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계동 놀이터에서 금대암 가는 길
▣ 일 시 : 2025년 06월 20일(금)~22일(일)
▣ 코 스 : 금계마을-천왕할미상-금대암-지리산둘레길-금계마을-두모담
▣ 인 원 : 3명
▣ 날 씨 : 금, 토 : 비/일 : 맑음
금계마을 택지를 개발한 곳에서 조금 올라가면 마고할미상을 모셔 놓았다. 금계마을에 살았던 풍운도사(심상희)가 조성하였다고 한다. 정확한 조성 시기는 확인하지 못했다. 이곳에서 금대암으로 올라가는 길은 없다. 염소 울타리를 넘어 가파른 능선 길을 따라 오르니 창원마을에서 금대암으로 가는 허리길이 나타난다. 1489년 4월 15일 탁영 김일손과 일두 정여창, 천령 유생 임정숙이 등구사에서 금대암으로 내려온 길이다.
■ 1489년 탁영 김일손의 「두류기행록」
○ 4월 14일, 임인일.
드디어 천령의 남쪽 성곽의 문에서 출발하였다. 서쪽으로 10리쯤 가서 시내 하나를 건너 객사에 이르렀는데, 제한(蹄閑)이라고 하였다. 제한에서 서남쪽으로 가서 산등성이를 10리쯤 오르내렸다. 양쪽으로 산이 마주하고 있고 그 가운데 한줄기 샘이 흐르는 곳이 있었는데, 점점 들어갈수록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몇 리를 가서 한 고개(오도재)를 오르니, 따르는 자가 말하기를, “말에서 내려 절을 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누구에게 절을 하느냐고 묻자 그가 답하기를, “천왕(天王)입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천왕이 무엇인지 살피지 않고 말을 달려 지나쳤다. 이 날 비가 물을 대듯이 내렸고 안개는 온 산을 감고 있었다. 따르는 자는 모두 도롱이를 입고 삿갓을 썼다. 진흙 길이 미끄럽고 질퍽하여 서로 잃어서 뒤처졌다.
나는 말을 믿고 몸을 맡겨 등구사(登龜寺)에 이르렀다. 솟아오른 산의 형상이 거북과 같은데, 절이 그 등에 올라앉아 있는 것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오래된 축대가 빼어났는데 축대의 틈새에 깊숙한 구멍이 있었다. 석간수(石澗水)가 북쪽에서 흘러 그 속으로 흘러내렸는데 졸졸 소리를 내는 듯하였다. 그 위쪽엔 동, 서로 두 사찰이 있었는데, 일행은 모두 동쪽 사찰에 묵기로 하고 따르는 자를 가려서 보냈다. 내리는 비의 기세가 밤까지 계속되었고 아침까지 그치질 않았다. 마침내 절에 머물며 각자 낮잠을 잤다.
한 승려가 문득, “비가 개어 두류산 가는 길이 보인다.”라고 알려주니, 우리 세 사람이 놀라서 일어나 졸린 눈을 비비고 내다보니, 세 개의 푸른 봉우리가 문 앞에 우뚝 솟아 있는 듯했다. 흰 구름이 가로지르듯 감싸고 있어 짙푸른 봉우리만 희미하게 보일 뿐이었다. 조금 뒤에 다시 비가 내렸다. 내가 농담 삼아 말하기를, “조물주도 역시 마음이 있는가 봅니다. 산의 형세를 숨겼다가 보여주었다가 하니 시기하는 것이 있는 듯합니다.”라고 하니, 백욱이 말하기를, “어찌 산신령이 객을 오랫동안 잡아두려는 계책인지 알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날 밤에 다시 맑아져서 달빛이 환하게 비추자, 푸른 산의 모습이 모두 드러났다. 굽이굽이 이어진 골짜기에는 선인(仙人)과 우객(羽客)이 와서 너울너울 춤을 추고 있는 듯하였다. 백욱이 말하기를,“사람 마음이 밤기운을 받아 이때에는 속세의 찌꺼기라곤 전혀 없군요.”라고 하였다. 나의 어린 종이 제법 피리를 불 줄 알아서 불게 하였더니, 빈산에 메아리가 울리기에 충분하였다. 세 사람은 서로 마주 대하여 놀다가 밤이 깊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 4월 15일, 계묘일.
다음날 새벽에 나는 백욱과 짚신을 신고 지팡이를 짚고 등구사에서 1리 정도 걸어 내려갔는데 볼 만한 폭포가 있었다. 다시 10리쯤 가서 한 외딴 마을을 지났는데 그 마을에는 감나무가 많았다. 험한 고개를 넘어 산허리를 거쳐 오른쪽으로 돌아 서북쪽으로 가니 바위 아래에 샘이 있어서 두 손으로 물을 움켜 마시고 이어 세수를 하였다.
그곳에서 나와 한걸음에 금대암(金臺菴)에 닿았다. 한 승려가 나와·물을 긷고 있었는데 나와 백욱이 암자 내로 들어섰다. 뜰 가운데는 모란 몇 그루가 있었는데, 반쯤 시들었지만 꽃은 매우 붉었다. 누더기 승복를 입은 승려 20여 명이 가사(袈裟)를 입고서 뒤따르며 범패(梵唄)를 하고 있었는데 그 속도가 매우 빨랐다. 내가 물어보니 이곳은 정진 도량(精進道場)이라고 했다. 백욱이 그럴듯하게 해석하기를, “그 법이 정일(精一)하여 잡됨이 없고, 나아가되 물러섬이 없고, 밤낮으로 쉬지 않고 부처가 되는 공덕을 쌓는 것이니, 조금이라도 게을리하는 자가 있으면 그 무리 가운데 민첩한 한 사람이 긴 막대기로 내리쳐 깨우치게 하여 번뇌와 졸음을 없애게 합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부처가 되는 것도 고된 일입니다. 배우는 자가 성인이 되는 공부를 이와 같이 한다면 어찌 이루는 것이 없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암자에는 여섯 개의 고리가 달린 석장(錫杖)이 있었는데 매우 오래된 물건이었다. 정오가 되어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좁은 바위 계곡을 내려다보니 갑자기 물이 불어나 호수와 같았다. 아득히 상무주암(上無住庵)과 군자사(君子寺)를 바라보면서 가보고 싶었지만 냇물을 건널 수 없었다. 산길을 내려가려니 매우 험난해서 발을 땅에 붙일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지팡이를 앞으로 내 짚으며 미끄러지듯이 내려갔다. 안장을 얹은 말이 산 아래에 기다리고 있었다. 말을 타고 가는데, 겨우 한 걸음을 옮기자마자 내가 탄 말만 한쪽 다리를 절룩거려 방아를 내려 찧는 것 같았다. 내가 백욱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절뚝거리는 노새를 타고 가는 풍미(風味)는, 시인이 참으로 면할 수 없는 것인가 봅니다.”라고 하였다.
1586년 양대박(梁大樸, 1543~1592)의「두류산기행록」 9월 4일 일정(백장사→변사정 구거지→도탄→실상사→두모담→군자사)에서 두모담(頭毛潭)을 지나간다. 「두류산기행록」에 "바위 가운데는 절구처럼 우묵하게 들어간 것도 있고, 가마솥처럼 움푹 팬 것도 있었다. 두모담(頭毛潭)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그중에는 밑이 보이지 않을 만큼 깊은 절구 같은 바위도 있고, 수레바퀴가 들어갈 만큼 큰 가마솥 같은 바위도 있었으니, 어쩌면 신령스런 용이 구슬을 감춘 굴이거나 옥녀가 머리를 감은 대야가 아닐까?"라고 묘사하고 있다. 두모담(頭毛潭)은 지금의 부연정(釜淵亭) 아래 부연(釜淵)를 가리킨다. 지금은 콘크리트 보(洑)가 있어 원형을 잃었지만, 가마솥 모양의 부연(釜淵)에서 옥녀가 머리를 감았다는 전설에서 두모담(頭毛潭)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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