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崇祖惇宗/독립운동

왕산 허위의 당질 허형식

도솔산인 2006. 9. 18. 22:08
1907년 헤이그밀사사건으로 고종이 퇴위당하고 군대가 해산되자,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이들은 전국 의병연합체인 13도창의군을 꾸려 서울 탈환작전에 나선다. 이때 군사장으로 의병을 총지휘한 인물이 바로 허형식의 당숙인 왕산 허위(1855~1908)였다.

21살때 조선인 조직해 하얼빈 일 영사관 습격주도
소련으로 이동 거부…끝까지 ‘현장’ 서 무장투쟁

허위가 이끄는 의병은 그해 11월 동대문 밖 30리까지 진출했으나 최신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 밀려 후퇴한다. 그 뒤 허위는 친일파들의 회유를 뿌리치고 임진강 유역을 중심으로 항일전을 펼쳤으나, 1908년 일제에 의해 체포돼 서대문형무소 ‘1호 사형수’가 됐다.

허위의 봉기는 대지주이자 유학자 가문이었던 허씨 집안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진행됐다. 허위의 형이자 종손인 허훈은 3천 마지기 땅을 팔아 군자금으로 내놨고, 허겸은 허위와 함께 1895년 의병 투쟁에 함께 나서기도 했다. 허위의 사촌이자 허형식의 큰아버지인 허형도 을사오적 가운데 한 사람인 이근택 습격사건에 연루돼 체포된 경력이 있다.

허위가 희생당한 뒤 그의 집안은 의병장 집안으로 낙인찍혀 헌병과 밀정의 극심한 감시에 시달렸다. 견디다 못한 허겸은 1912년 대대로 살아오던 경북 선산(현재는 구미시) 임은동을 뒤로하고 허위의 가족까지 이끌고 망명길에 오른다. 허형식의 부친인 허필과 허형도 몇 년 지나 그 뒤를 따른다.

이후 허씨 집안은 석주 이상룡과 함께 남만주에서 부민단을 이끌며 교민들의 단합과 독립운동에 매진한다.

허위 세대가 의병을 일으켜 쓰러져가는 나라를 일으켜 세우려 했다면, 다음 세대는 독립군 활동으로 조국의 해방을 위해 희생했다. 허위의 아들인 허학은 의병에 종사했고, 허형식의 사촌형인 허발과 허규, 육촌인 허학과 허국이 항일투쟁 혐의로 일제의 요시찰 대상에 올랐다.

 1936년 허형식과 그의 부하 200여명이 불시에 만난 일본군과 만주국군으로 이뤄진 토벌대 300여명과 접전을 벌인 끝에 적 수십 명을 살상하고 기관총과 말 등을 빼앗은 거샨(閣山)의 전경.

또 허형식의 사촌 누이인 허길의 아들은 저항시인으로 유명한 이육사(본명 이원록)다. 허위 집안의 후손들 대부분도 독립운동에 뛰어들면서 그 사이에 사상적 분화가 이뤄졌는데, 허형식이 가장 ‘왼편’에 있었다.

허위의 집안은 의병·독립군 활동에 전 집안이 나서 희생했다. 그 결과 후손들은 불행하게도 러시아·북한·미국 등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다만 해방 뒤 정부는 허위의 독립운동을 기려 해방 뒤 동대문에서 청량리에 이르는 길을 왕산로로 이름 붙이고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1호를 추서했다. 최근에는 구미시청이 기념관 건립 등 왕산 추모사업 계획을 발표하고, 왕산의 일족은 왕산이 태어난 집터 600여평을 기념사업 부지로 내놓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장세윤 고구려재단 연구위원은 “이런 집안 내력은 허형식이 어려서부터 항일투쟁에 투신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는데, 허씨 집안의 독립운동은 보기 드문 ‘문중 독립운동’의 전형”이라고 말했다.

온 집안이 독립운동에 투신

 당숙은 의병장 허위…종질은 저항시인 이육사

1930년 5월 1일 메이데이를 맞아 만주 하얼빈 일본영사관 건물 주변에 노동자와 농민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이들은 곧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자’ ‘일제의 만·몽 침략을 반대한다’ 등의 펼침막을 들고 행진을 시작했다. 수십 명의 시위대는 벽돌과 돌멩이를 영사관에 던져 유리창을 모조리 부쉈다. 일부 시위대는 영사관 안으로 들어가 내부의 기물을 박살내고 총영사 관저에도 침입했다. 화들짝 놀란 영사관 직원들은 현지 경찰을 불렀고, 참가자 30여명이 체포됐다.

조선에 이어 만주를 집어삼키려던 일본의 영사관을 습격한 사건은 당시 <조선일보> 1면에 보도됐을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1930년대와 40년대 초반에 북만주에서 활동한 뛰어난 항일 무장투쟁 지도자가 대중들 앞에 등장한다. 바로 허형식(1909~1942)이다.

21살에 조선인 농민 등을 조직해 일본영사관 습격을 주도한 그는 1931년 선양감옥에서 출소한 뒤 지린성 빈현에서 반일동맹회와 공산주의청년단, 자위대 등의 항일투쟁 단체를 꾸렸다. 또 쑹화강(송화강) 하류의 위허에서는 부두 노동자로 일하며 반일회를 조직해 100여명의 회원을 모았다. 1933년에는 탕위안현에서 반일회원 1천여명을 모았고, 주허현(현재 상지현) 헤이룽궁 일대에서는 반일 선전·조직 활동을 폭넓게 벌이고 반일유격대 창설의 기틀을 짰다.

뛰어난 대중 조직 성과를 낸 그는 1935년 반일유격대와 국민당 계열의 의용군 등이 연합한 동북인민혁명군 제3군이 만들어지자, 2단 단장으로 취임해 군사지도자의 길을 걷는다. 그는 같은 해 10여개의 의용군지대와 연합해 옌서우현 류수허쯔의 일본군 거점과 주허에 있는 일본의 농장 설비 등을 공격해 이름을 떨쳤다.

동북인민혁명군이 1936년 동북항일연군으로 발전할 때에도 그의 군사적 수완은 빛을 발한다. 일제의 토벌에 맞서 3군이 북만주 서북 방면의 새로운 유격투쟁 지역을 개척할 때 선발대장으로 임명된 그는 200여명의 부하를 이끌고 임무를 완수했다. 이듬해에는 항일연군 3·5·6·9군 등의 징세 및 군수물자 배분 문제 조율과 부대간 협동을 위해 만들어진 합동판사처 주임으로 취임했다. 동북인민혁명군과 동북항일연군은 중국공산당 지도 아래 만주에서의 항일투쟁을 주도한 군사조직으로, 중국인과 한국인 등의 민족통일전선 성격을 띠었다. 전성기 때 규모가 1만명이 넘은 항일연군은 일제의 만주 및 중국 침략에 커다란 장애였다. 또 국내 진공작전을 펼치기도 해,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도 위협으로 작용했다.

항일연군 3로군 연구 전문가인 헤이룽장성 당사연구실 자오쥔칭 전 부주임은 “허형식은 당시 북만주 항일투쟁 각 부대 간의 총괄 조정과 공동작전을 연계시키는 매우 중요한 업무를 맡았다”며 “이때부터 그의 항일투쟁의 전성기가 전개된다”고 말했다.

허형식은 1939년 5월 북만주지역의 항일연군 3·6·9·11군을 통합해 출범한 3로군의 참모장 겸 3군 군장으로 취임하며 명실상부한 최고위급 지휘관으로 활동한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 일제의 탄압도 극에 달했다. 1940년 일제는 관동군을 76만명으로 늘려 토벌을 더욱 강화했다. 이에 항일연군 1~3로군의 지도부와 잔여 병력들은 1941년까지 상당수가 소련 영내로 이동했다. 그의 동료들은 소련행을 설득했지만, 끝내 만주 잔류를 고집하며 무장투쟁을 고수했다. 영하 30~40도의 혹한 속에서 유격전을 주도하던 그는 1939~1940년 매우 어려운 시기에 눌하현성과 극산현성, 조원현성을 습격해 수비대를 사살하고 무기와 의복 등을 빼앗는 큰 성과를 냈다.

하지만, 그는 1942년 8월 파언, 둥싱 등지의 대중조직 점검을 나갔다가 칭청(현재는 칭안)현 칭펑링 산골에서 토벌대에 포위되고 말았다. 토벌군은 격전 끝에 그를 사살하고 머리를 베어 경찰서 입구에 매달았다. 뒤늦게 그의 부하들이 주검을 수습하러 현장에 갔지만 몸뚱이마저 승냥이에게 다 뜯어먹혔고 다리 한쪽의 아랫부분만이 근처에 남아 있었다.

장세윤 고구려연구재단 연구위원은 “만주 항일투쟁사에서 허형식처럼 현장을 지키며 철저히 싸운 고급 지휘관도 별로 없다”며 “하지만 정부는 그가 사회주의자였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활동이나 유적지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다”고 말했다.

하얼빈·칭안/글·사진 이순혁 기자 hyu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