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周而不比/연소서재

조선 후기의 전문 산악인 정란

도솔산인 2007. 4. 17. 14:10

조선후기의 전문 산악인 정란(鄭瀾)

 

 산에 오름은 배움 길과 같아서 큰 고생 뒤엔 반드시 큰 즐거움 있다.
 오직 하늘만 오르지 못할 뿐 나머지 땅은 내 발이 밟으리라.

이용휴의‘정란을 배웅하며' 중 제7수

 

♠ 정란(鄭瀾 1725∼1791) : 18세기 후반 경상도 군위 동래 정씨 명문가 출신. 창원부사(昌原府使)를 지낸 정광보(鄭光輔, 1457∼1524)의 10대손, 정씨 가문은 현종(顯宗) 때 대사간과 예조참판을 지낸 정지호(鄭之虎, 1605∼78)때까지 명문가로 이름을 떨쳤다.

 號는 창해일사(滄海逸士). 정란은 그저 여행이 좋아서 조선 천지를 발로 누볐다. 종(縱)으로는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 횡(橫)으로는 대동강에서 금강산까지 자신의 발자국을 남기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천생 여행가였던 것. 그는 자신이 체험한 내용을 글과 그림으로 남겼다.

 

▶고전 공부에 열중한 청년기

 정란도 처음에는 다른 사대부들처럼 경서와 문학 공부에 전념했다. 스승은 당시 경상도가 배출한 최고의 문사 신유한(申維翰, 1681∼1752)이었다. 정란은 20대를 전후한 시기에 말을 빌려 타고 금오산에서 200리나 되는 길을 달려 가야산 밑에 머물고 있는 신유한을 찾아가 신유한의 문인(門人)으로 창작에 몰두했다.

 

▶서른, 세상에 묶인 그물을 끊고
 나이 서른에 접어든 정란은 공부를 접고 여행을 떠났다. 잠시 현실을 벗어나 산수와 자연을 탐방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권장할 일이지만, 여행 자체를 즐겨 전문적으로 여행하는 것은 일종의 현실도피로 여겨졌다. 그러나 정란의 경우는 좀 달랐다. 그는 낯선 세계에 대한 모험의 욕망으로 끓어 넘쳤다. 정란은 성품이 오만하여 남들 앞에서 다리를 쭉 뻗고 앉기를 잘했다. 세상이 정한 예법에 얽매이고 싶어하지 않는 그는 출세를 위한 과거시험에 연연해하지 않았다.

 

 

▶청노새, 어린 종, 보따리, 이불 한 채
 집을 나선 창해가 동반한 것은 청노새 한 마리, 어린 종 한 명, 보따리 하나, 이불 한 채였다. 정란은 단출한 여장으로 고독하게 자연과 대면했다. 이렇게 해서 금강산 비로봉을 네 번이나 올랐다. 일생일대의 목표였던 백두산을 등반하기 전에 두 번, 백두산을 등정하고 돌아오는 길에 한 번, 마지막으로 1788년 강세황·김홍도·김응환을 비롯한 사람들과 함께 오른 일이 확인된다. 1788년 9월14일 강세황이 장안사에 묵고 있을 때 어디선가 정란이 표연히 나타난 일이 있었다.

 

 정란은 금강산을 여행하는 자신의 모습을 화가들에게 그려달라고 해서‘산행도(山行圖)’를 만들었다. 그림은 최북(崔北)이 그렸고, 찬(贊)은 혜환(이용휴)이 지었으며, 글씨는 표암(강세황)이 썼으니 이 셋을 삼절(三絶)이라 일렀다”라고 했다. 다음은 남경희가 말하는 이용휴의 찬(贊)으로 추측되는 대목이다.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이 이 산에 다녀갔다 해도 오히려 공산(空山)이었지. 오늘 금강산이 그대를 만나자 모든 바위와 골짜기가 반가운 얼굴을 하는구나! 그대를 두고 산문(山門)을 처음 연 분이라 해도 좋겠구나!》

 

 이 화첩에는 정란이 앉았거나 선 모습, 길을 걷거나 청노새를 타고 홀로 가는 모습, 외로운 배에 홀로 기대 있는 모습, 지팡이를 짚고 먼 데를 가리키는 모습, 갓을 벗고 두 다리 쭉 뻗고 있는 모습 등등 갖가지 자세가 묘사되어 있다. 이 평에 따르면 정란은 금강산의 진면목을 제대로 이해한 최초의 사람이다.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사람이 금강산을 다녀갔지만 그저 다녀만 갔을 뿐 산의 비경을 발견해내지 못했고, 금강산과 감정을 나누지 못했다는 것이다.

 

▶야윈 노새 타고 타박타박

 남경희의 ‘정창해전’에는 정란이 전국을 여행할 때 타고 다닌 청노새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 충직한 청노새는 주인을 태우고 금강산을 오르고 관동팔경을 두루 구경하며 내려오다 그만 삼척 땅에서 병들어 죽었다. 정란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길가에 묻고 제문을 지어 애도했다. 사람들은 청노새가 죽어 묻힌 곳을 청려동(靑驢洞)이라 불렀다. 청노새는 김홍도가 그린 ‘단원도(檀園圖)’에도 등장한다.

  

 단원도

 

 정란은 전국을 떠돈 여행가지만 본래 시와 문장에 능한 문인이었다. 세상을 주유하며 시와 글을 지어 소지한 해낭(奚囊)에 넣었다. 산의 풍치를 묘사하거나 그림을 그려 산맥과 수맥을 표시한 ‘유산기(遊山記)’도 그 해낭에 들어 있었다. 그는 여행의 의미를 예술적으로 담는 일에도 주목하여 각지에서 산수유기를 썼고, 화가와 문장가들로부터 자신의 산행을 묘사한 그림과 글씨를 받았다. 이 서첩이‘불후첩(不朽帖)’이다.

 * 奚囊(해낭) : 명승지를 찾아다니며 읊은 시나 문장 따위의 초고를 넣는 주머니.

 

▶“나는 아직 힘이 있어”
 서른 살부터 20여 년간 조선 팔도를 구석구석 탐방했지만 백두산과 한라산은 미답의 세계로 남아 있었다. 쉰다섯 되던 해, 정란은 백두산과 한라산 등반계획을 세웠다. 18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백두산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었다.

 
 당시 백두산은 오지 중의 오지로 등산이 아니라 탐험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정도였다. 개인의 의욕만으로는 오를 수 없는 산이었던 것이다. 백두산과 한라산 등반은 여행가로서 그의 삶을 완성하는 목표였다.
 물론 쉰다섯 살 노인에게 백두산과 한라산을 오르는 일이 생각만큼 쉬울 리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아직 힘이 있어”라는 말이 더욱 비장하게 들린다. 정란은 등반에 앞서 이용휴와 신경준 등 명사들을 두루 방문하여 여행계획을 비추며 격려의 글을 받아냈다. 이용휴는 다음 시를 써서 그의 등반 성공을 축원했다.

 

 오래도록 백두산 좋다는 말 들어         흉중에는 백두산 고질병이 붙었거니
 가다가 하늘 끝에 흰 눈이 보이거든     우선 술잔 들어 환희를 표하시게.

 

 정란은 18세기 호남이 배출한 3대 천재 중 하나라는 신경준을 찾아가 “나는 곧 관서 땅으로 가서 왕검성에 이르러 토산(兎山)과 정전제를 구경하고 태백산(묘향산)에 들어가 단군대를 방문하고 개마고원을 넘어서 불함산(不咸山:백두산의 이칭)에 오를 것이오. 그리하여 이국(二國) 산천을 내려다본 다음에 남쪽으로 내려와 지달산(금강산)과 설악산을 노닐고서 돌아올 것이오”라고 말한다. 그 말을 한 지 이태 뒤인 1780년 전후한 시기에 정란은 등반을 감행했다.

 

 백두산 유람은 거의 1년 정도 걸린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백두산에서 돌아와 사람들에게 신기한 견문을 전달했다. 강이천에게는 도중에 고생한 일, 유람하며 본 일, 산과 계곡의 기이함, 구름과 초목의 온갖 모습을 밤새도록 말해주었다. 화가 최북에게는 자신이 본 것을 그려달라고 부탁하고 이를 친구 신국빈에게 보여주었다.

 

 정란은 친구에게 백두산 정상에 올랐더니 천하만사가 까마득히 저절로 잊혀졌소. 세상의 이른바 부귀빈천, 사생과 애환이 하나도 내 가슴으로 들어오지 않았고, 제왕과 영웅호걸의 업적이란 것도 그저 미미한 것에 불과하더이다”라고 그 충격을 전해주었다.

 

▶“이제 한라산만 남았다”
 지인들과 담소를 나누는 자리에서 정란은 이제 한라산만 남았다고 말했다. 그러자 이용휴가 만류하는 글을 써주었다. 이용휴의 만류로 보아 한라산에 오르겠다는 정란의 의지가 강했음을 알 수 있다. 당장이라도 떠날 듯한 기세였지만 정란이 한라산과 조우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김홍도와 만난 1784년, 새봄이 되면 한라산을 오르겠노라고 한 것을 보면 1785년 봄에 한라산 등반에 성공한 듯하다.

 

 여행가의 삶은 고단했다. 서른 이후 정란이 본격적인 여행에 빠지면서 모든 세속적 성공을 포기했을 뿐만 아니라 가정까지도 거의 버린 듯하다. 채제공은 화첩을 들고 찾아온 정란을 평하여 “처자식을 버리고 명산대천 여행을 좋아한다”고 평했다.

 

▶가정을 포기한 山水癖
 정란은 산수에 관한 열정 하나로 자기가 좋아하는 여행에 인생을 바친 선비다. 그러한 독특한 삶 때문에 당시 어린아이들과 종들조차 그를 ‘창해 선생’이라 불렀다고 한다. 현대적 개념으로 보자면 여행가, 혹은 산악인쯤 될까. 18세기 조선 땅에서 ‘산수벽(山水癖)만큼은 정란을 따를 자가 없었다.

 

 


  

 글: 안대회 영남대 교수·한문교육 ahnhoi@yumail.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