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봉에서 부르는 노래 호연재의 일창송(一蒼松)
▣ 일 시 : 2025년 05월 31일(토)~6월 1일(일)
▣ 코 스 : 중산리-마야계곡-중봉-영랑대-청이당-새재
▣ 인 원 : 3명
▣ 날 씨 : 맑음(영상 10도)
一蒼松 : 힌 그루 푸른 솔
浩然齋 安東金氏
永夜眠難得 : 긴긴밤 잠을 이루지 못하니
悄悄待曉鍾 : 悄悄조용히 새벽종을 기다린다
玲瓏半夜月 : 영롱한 半夜月한밤중의 달이요
蕭瑟五更風 : 蕭瑟소슬한 五更오경 바람이야
世事愁千疊 : 세상 일은 근심이 천 겹이요
離情恨萬重 : 떠난 정은 恨이 만 겹이어라
回瞻身外伴 : 몸 밖의 벗을 돌아보니
只有一蒼松 : 오직 한 그루 푸른 솔뿐이로다.
이 시는 조선 중기에 살다 간 호연재 김씨(1681~1722)의 시이다. 그녀는 동춘당 송준길의 증손자인 소대헌 송요화와 결혼해 살다가 42세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호연재의 자경 편을 보면 결혼생활이 순탄치 못했던 듯... "지아비가 나를 버린다면 구태여 매달리지 않겠다"라고 할 만큼 당시로는 상당히 파격적인 언사이다. 참으로 당찬 여인이다. 그러나 얼마나 삶이 외로웠으면 '세상일은 근심이 천 겹[世事愁千疊]이요, 떠난 정은 恨이 만 겹[離情恨萬重]이어라'라고 노래했을까. 행복은 순간이다. 외롭지 않은 사람은 없다.
■ 浩然齋 안동 김 씨
호연재의 고조부 김상용(1561~1637)은 병자호란 때에 강화도에서 소현세자를 지키기 위해 청나라 군대에 항거하다 화약고를 폭파 순절하였고 김상용(고조부)의 동생 김상헌(1570~1652)은 병자호란 때 주전파로 6년 동안 청나라에 억류되기도 하였음. 호연재의 시댁 동춘당 송준길(1606~1672) 선생은 북벌론의 주역이었음. 호연재는 김상용의 증손녀, 송준길의 증손부이다. 홍성 갈산 출신인 백야 김좌진(1889~1930) 장군이 문충공 김상용의 11대 후손이니, 가문의 혈통과 기질이 무관한 것은 아닌 듯하다.
■ 浩然齋(1681~1722) 연보 소략
홍성 갈산 오두리에서 안동인 김성달 연안이 씨 사이 6남 4녀 중 여덟째로 태어남(1681년), 19세에 소대헌 송요화와 결혼함(1699년 10월 16일), 큰오빠 김시택이 동생들과 주고받은 시를 모아 <연주록>을 엮음[162수 중 31수](1703년 3월), 혼인한 지 9년 만에 아들 익흠을 낳음(1708년 1월 18일), 아들을 둔지 9년 만에 딸을 낳음(1717년 1월), 42세에 세상을 떠남(아들 5세, 딸 9세) 아들에게 <付家兒>로 유언을 대신함(1722년 5월 15일), 소대헌의 9대손 송용억이 <호연재시집>간행[72제 91수](199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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