, 아내를 버리면 아내는 갈 곳이 없게 된다고 하였다. 매우 간곡한 설득이요 충고이다.

 

그리고 이어서 이황은 자기의 불행한 과거사를 털어놓는다. 이황은 21세에 진사 허찬(許瓚)의 딸과 혼인하여 금슬이 좋았으나 27세에 상처(喪妻)하고 말았다. 그리고 30세에 봉사(奉事) 권질(權礩)의 딸과 두 번째 혼인을 하였다. 이 허씨(許氏) 부인은 그녀의 조부가 연산군 때 갑자사화로 사사(賜死)되고, 부친 권질도 그 일로 거제도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그녀는 거제도에서 태어났다. 권질은 중종반정(中宗反正) 이후 복권되었으나 기묘사화 때 다시 집안이 화를 당하여 숙부는 사사되고 숙모는 관노가 되고 권질은 이황의 고향인 예안(禮安)으로 귀양 간다. 거듭되는 집안의 참화(慘禍)를 겪으면서 허씨 부인은 심한 충격을 받아 정신이 온전치 못했다고 한다. 이황이 예안으로 귀양 온 권질을 찾아갔을 때, 권질이 이황의 인품을 믿고 자기의 온전치 못한 딸을 부탁했다고 한다.

 

권씨 부인에 관해 재미있는 일화들이 전해진다. 한번은 제사상을 차리다 떨어진 배를 권씨 부인이 치마 속에 감추자 그 모습을 보고 친지들이 웃었는데, 이황은 손수 배를 깎아 부인에게 먹였다고 한다. 또 이황이 조정에 급히 입고 나갈 도포를 빨간 헝겊으로 기웠다는 이야기도 전해지는 것을 보면, 대학자인 이황의 배필로는 모자라도 많이 모자라는 여인이었음은 분명한 것 같다. 그런데도 이황은 1546년 권씨 부인이 먼저 세상을 떠날 때까지 16년간 변함없이 그녀를 감싸주며 부부의 도리를 다하였다. 이 얼마나 훌륭한 인품인가. 오늘날 각박한 남편들이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자기 부부간의 불행한 과거사를 털어놓는 것은 사대부의 집안 범절이 삼엄한 조선시대에는 친구 간에게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49세나 어린 제자에게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사를 솔직히 얘기하면서 부부간의 도리를 다하라고 간곡히 타이르고, 아내를 박대하는 잘못을 고치지 않으면 학문도 쌓을 수 없고 행실도 닦을 수 없다고 간절히 충고한 것을 보면, 이황의 인품이 얼마나 너그럽고도 진솔하였으며 제자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지극했는가를 넉넉히 알 수 있다.

 

이 편지를 읽고 이함형은 잘못을 고쳐 다시 부부 사이가 좋아졌고 소박맞을 뻔했던 이함형의 부인은 이황의 은혜에 감사하여 이황이 세상을 떠나자 심상(心喪) 3년을 살았다 하니, 이 또한 오늘날 들을 수 없는 아름다운 얘기가 아닐 수 없다.

 

 

 

이상하 글쓴이 : 이상하
  • 한국고전번역원 부설 고전번역교육원 교무처장
  • 주요저서
    - 한주 이진상의 주리론 연구, 경인문화사
    - 유학적 사유와 한국문화, 다운샘(2007) 등
  • 주요역서
    - 읍취헌유고, 월사집, 용재집,아계유고, 석주집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