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周而不比/연소서재

♠ 다시 정리해 본 창해일사(滄海逸士) 정란(鄭瀾)

도솔산인 2007. 4. 17. 23:05

鄭瀾 交遊人物攷

 

 

♠ 다시 정리해 본 창해일사(滄海逸士) 정란(鄭瀾)


 정란(1725∼1791)은 영조 즉위 1년 경상도 군위 출생. 남인 집안. 당대 권력가& 천재 화공들과의 교유. 20년 넘게 전국 명산 답사한 후 55세 이후에 태백산(묘향산)을 걸쳐 백두산(불함산) 등반 후 지달산(금강산)과 설악산을 주유한 후 한라산을 등반. 유산기(遊山記) 불후집(不朽集)을 남김.

 

 그의 스승 신유한(1681∼?)은 서얼출신으로 과거에 장원급제하고 일찍이 제술관으로 1719년 일본을 다녀온 당시의 신지식인이었다. 가야산에 은거한 신유한을 찾아가 20대에 그의 문인이 되었던 정란이 서른살부터 갑자기 여행을 시작한 까닭이 궁금해서 그가 교유한 인물들을 스크랩하였다.

 

 정란보다 17년이나 위인 이용휴(1708∼1782)는 실학자 이익[1681(숙종7)~1763(영조39)]의 조카이며 남인의 대표적인 문장가로 실학자 이가환[1742(영조18)~1801(순조1)]의 아버지이다. 이용휴 남인을 대표한 당대 최고의 문객이었다. 숙종대에 경신환국으로 대거 숙청을 당한 남인은 영 정조대에 탕평책으로 다시 등용되었고, 정조의 죽음(1800년) 후에는 천주교와 관련 죽음을 당하거나 중앙 정계에서 축출된다.

 

 천재 화가 최북, 김홍도, 강세황, 김응환은 일본을 여행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었고, 이들과의 교유는 당시 지식인들에게 금강산 기행의 열풍과 정란의 山水癖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최북은 금강산 구룡연에 이르러 '천하의 이름난 선비가 천하의 명승에서 죽으면 족하다'라고 하고 구룡연에서 뛰어내릴 정도로 그들의 자연에 대한 광적인 사랑은 가히 짐작할 수 없는 경지라고 생각된다. 정란은 이들과의 교유로 유산기(遊山記) 불후집(不朽集)을 만들어 냈다. 

 

 당대 최고의 지리학자이며 병조참의로《팔도지도》와 《동국여지도》를 제작했던 호남 최고의 천재 신경준과의 만남은 정란이 미답한 백두산과 한라산 여행의 정보를 얻기 위해 찾아간듯 싶다. 백두산과 한라산 등반을 위해서는 강계(江界) 부사와 제주(濟州)목사를 지낸 신경준과 교유는 필연이라고 할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정란은 사대부 가문의 출신으로 돈과 권세와 명예를 버리고 평생 자신이 하고 싶은 여행을 하며 살다간 진정한 자유인이었다. 교유한 사람들은 면면히 살펴보면 한 시대를 풍모한 소인묵객(騷人墨客)들이었다. 18세기 조선 영정조대를 살다간 최고 지식인의 번뇌가 삼한의 명산을 찾게 했을 것이다.

 

2007.   04.  18

- 燕巢齋 學人 이 영 규 -

 

 ♠ 정란(鄭瀾)과 그와 교유한 사람들

 

 * 정란(鄭瀾 1725∼1791) 18세기 후반 경상도 군위 동래 정씨 명문가 출신. 창원부사(昌原府使)를 지낸 정광보(鄭光輔, 1457∼1524)의 10대손, 정씨 가문은 현종(顯宗) 때 대사간과 예조참판을 지낸 정지호(鄭之虎, 1605∼78)때까지 명문가로 이름을 떨쳤다.
 號는 창해일사(滄海逸士). 정란은 그저 여행이 좋아서 조선 천지를 발로 누볐다. 종(縱)으로는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 횡(橫)으로는 대동강에서 금강산까지 자신의 발자국을 남기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천생 여행가였던 것. 그는 자신이 체험한 내용을 글과 그림으로 남겼다.

 

* 신유한(申維翰 1681∼?) 조선 후기의 문장가 자는 주백(周白). 호는 청천(靑泉). 숙종 45년(1719)에 제술관으로 일본에 다녀왔으며, 문장에 능하였다. 저서에 《해유록(海遊錄)》이 있다.

 

* 이용휴(李用休, 1708∼1782) 조선 영조 때의 실학자. 성호학파의 대표적 문인이다. 창강 김택영과 다산 정약용은 각각《소호당문집》권2와《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권15에서 그의 문학활동을 높이 평가하였다. 주요 작품에 《혜환잡저》,《혜환시집》등이 있다.

 

* 강이천(姜이天, 1768∼1801) 조선 정조 때의 가톨릭교도. 자는 성륜(聖倫). 호는 중암(重庵). 진사로서 문명(文名)이 높았으나, 신유박해 때 사학죄인으로 몰려 처형되었다. 저서에 《중암집》이 있다.

 

* 강세황(姜世晃, 1712∼1791) 조선 후기의 문인·화가·평론가. 그림제작과 화평(畵評)활동을 주로 했다. 이를 통해 당시 화단에 한국적인 남종문인화풍을 정착시키고 진경산수화를 발전시켰고, 풍속화·인물화를 유행시켰으며, 새로운 서양화법을 수용하는 데도 기여했다.

 

* 채제공(蔡濟恭, 1720∼1799) 조선 후기의 문신. 영조대의 남인, 특히 청남(淸南) 계열의 지도자로 사도세자의 신원 등 자기 정파의 주장을 충실히 지키면서 정조의 탕평책을 추진한 핵심적인 인물이다. 대상인의 특권을 폐지하고 소상인의 활동 자유를 늘리는 조치인 신해통공(辛亥通共)을 주도하였다.

 

* 최북(崔北, 1712∼1786?)본관 경주(慶州). 자 성기(聖器)·유용(有用)·칠칠(七七)이. 호 성재(星齋)·기암(箕庵)·거기재(居其齋)·삼기재(三奇齋)·호생관(毫生館). 초명 식(植). 호생관이라는 호는 붓(毫)으로 먹고사는(生) 사람이라는 뜻으로, 스스로 지은 것이다. 칠칠이라는 자는 이름의 북(北)자를 둘로 나누어 스스로 지은 것이다. 김홍도·이인문·김득신(金得臣) 등과 교유하였다. 1747년(영조 23)에서 1748년 사이에 통신사를 따라 일본에 다녀왔다. 스스로 눈을 찔러 한 눈이 멀어서 항상 반안경을 쓰고 그림을 그렸으며 술을 즐겼고 그림을 팔아 가며 전국을 주유하였다. 금강산 구룡연(九龍淵)에 투신했으나 미수에 그친 적도 있다. 시에도 뛰어났으며 작품에 《수각산수도(水閣山水圖)》, 《한강조어도(寒江釣魚圖)》, 《풍설야귀도(風雪夜歸圖)》, 《추경산수도(秋景山水圖)》 등이 있다.

 

* 김응환(金應煥, 1742∼1789) 본관 개성(開城). 자 영수(永受). 호 복헌(復軒) ·담졸당(擔拙堂). 도화서화원(圖畵署畵員)으로 상의원별제(尙衣院別提)를 지냈으며, 1788년(정조 12) 왕명으로 내외 금강산을 유력하면서 그림을 그렸다. 1789년 왕명으로 일본의 지도를 그리기 위해 몰래 일본에 들어가려고 떠났으나 부산에서 병으로 죽었다. 이때 그를 수행한 김홍도(金弘道)는 그의 장례를 치른 뒤 혼자 쓰시마섬[對馬島]에 가서 일본 지도를 모사(模寫)해 왕에게 바쳤다. 남종화법의 산수와 진경산수화에 능했으며 대표작에 《금강전도》《금강산화첩》《강안청적도(江岸聽笛圖)》 등이 있다.

 

* 김홍도(金弘道, 1745∼?) 조선시대의 화가. 본관 김해(金海). 자 사능(士能). 호 단원(檀園)·단구(丹邱)·서호(西湖)·고면거사(高眠居士)·첩취옹(輒醉翁). 강세황(姜世晃)의 천거로 도화서 화원(圖畵署畵員)이 된 뒤 1771년(영조 47)에 왕세손(뒤의 正祖)의 초상을 그렸고, 1781년(정조 5)에 어진화사(御眞畵師)로 정조를 그렸다. 1788년 스승 김응환(金應煥)이 왕명을 받고 몰래 일본의 지도를 그릴 임무를 띠고 떠날 때 그를 수행, 부산까지 갔으나 김응환이 거기서 병으로 죽자 홀로 쓰시마섬[對馬島]에 가서 일본 지도를 모사(模寫)해 가지고 돌아왔다. 산수화·인물화·신선화(神仙畵)·불화(佛畵)·풍속화에 모두 능했고, 특히 산수화와 풍속화에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
 
* 신경준(申景濬, 1712∼1781) 조선 후기의 문신 ·실학자. 동부승지(同副承旨) ·병조참지(兵曹參知)가 되어 《팔도지도》와 《동국여지도》를 완성하였다. 성률(聲律) ·의복(醫卜) ·법률 ·기서(奇書)에 이르기까지 통달하였다. 실학을 바탕으로 한 고증학적 방법으로 한국의 지리학을 개척했다.  1771년 북청(北靑)부사, 1773년 좌승지(左承旨) ·강계(江界)부사 ·순천(順天)부사, 이듬해 제주(濟州)목사, 1779년 치사(致仕)하고 고향 순창(淳昌)에 돌아갔다.

 

* 남경희[南景羲1748(영조24)∼1812(순조1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중은(仲殷), 호는 치암(癡菴). 할아버지는 국선(國先)이고, 아버지는 용만(龍萬)이며, 어머니는 유의건(柳宜健)의 딸이다. 1777년(정조 1) 국왕의 즉위기념 증광시(增廣試)에 합격, 진사가 되었고, 동시에 문과에 잡과로 급제하였다. 1788년경부터 승문원박사·성균관전적·사헌부감찰·병조좌랑을 거쳐 사간원정언에 이르렀다. 1791년 사직하고 고향인 경상도 경주 보문리로 돌아온 뒤부터는 정범조(丁範祖)·이익운(李益運) 등의 정치참여 권유도 뿌리치고 스스로 은거하였다.
 자신을 소강절(邵康節)에 비유하여 영호(影湖)에 지연계당(止淵溪堂)을 지어 생도들을 가르치고, 봄·가을에는 사우(士友)들과 강회(講會)를 열면서 유유자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