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산행기록

금계동 신동이 별업(金鷄洞申東伊別業)

도솔산인 2025. 6. 16. 06:13

금계동 신동이 별업(金鷄洞申東伊別業)

 

 

▣ 일 시 : 2025년 06월 14일(토)~15일(일)

▣ 코 스 : 금계마을-추성리-두지터-선녀탕

▣ 인 원 : 3명

▣ 날 씨 : 비, 다음날 맑음

 

 

  2020년 12월부터 지리산 마천면사(智異山 馬川面史)를 집필하면서, 금계마을 구의탄초등학교 차가운 교실 바닥에서 두 해 겨울을 보냈다. 그 후 3년을 단옥재(丹玉齋)에서 더부살이[寄食]를 하였다. 언제까지 마천에 머무를지 모르지만, 탄수(灘叟) 이종식(李鍾植, 1871~1945) 공이 창시한 금계동(金鷄洞)에 새로운 거처를 마련하였다. 영룡봉, 영랑대, 중봉, 상봉, 제석봉이 조망되고, 우로는 창암산이, 좌로는 와불산과 노장대까지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탄수 이종식 선생 금계동 창시 기념비

 

소재지 : 함양군 마천면 금계길 13-8(의탄리 902번지)

행적자 : 탄수 이종식    연대 : 한말과 일제강점기  석각시기 : 2004년(甲申) 10월 10일

 

[개요]

이종식(李鐘植, 1871~1945)공의 본관은 경주 호는 탄수(灘叟), 마천면 의탄리 의중 마을에서 호군가선동추(護軍嘉善同樞)지낸 이규현(李圭玹, 1848~1935) 公의 三男으로 태어났다. 죽포 이규현(李圭玹) 공과 장형(長兄) 이종순(李鐘純 1866~1913) 공이 정미(1907년) 의병장 석상용 의진에 총과 군자금을 지원했다가, 장형(長兄) 이종순(李鐘純) 공이 붙잡혀가자, 탄수(灘叟)공이 실상사에 주둔한 일본군을 찾아가 처형 직전의 장형(長兄)을 구명하였다. 이후 탄수공이 금대암에 들어가 10년 동안 주역 공부를 하고 1918년경 하산하여 정감록의 비결에 따라 금계 마을을 금계포란형 길지로 믿고 외딴집을 짓고 살았다. 탄수공은 암흑과 같은 일제 강점기에  마천에서 해가 처음 뜨는 곳을 금계동(金鷄洞)이라고 이름하고 금계가 우는 광복을 기다렸다. 탄수공의 예언대로 해방이 되었고, 6.25사변을 거치면서 화전민들이 소개되어 금계동은 큰 마을을 형성하였다. 2004년 10월 10일 금계동민들이 선생의 공을 기려 금계마을에 탄수이종식선생금계동창시기념비(灘叟李鍾植先生金鷄洞創始紀捻碑)를 세웠다.

 

비문

선생은 慶州人으로 字는 汝長이요 號는 灘叟니 竹圃公諱圭玹의 子이시다. 公은 1871년(辛未) 12월 15일 생 1943년(癸未) 12월 4일 卒하시다. 平素 不慕浮華하고 守分樂道하셨으니 允矣君子시며 功深厚德은 百世仰止라. 易學에 밝아 推數에 能하여 社會變遷을 豫知하셨으며 義灘金溪洞名 바위에 刻하고 不遠大村이 될 것이라 豫言하셨다. 至今까지 其創始의 功을 不忘키 爲하여 이 紀念碑를 세운다.

 

2004년 10월 10일 金溪洞民一洞 謹竪

 

※ 탄수공의 卒年이 경주이씨 세보에는 1945년, 비석에는 1943년임.

 

출처 : 지리산 마천면사(智異山 馬川面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