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칼럼 055] 몸, 타자들의 공동체
조선 시대에는 유의(儒醫)들이 많았다. 유의란 선비이면서 의학의 일가를 이룬 이들을 말한다. 세종이나 정조, 퇴계 이황이나 고산 윤선도, 다산 정약용 등이 널리 알려진 경우다. 유학의 최고 윤리인 효의 실천을 위해서도 의학은 필수적이었다. 《소학(小學)》〈가언(嘉言)〉에 이런 말이 나온다. “이천(伊川)선생이 말하기를, ‘병에 걸려 침상에 누워있는 사람을 용렬한 의사에게 맡기는 것은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지 않고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는 것에 비길 수 있다. 부모를 섬기는 자는 또한 의술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伊川先生曰 病臥於床 委之庸醫 比之不慈不孝 事親者 亦不可不知醫]’고 하였다.” 의사도, 병원도 부족했기에 의학과 양생술을 스스로 익히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리 지식이 높다 해도 의학을 배우겠다고 생각하는 이는 거의 없다. 그만큼 병원이나 의료체계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는 뜻이리라. 《동의보감(東醫寶鑑)》만 해도 그렇다. 한국인에게 있어 《동의보감》의 권위와 신뢰는 엄청나다. 그 편찬자인 허준(許浚)은 동양의학의 아이콘이자 전설이다. 그럼에도 《동의보감》에 담긴 의학적 지혜나 기예를 직접 터득하고자 하는 경우는 거의 드물다. 현대의학이 온갖 방면에서 치명적인 한계를 드러내고 있음에도, 또 지식의 융합과 통섭을 소리높여 외치면서도 《동의보감》을 적극 활용할 생각은 하지 않는다. 참으로 기이한 현상 아닌가.
주지하듯이, 《동의보감》은 동아시아 의학의 흐름을 총망라했을뿐더러 유ㆍ불ㆍ도 ‘삼교회통(三敎會通)’의 기반 위에서 구축된 텍스트다. 임상의 백과사전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건 생명과 우주, 존재와 세계에 대한 아주 낯설고도 역동적인 ‘화두’를 던져준다는 사실이다. ‘몸과 우주는 하나다.’, ‘아파야 산다.’, ‘통즉불통(通則不痛 통하면 아프지 않다)’ 등등. ‘내 몸은 과연 「나의 것」인가?’하는 물음도 그 가운데 하나다. 《동의보감》의 목차는 <내경편(內景篇), 외형편(外形篇), 잡병편(雜病篇), 탕액(湯液)/침구편(鍼灸篇)> 순으로 되어 있다. 방대한 양에 비하면 목차는 실로 단순명쾌한 편이다. 이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내경편〉이다. 내경이란 ‘몸 안의 풍경’이라는 뜻이다. 그 세부목차를 살펴보면, <1편- 신형(身形), 정(精), 기(氣), 신(神) /2편- 혈(血), 몽(夢), 성음(聲音), 언어(言語), 진액(津液), 담음(痰飮) /3편- 오장육부(五臟六腑), 포(包 자궁), 충(蟲) /4편- 소변(小便), 대변(大便)>(강조는 필자)으로 되어 있다. 정, 기, 신과 오장육부 등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그런데 <몽, 성음, 언어, 충, 소변, 대변> 이 항목들이 내 몸 안의 풍경이라는 건 선뜻 납득이 안 된다. 내 몸의 일부인 건 맞지만 이것들이 ‘정, 기, 신’이나 ‘오장육부’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항목이라고는 생각지 못한 탓이다. 그런 점에서 이것들은 내 안의 ‘타자들’이다. 낯설고 이질적이고 왠지 좀 불편한! 일단 이것들은 그 거처와 회로가 불분명하다. 꿈은 대체 어디에 있는가? 성음과 언어 또한 마찬가지다. 안에서 나와 밖으로 울려 퍼지긴 하는데, 그 발생과 소멸의 경로를 확인할 길은 없다. 충은 몸 안팎을 쉴 새 없이 들락거리고, 소변과 대변 역시 몸 안에서 만들어지지만 결국은 ‘외부화될’ 존재다. 요컨대 이 타자들은 안과 밖, 그 ‘사이’에 존재한다. 경계인 혹은 이주민들에 해당하는 것. 하긴 이게 아니라도 우리 몸에서 정체를 파악할 수 없는 영역은 아주 많다. 자율신경계나 무의식 등처럼. 이렇게 미지의 영역이 많다면 과연 내가 내 몸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 중에서도 특히 문제적인 존재가 충이다. 충이라 하면 벌레라는 뜻이지만 우리가 통상적으로 아는 그 벌레는 아니다. 세균, 바이러스, 박테리아 등 뭔가 좀 더럽고 불쾌한 문제아들의 총칭이다. 이 충들은 어떻게 해서 생겨났을까? “비린 회나 날것, 찬 것을 많이 먹어 적(積)이 된다. 이것이 오래되어 열이 생기고 습열이 훈증하여 담이나 어혈이 뭉쳐 오행의 기를 따라서 변화하여 여러 가지 기괴한 형상이 되는 것이다.[過飡腥膾生冷 以致積 久成熱 濕熱熏蒸 痰於凝結 隨五行之氣變化 而爲諸般奇怪之形]” 즉, 외부에서 들어오긴 했는데, 몸 안에서 이런저런 변용을 겪다가 생겨난 셈이다. 그런가 하면, “밤에 물을 마실 때 거머리를 잘못 삼켜서 배로 들어가면 사람의 간혈을 먹기 때문에 참을 수 없이 배가 아프다.[夜間飮水 誤呑水蛭而入腹 能食人肝血 腹痛不可忍] 봄과 가을에 교룡의 정액이 묻은 미나리를 우연히 먹으면 병이 생긴다.[春秋二時 蛟龍帶精入芹菜中 人偶食之得病發]” 거머리에서 교룡의 정액까지, 그 유형도 참으로 다양하다. 이에 비하면 우리가 아는 기생충들-회충, 편충, 요충 등-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현대 생리학적으로도 성인의 몸에는 포유류 세포보다 ‘외부’ 세균 세포가 열 배나 더 많다고 한다. 한마디로 우리의 몸은 “세균들의 잔칫상”인 셈이다. 더 놀라운 건 이들이 우리의 의식과 행동, 말과 습관 등을 조종한다는 사실이다.
삼시충(三尸蟲) : 첫째는 상충으로 뇌 속에 있고, 둘째는 중충으로 명당에 있으며, 셋째는 하충으로 뱃속에 있다. 이것들을 팽거, 팽질, 팽교라고 한다. 충은 사람이 도(道)에 나아가는 것을 싫어하고 뜻을 버리는 것을 좋아한다. 상전(上田)은 원신(元神)이 있는 궁으로 사람은 이 관문을 열 수 없다. 시충이 여기에 살기 때문에 생사윤회가 끝없이 반복되는 것이다. 만약 이 원신을 장악하여 본궁에 머무르게 하면 시충은 자멸하고 진식(眞息)이 저절로 안정될 것이다. 이른바 ‘한 구멍이 열리면 모든 구멍이 열리고, 큰 관문이 통하면 모든 마디가 통한다.’는 것이니, 천진의 기운이 내려오면 신령스럽지 않은 신이 신묘하게 되는 것이다.[一者上蟲居腦中 二者中蟲居明堂 三者下蟲居腹胃 名曰彭琚彭質彭矯也 惡人進道 喜人退誌 上田乃元神所居之宮 惟人不能開 此關被尸蟲居之故 生死輪廻無有了期 若能握元神 棲于本宮 則尸蟲自滅 眞息自定 所謂一竅開 而萬竅齊開 大關通 而百骸盡通 則天眞降 靈不神之神 所以神也] 《동의보감》〈내경 충부(內景 蟲部)〉양생서(養生書)
몸 곳곳을 다 장악하고 있을뿐더러 이들로 인해 생사윤회가 반복된다고 하니, 이쯤 되면 삼시충이 내 안에 기생하는 건지 내가 삼시충의 조종으로 살아가는 건지 정말 헷갈리게 된다. 더 놀라운 건 이들의 기본속성은 ‘도에 나아가는 것을 싫어하고 뜻을 버리는 것을 좋아한다.’는 사실이다. 앗, 그렇다면 사람들이 툭하면 정신을 놓고 엉뚱한 짓을 하는 것이 이 삼시충의 배후조종 탓이었단 말인가. 특히 현대인들은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내가 원하는 게 뭔지 모르겠어.’ 같은 말들을 습관적으로 되뇐다. 현대의학에선 이런 증상을 트라우마(trauma)나 콤플렉스(complex) 같은 심리적 차원에서 다루지만, 《동의보감》에선 충(蟲)의 작용으로 보는 것이다.
근대 위생권력은 지난 100여 년간 이런 이질적 존재들을 쓸어버리기 위해 총력을 다 기울였다. 하지만 그런 식의 박멸 프로젝트는 완전히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무기가 강할수록 이 타자들은 더한층 복잡하게 진화해갔기 때문이다. 《동의보감》의 처방은 전혀 다르다. -“오직 음덕이 있어야 단절시킬 수 있다.[惟陰德可以斷之]” 음덕을 쌓으려면? “산에 들어가거나 고요한 방에 거처하여 마음을 맑게 하고 고요히 정좌하며, 이를 맞부딪치고 분향을 하며, 음식을 절제하고 욕심을 끊으며, 의식을 집중하여 보양해야 한다.[入山林 或居靜室 淸心靜坐 叩齒焚香 節食斷慾 專意保養]” 오호, 결국 수행을 하라는 뜻이다. 삼시충이 가장 싫어하는 일을 함으로써 그 힘을 제어, 조절하는 수밖엔 없다는 것이다. 치유라는 것이 단지 세균을 퇴치하고 병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배치를 바꾸는 것임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실제로 그것이 타자들과 공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도 하다.
몸이 타자들의 공동체이듯, 우리가 사는 사회 역시 각양각색의 타자들이 어우러지는 장이다. 따라서 고정된 주체성, 단일한 정체성 따위는 결코 가능하지 않다. 아니, 무의미하다. 거기에 집착할수록 위계와 서열, 적대성과 아집, 나아가 고립과 소외감만 강화될 따름이다. 더구나 지금은 모든 것이 유동하는 디지털 문명의 시대 아닌가. 어떻게 하면 아(我)와 비아(非我), 안과 바깥, 물질과 정신 등의 이분법을 가로질러 새로운 관계의 장을 열어갈 것인가? 이것을 고민하고 사유해야 할 때다. 《동의보감》의 비전을 적극 활용해야할 이유도 거기에 있다.
글쓴이 : 고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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