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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의 향기 240] 대한제국의 석고(石鼓) : 조선의 중흥과 중화의 중흥

도솔산인 2012. 11. 7. 13:11

[고전의 향기 240] 대한제국의 석고(石鼓) : 조선의 중흥과 중화의 중흥

 

우리나라 역사상 ‘해동성국’이라는 영예를 얻은 나라의 이름은 무엇일까? 대조영이 세운 나라 발해이다. 하지만 발해에 ‘해동성국’의 영예를 선사한 주인공은 대조영의 아우 대야발의 후손인 발해 10대 임금 선왕(宣王)이었다. 그는 발해의 정치적 혼란을 수습하고 발해를 다시 강국으로 중흥시킨 인물인데, 창업의 제왕이 아닌 중흥의 제왕에게 ‘성국(盛國)’의 칭호가 돌아갔다는 점이 흥미롭다. 그는 왕호부터가 중국 주(周)나라를 중흥시킨 선왕(宣王)과 똑같은데 어쩌면 발해 사람들이 그를 사후에 중흥의 제왕으로 적극적으로 인식했기에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리나라 임금 중에는 생전에 자신의 왕업을 주 선왕의 중흥에 비견하여 이를 시각적으로 구현한 인물이 있다. 그는 누구일까?

 

우리 임금님께서 등극하신 지 34년째 되는 정유년(丁酉年, 1897)은 개국(開國) 506년이다. 국운이 중흥(中興)을 만나 국보(國步)가 융성해졌다. 천관(千官)과 육군(六軍)과 만민(萬民)이 일제히 청하기를 황제의 대위에 올라 명(明)나라의 이미 끊어진 정통을 이어 조종(祖宗)의 마치지 못한 뜻을 이룩하시라 하였다. 지구상의 여러 나라도 한결같이 똑같은 말을 하였다. 임금님께서는 거듭 사양하다 마지못해 9월 16일 원구단(圜丘壇)에 하늘과 땅을 합해 제사지내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나라 이름을 대한(大韓)이라 정하고 연호를 광무(光武)라 하였다. 3년이 지나 사세(四世)를 추존하여 태조(太祖)에 미쳤고, 이어서 태조 고황제(高皇帝)를 원구단에 배향하니 아, 성대하도다! 원구단을 세우는 역사(役事)를 마친 다음에 온 나라의 신사(紳士)들이 장차 돌에 새겨 사적을 기록하려 하니 임금님께서 거듭 타일러 그만두게 하였다. 그러자 신사들이 서로 함께 의논하였다.

 

“우리 한국은 단군(檀君)과 기자(箕子) 이래 동방에 도가 있는 나라였지. 거룩한 우리 왕조가 일어나 태평성대가 계속되니 교화와 문물이 중화(中華)와 어깨를 나란히 했네. 우리 임금님께서 불세출의 바탕을 타고나서 천명에 응하고 인심을 좇아 찬란하게 제왕의 이름을 받아서 제도를 일신하고 예악을 밝게 갖추니 아름다운 은혜가 만백성에게 전해지고 커다란 복이 억만 년 이어가리라. 성대한 공덕은 옛날에도 없던 일이나 천지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본디 임금님께서 탐탁찮게 여기는 일이네. 하지만 송가(頌歌)를 지으려는 생각이 뭉게뭉게 마음에서 피어나니 어찌 임금님의 겸손한 마음 때문에 끝내 그칠 수 있으랴. 주(周)나라에 석고(石鼓)가 있음은 대개 사냥하러 갔다가 선왕의 공적을 기록한 것이니 비록 오늘날에 빗대기는 부족하지만 애오라지 이를 고사(故事)로 원용할 수는 있으리라.”

이에 돌을 벌채하여 석고를 만들고 신(臣)에게 글을 짓기를 부탁하니 신이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감히 두 손 모아 머리를 조아리며 송(頌)을 바친다.

 

[我聖上御極之三十四年丁酉。寔開國五百有六年也。運値中興。國步隆旺。千官六軍萬民。齊請進登皇帝大位。以紹有明已絶之統。而成祖宗未卒之志。環球列邦。亦翕然同辭。上屢讓不獲。以其九月十六日。合祀天地于圜丘。卽皇帝位。定國號曰大韓。建元曰光武。越三年追尊四世。以及於太祖。仍配太祖高皇帝于圜丘。猗歟盛哉。圜丘役訖。一國紳士將刻石以紀其事。上屢諭止之。紳士相與謀曰。惟我韓自檀箕以來。爲東方有道之國。逮我聖朝。重煕累洽。聲敎物采。並駕於中華。我聖上挺不世之姿。應天順人。光膺大號。制度改觀。禮樂明備。流嘉惠於黎元。綿洪簶於億禩。功德之盛。古未有也。封泰山禪梁父。固聖上之所不屑。然頌歌之作。油然由中。詎可以聖衷之撝謙而遂己哉。周有石鼓。盖因田獵而紀宣王之功。雖不足擬倫於今日。然聊可援爲故事。迺伐石作鼓。屬臣爲文。臣不敢辭。敢拜手稽首獻頌。]

 

- 신기선(申箕善 1851~1909), 「석고송병서(石鼓頌幷序)」 『양원유집(陽園遺集)』 권10

 

▶ 광무6년(1902) 고종 황제의 즉위 40주년을 기념하여 세운 석고(石鼓)

나라가 흥하려면 도읍을 옮겨야 하는가? 태조 이성계가 건국한 조선은 천도를 통해 만들어진 새 나라였다. 태조는 처음 개경(開京) 수창궁(壽昌宮)에서 즉위했지만 마침내 결단을 내려 새 수도를 한양으로 정하고 경복궁으로 옮겨 갔다. 비록 2대 임금 정종이 개성으로 후퇴했지만 3대 임금 태종은 다시 한양으로 진출하였고, 이로써 개성의 조선에서 한양의 조선으로 조선의 정체가 확정될 수 있었다. 한양이 새 왕조의 터전이 된 후 다시 천도는 없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광해군이 교하로 천도할 것을 검토해 보았지만 성사되지는 않았다.

 

조선 말기가 되어 사정은 달라졌다. 안팎의 위기로부터 왕국을 구원해야 한다는 절박한 현실인식이 제고되면서 왕국의 새로운 터전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로 떠올랐다. 이에 따라 제2의 건국을 위한 천도 아닌 천도가 추구되었다. 그것이 경복궁을 중건한 뒤 이루어진 창덕궁에서 경복궁으로의 ‘미니 천도’였다. 흥선대원군 덕분에 고종은 임란 이후 경복궁에 들어온 최초의 국왕이 되었다. 조선을 복원하자! 경복궁의 새 아침으로 돌아가자! 영조도 정조도 갖지 못한 경복궁의 새 권위는 고종에게 태조의 조선, 태종의 조선, 세종의 조선을 어른거리게 하였으리라.

 

하지만 건국보다 중요한 것이 중흥이었다. 조선에 필요한 것은 과거회귀적인 건국의 회고가 아니라 미래지향적인 중흥의 달성이었다. 이에 다시금 왕국의 중흥을 위한 새로운 ‘미니 천도’가 단행되었다. 경복궁을 나온 고종은 경운궁(慶運宮)에 들어갔다. 그가 경복궁을 나온 것은 명성왕후를 일본에게 잃은 뒤 감행된 불가피한 탈출이었지만 그가 경운궁에 들어간 것은 제국의 새 아침을 열기 위한 중흥의 결단이었다.

 

고종은 제국의 새 이름을 대한(大韓)으로 정하였고 자신의 중흥의식을 두 개의 연호, 곧 건양(建陽)과 광무(光武)에 차례로 담아냈다. 음(陰)으로 가득한 조선의 천지에 한 줄기 양(陽)을 세우는 일, 그것이 경운궁에 들어가기 전 반포한 건양의 뜻이라면, 왕망(王莽)의 찬탈에 따른 천하의 혼란을 수습하고 한(漢) 제국을 재건한 광무제(光武帝)의 길을 걷는 일, 그것은 경운궁에 들어간 후 반포한 광무의 뜻이었다.

 

고종 이전에도 조선의 많은 임금이 중흥을 자처했지만 고종의 중흥은 남다른 데가 있었다. 중흥은 계술(繼述)과 달리 앞선 시기를 혼란스런 쇠망의 시기로 전제하는 정치적 함의가 내포되어 있다. 고려 공양왕 때에 창왕을 폐하고 이성계 등이 중흥공신(中興功臣)이 된 일, 조선 태종이 다시 한양으로 천도하자 하윤(河崙)이 주(周) 선왕(宣王)의 중흥을 생각하고 한강시(漢江詩)를 헌정한 일, 무신란을 겪은 영조가 중흥의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강조한 일 등 여러 가지 사례에서 이러한 뜻을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신기선(申箕善)이 주 선왕의 중흥을 떠올리며 고종에게 「석고송(石鼓頌)」을 헌정한 것은 조선 말 대한 초 경복궁에서 경운궁으로 오는 암흑의 터널에서 만난 온갖 조선의 ‘음(陰)’과 조선의 ‘왕망(王莽)’을 이겨내고 고종이 중흥을 성취하였음을 찬양한 것이라 하겠다.

 

하지만 「석고송」에서 말하는 고종의 중흥에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송명(宋明)을 끝으로 화운(華運)이 다하여 천하의 도(道)가 동으로 넘어와, 이제는 화하(華夏)의 문물을 우리 황제가 보존하고 예악(禮樂)과 정벌(征伐)을 우리 황제가 내고 있으니, 우리 황제가 바로 ‘정통천자(正統天子)’라는 생각이 그것이다. 대한의 수립은 조선 국가의 중흥이라는 일국사적인 사건일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중화 문명의 중흥이라는 세계사적 사건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대한제국의 역사적 의미을 오직 ‘독립’의 키워드로 독해하는 시각은 불완전하다. 조선후기 지성사의 맥락에서 ‘중흥’의 키워드로도 읽을 것이 요청되는 셈이다. 독립문도 대한의 작품이지만 석고도 대한의 작품이 아닌가?

 

노관범

글쓴이 : 노관범

  •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박사
  • 한국고전번역원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