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崇祖惇宗/청권사

함허당 득통화상 행장(涵虛堂得通和尙行状) - 門人 埜夫 錄

도솔산인 2024. 11. 14. 20:58

함허당 득통화상 행장(涵虛堂得通和尙行状) - 門人 埜夫 錄

 

 

 

▮함허당 득통화상 행장(涵虛堂得通和尚行状) 

 

涵虛堂 得通和尚 行状 - 門人 埜夫 錄

.

師 諱己和 號淂通 舊名守伊 號無準 所居室曰涵虚堂 俗姓 劉氏 中原人也

선사(先師)의 휘(諱)는 기화(己和, 1376~1433)이고, 호(號)는 득통(得通)이다. 예전 이름[舊名]은 수이(守伊)이고, 법호(法號)는 무준(無準)이며, 거처하는 집은 함허당(涵虚堂)라고 하였다. 속세의 성(姓)은 유씨(劉氏)로 중원인(中原人. 충주 유씨)이다.

 

考諱聽 官至典客寺事 母方氏 方 因無子 頌禱慈悲大聖

돌아가신 아버지 휘(諱)는 청(聽)이며, 관직은 전객시사(典客寺事)에 이르렀다. 어머니는 방씨(方氏)이다. 방씨(方氏)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부처님[大聖]께 자비(慈悲)를 베풀어 주기를 빌었다[頌禱]

 

夜夣 忽見大聖 手提孩童 納其懷 因而有娠 以洪武九年丙辰十一月十有七日 生𩾏

밤 꿈속에서 홀연히 부처님께서 손으로 어린아이를 끌어 그의 품에 안기게 하는 것을 보고 인하여 아기를 갖게 되어, 홍무 9년[1376. 丙辰年] 11월 17일에 태어났다.

 

為兒嬉戲 凡所動靜 異扵常流

어려서 장난하며 놀 때에 모든 행동거지[動靜]가 보통 사람과 달랐다.

 

幼入泮宫 日記千餘言 少長深達一貫之唯 明𦀇講學

그는 어려서 반궁(泮宮)에 들어 날마다 수천의 글자를 기억하였고, 조금 성장해서는 일관(一貫)에 대한 대답(唯)을 깊이 통달하여 경서를 외우고 학문을 닦고 연구하였다.

 

擅其嘉聲 制述文詞 理致幽微 百爾出言 鏗𨪙婉䴡 錦上添花 未𠯁為喩

그 아름다운 명성을 널리 떨쳤고, 시문(詩文)이나 글을 지으면 이치가 심오하고, 여러 가지 하는 말이 금옥 소리처럼 아름다우니, 비단에 꽃을 수(繡)놓았다는 말로도 비유하기에 부족했다.

 

人之言 曰将北靣而𡭊揚休命 則致君澤民 𦀇緯人倫 必無愧扵周召矣

사람들이 말하기를 “장차 임금을 섬기면서[北面] 왕명(君命)을 받들어 그 뜻을 널리 백성(百姓)에게 알리고, 성군(聖君)으로 인도(引導)하여 백성에게 그 혜택을 돌아가게 하여 인륜(人倫)을 바로잡으면, 필히 주공(周公)이나 소공(召公)에게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年至二十有一 見同舘友生之亡 知世無常 觀身虚幻 誓出二種生死

나이 스물한 살에 이르렀을 때 같은 성균관 벗 유생의 죽음을 보고, 세상의 무상함을 알고, 몸은 허망한 환상임을 보았다. 두 가지 나고 죽는 일에서 벗어날 것을 서원하고,

 

志求一乘涅槃 𢎪道以報四恩 育德以資三有 即求出家 未凝其志

성불(成佛)할 수 있는 오직 하나의 길[一乘]에서 열반(涅槃)의 경지를 구(求)하겠다는 뜻을 세우고, 도를 널리 펴서 사은(四恩)에 보답하고, 덕(德)을 길러(育) 삼유(三有)에 도움이 되고자[以資] 바로 출가(出家)하려 하였으나 아직 그 뜻을 굳히지 못했다.

 

皇皇反側 無日不心乎山水間 手携韋𦀇 趑趄岐路

갈팡질팡 마음이 초조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고 고민하면서 날마다 산수(山水) 사이에 마음을 두지 않은 적 없었으며, 손에는 주역(周易)을 들고 갈림길에서 주저하였다.(趑趄)

 

邂逅一釋 栖栖獨行 割愛親戚 徐行杖後

정처 없이 홀로 떠돌아다니는 한 스님을 만나서 가족과 친척에 대한 정(情)을 끊고 천천히 지팡이(스님의) 뒤를 따라갔다.

 

到冠岳山義湘菴 其僧 與一𦒳山人名覺寳者 同心薙髮

관악산 의상암(義湘菴)에 이르러, 그 스님과 각보(覺寶)라는 이름의 한 노승[一𦒳山人]이 한마음으로 머리를 깎아 주었다.

 

越明年丁丑早春 到檜岩寺 初參王師無學妙嚴𡬭者 親聞法要 扵是 辞退本師 遊歷諸山 戰戰勤修

이듬해 정축년(1397. 태조 6) 이른 봄에 회암사(檜岩寺)에 이르러 왕사(王師) 무학(無學) 묘엄존자(妙嚴尊者)를 처음으로 참알(參謁)하고 몸소 법요(法要)를 들었다. 이에 본사(本師, 무학묘엄존자)에게 작별을 고하고 물러 나와, 여러 산을 두루 돌아다니며 쉼 없이 부지런히 수련(修練)하였다.

 

又甲申仲春 再到檜岩 獨居一室 杜絶視聽 動靜食息 無少滅裂

또 갑신년(1404. 태종 4) 중춘(仲春)에 다시 회암사에 이르러, 홀로 한 방(房)에 들어앉아 보고 듣는 것을 막아 단절하니, 움직일 때나 고요할 때나 먹을 때나 쉴 때나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因調睡魔 永夜𦀇行次 不覺口自詠曰 行行忽廻首 山骨立雲中

인하여 견딜 수 없이 쏟아지는 졸음[睡魔]을 길들이며, 밤을 새워 불도(佛道)를 닦던 차에, 자신도 모르게 입으로 저절로 읊조리며 말하길, ‘걷고 또 걸으며 문득 머리 돌리니, 바위는 구름 속에 서 있네.’라고 하였다.

 

又一日 入厠還出 放下洗桶云 唯此一事實 餘二則非真 此言 豈徒然㢤

또 하루는 뒷간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와서, 세통[허드레 물통]을 내려놓으며 말하기를, ‘오직 이 한 가지 일만이 참될[實] 뿐이오, 나머지 다른 법은 참된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는데, 이 말이 어찌 괜히 그냥 나온 말이겠습니까?

 

丙戌夏 歸于功德山大乘寺 是年為始 至扵己丑 四𡻕之間 三設般若講席

병술년(1406. 태종 6) 여름 공덕산(功德山) 대승사(大乘寺)로 돌아갔다. 이해를 시작으로 기축년(1409. 태종 9)까지 4년 사이에 반야경(般若經)을 설법(說法)하는 자리를 세 번 열었다.

 

庚寅夏 到天磨山觀音崛 大振覺𣗳玄風 普使有緣皆化

경인년(1410년. 태종 10) 여름 천마산(天磨山) 관음굴(觀音窟)에 이르러, 보리수 나무의 깊고 그윽한 풍취(風趣)를 크게 떨쳐 널리 인연 있는 이들이 모두 교화되게 하였다. 綠이 아니고

 

辛卯仲秋 到佛禧寺 結制三年 重新院宇 集諸丹樾 𢎪揚祖風

신묘년(1411. 태종 11) 중추(仲秋) 불희사(佛禧寺)에 이르러, 3년간 하안거(夏安居) 동안거(冬安居)[結制]를 하면서, 사우(寺宇)를 重修하고 모든 단월(檀越 : 시주자)들을 모아 조사(祖師)의 가르침[風]을 널리 알렸다.

 

甲午春三月 到慈母山烟峰寺 占一小室 名涵虚堂 勤修三載 曽無少息

갑오년(1414년, 태종 14) 봄 3월에 자모산(慈母山) 연봉사(烟峰寺)에 이르러 작은 방 하나를 차지하고, 함허당(涵虚堂)이라고 이름하고 3년 동안 부지런히 도를 닦으면서 일찍이 조금도 쉰[멈춘] 적이 없었다.

 

又自丁酉 至戊戌 一冬兩夏 五家講席 三設是寺

또 정유년(1417. 태종 17)부터 무술년(1418. 태종 18)까지 한 번의 겨울과 두 번의 여름을 나면서 ‘반야오가설의(般若五家說誼)’을 설법하는 자리[講席]를 이 절에서 세 번 열었다.

 

自是以後 不約繋境長修 而乃任心自運 逍遥乎山川之阿 放曠乎人間之世 𢦙出𢦙䖏 何有局扵方隅 固請固留 咸謂𥝠我知識 話行湖海 望重人心

 

이(此) 이후부터(自) 한 곳에 묶여(머물며) 오래 수행하는 것을 기약하지 않았다. 바로 마음 가는 대로 스스로 움직였는데, 산천의 언덕을 소요(逍遙)하면서 인간 세상에서 말과 행동에 거리낌이 없었다. 혹은 나아가고 혹은 은거함에 어찌 한 곳에 국한됨이 있겠는가. 굳이 청하면 굳이 머무르니, 모두 나의 지식을 일러 언행이 넓은 호수나 바다와 같다고 하여, 신망이 사람들의 마음에 두터웠다. 𥝠我를 1인칭으로 볼 수도 있네요.

 

故因人請 庚子秋季 入于江陵五䑓山 誠偹香羞 供養五䑓諸聖 詣𩂳鑑菴 薦羞懶翁真影

까닭으로 다른 사람의 요청으로, 경자년(1420. 세종 2) 가을에 강릉(江陵) 오대산(五臺山)에 들어가서, 정성을 다해 향과 제수(음식)를 갖추어 오대산의 여러 성인(聖人)에게 공양(供養)하고 영감암(靈鑑菴)에 가서 나옹선사(懶翁禪師. 1320~1376) 화상(畫像)에 제수(祭需)를 올렸다.

 

信宿其菴 夜夢 有一神僧 從容謂師曰卿名己和 厥號得通 師拜手祇受 翛然夢覺 身氣淸𠁊 若登大淸

그 암자[靈鑑菴]에서 이틀 동안 묵었는데, 밤에 꿈을 꾸니 한 신승(神僧)이 조용히 대사(大師)에게 이르기를 “경(卿)의 이름은 기화(己和)이고, 그[厥] 호[號]는 득통(得通)이다.”라고 하니, 대사(大師)는 두 손 모아 절하여 (號를) 받고, 천천히(휙, 갑자기, 문득) 꿈에서 깨어나니 몸과 기[身氣]가 맑고 상쾌하여 맑은 하늘로 오르는 것 같았다. 翛 : 빠를유(빠르게 나는 모양)

 

翼日 下月精寺 放杖脫鞋 宴䖏一室 以終平生 長養道胎 飢飡渴飮 消遣日月

다음날 월정사(月精寺)로 내려가서 지팡이는 내려놓고 신발 벗고, 한 방을 잠잘 곳으로 정하고는 평생을 마치려 했다. 도(道)의 근원(根源)을 키우면서[養成] 배고프면 먹고 목마르면 마시며 세월을 보냈다.

 

扵是 囊錐已露 括難禁止 道德昭着 播扵遐邇

이 시점에, 주머니 속의 송곳은 이미 드러나면, 묶어서 나오지 못하게[禁止] 하기 어려운 것처럼, (대사의) 도(道)와 덕(德)이 밝게 드러나서[着] 멀고 가까운 곳에 (널리) 퍼져 있었다.

 

惟我 聖上 逺紹羲軒 近同文景 敬敷五敎 重述九疇 㤙霑荇葦 施洽虫魚 德盖前王 聲高徃帝 而復存心三寶 留意福田 是以 聞師道風 美其令聞

 

아 우리 성상(聖上 / 세종)께서 멀리는 복희(伏羲)씨와 헌원(軒轅)씨를 잇고, 가까이는 한나라 문제(文帝)와 경제(景帝)와 같이하여, 삼가 다섯 가지 가르침[五倫]을 널리 펴서 다시 천하를 다스리는 아홉 가지 대법[九疇]을 지으셨다. 은혜는 마름과 갈대[荇葦]까지 적셨고, 베푸신 혜택은, 벌레와 물고기도 흡족해하니, 덕(德)은 전왕(前王)을 덮었고, 명성은 옛날의 황제(皇帝)보다 높고. 다시 삼보(三寶)를 마음에 두고 복전(福田)을 마음에 담았다. 이런 까닭으로 대사(大師)의 도풍(道風)을 듣고, 그 아름다운 명성(名聲)을 칭송하였다.

 

𨐌丒秋初 命住大慈御刹 為薦 先妣大妃殿下 大設 𩂳山勝席 宗室諸王 駙馬諸君 承命奉香 濟濟親臨

신축년(1421. 세종 3) 초가을 어찰(御刹) 대자사(大慈寺)에 머물 것을 명(命)하고, 승하(昇遐)하신 어머니[元敬王后] 대비전하(大妃殿下)를 천도(薦度)하기 위하여, 영산회상(靈山會相) 설법(說法)의 훌륭한 자리를 크게 열어, 종실(宗室)의 모든 왕(王)과 부마(駙馬)와 모든 군(君)에게 명(命)을 받들어 봉향(奉香)하게 하고, 엄숙하고 장엄(莊嚴)하게 임금께서 친히 임(臨)하셨다.

 

請師說法 師强謝不已 高升法座 肇開法要 其聲淸亮 理致玄奧 自然成律 風行水文 逺近見聞 無不悅服

대사(大師)께 설법(說法)을 청(請)하자, 대사(大師)는 강하게 사양해 마지않았으나, 높은 법좌(法座)에 올라 법요(法要)를 처음 열자, 그 소리는 청량(淸亮)하고 이치(理致)는 깊고 그윽하니, 저절로 운율(韻律)을 이루어 바람이 불자 물결이 흐르듯 하니, 먼 곳이나 가까운 곳에서 보고 듣는 사람들이 기뻐하며 복종[悅服]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兩宗五敎諸山衲子 蒼蒼濟濟 𢘤皆罔措

양종(兩宗) 오교(五敎)의 여러 사찰의 승려들이 푸른 빛이 엄숙하고 장엄하였으며, 모두 다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自尒仍閱四載 甲辰秋 上書辭退 游吉祥功德雲岳諸山 随錄(緣?)度日 忽思張皇三學 大闡一乘 普令七衆 咸到如來正斍之域 挽回真風 扶𣗳末運 於辛亥秋 皈于嶺南曦陽山鳳岩寺 重葺頹落

그로부터 거듭(이어서) 4년을 지내다가[閱] 갑진년(1424년, 세종 6) 가을 글을 올리고 물러나서 길상산(吉祥山)  공덕산(功德山)  운악산(雲岳山) 등 여러 산을 돌아다니며, 인연에 따라 날을 보내다가, 문득 장황(張皇)한 삼학(三學)을 생각하고 석가모니의 교법[一乘]을 크게 천명(闡明)하여 널리 칠중(七衆)으로 하여금 모두 여래(如來)의 올바른 깨달음의 영역[如來正斍之域]에 도달하게 하여, 참된 교화(敎化)의 바람을 바로잡아 회복하여 바로 세우는 것이[扶𣗳] 말년의 운명(運命)이었다. 신해년(1431, 세종 13) 가을에 영남(嶺南) 희양산(曦陽山) 봉암사(鳳岩寺)로 돌아와, 낡고 허물어진 것을 여러 번 중수(重修)하였다. 錄(緣?) : 원문 확인요

 

修营已畢 師更以妙淨宿知 靜観時態 時方末葉 去聖愈逺 機敎陵夷 法不可𢎪 𨘣𠬧前日之所期 未遂素懷之三事

 

건물 수리(修理)가 다 끝나고, 대사(大師)는 다시 숙명을 꿰뚫어 보는 묘하고 맑은 평소의 지혜로 조용히 당시의 세태를 관찰하니, 때는 바야흐로 말엽(末葉)의 시대로 성인(聖人)의 시대와 거리가 더욱 멀어져, 기교상응(機敎相應)이 세월이 지나면 쇠퇴하여 법을 넓일 수 없었다. 다시 전날 기약한 것을 거두어들이니 평소 품었던 세 가지 일을 이루지 못하였다.

 

宣德八年癸丒三月二十五日 故託微恙 身心不豫 至四月一日 申時初刻 卓然靜坐曰

선덕(宣德) 8년 계축년(1433. 세종 15) 3월 25일 대단하지 않은 병이라 여겨 의탁한 까닭에 몸과 마음이 병(病)들어 4월 1일 신시(申時/오후3~5시) 초각(初刻/15분)에 이르러 의젓하게 조용히 앉아서 말씀하시길,

 

湛然空寂 고요하게 텅 비고 적막하여,

本無一物 본래 한 가지 물건도 없는 것인데,

𩂳光赫赫 신령스럽고 성스러운 빛 밝고 밝아,

洞澈十方 온 세상에 뚜렷하네.

 

更無身心 다시는 몸과 마음이,

受彼生死 태어나고 죽음을 받을 일 없으니,

去來徃復 오고 감에,

也無罣礙 걸릴 것이 없구나.

 

少選又曰 잠시 뒤 또 말씀하시길,

 

臨行擧目 떠나기 앞서 눈을 드니,

十方碧落 온 세상이 푸른 하늘이고,

無中有路 없는 가운데 길이 있으니.

西方極樂 서방 극락이구나.

 

 

此乃㝡後永訣也 語聲才𥁞 蕭然而逝 留寺五日 顔色如常 曽無少異

이것이 바로 가장 마지막[㝡後]으로 영원히 이별[永訣]하며 한 말이었다. 말소리가 겨우[才] 끝나자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5일간 절[寺]에 모셨는데도 안색(顔色)은 평상시와 같았으며 이전[曽]과 조금도 다른 것이 없었다.

 

茶毗已訖 拾取齒骨 香水洗之 黏骸設利羅 𧹘然光潤

다비가 끝난 뒤에 이(齒)와 뼈를 주워 모아 향수로 씻자, 뼈에 붙은 사리(舍利)가 찬란히 찬란하게 빛났다.

 

當是時也 異香滿洞 行者皆聞 拜手低頭 罔不敬信者矣

바로 이런 때에 기이한 향기가 골짜기에 가득하여, 길 가는 이들이 모두 향내를 맡고 손 모아 머리 숙여 절하면서 공경하여 믿지 않는 이가 없었다.

 

【孝寕大君閣下 親啔宸聰 命諸徒弟 𣗳浮屠扵四䖏 不日之間 七衆子来 造𥐖室以安厝 設嘉會以展礼

효령대군(孝寕大君)이 몸소 임금님께 아뢰고, 여러 제자에게 명하여 네 곳에 부도를 세우게 하자, 며칠 사이에 칠중(七衆)이 자식처럼 모여들어 석실(石室)을 짓고 안치하였으며, 성대한 법회[嘉會]를 열어 예를 행하였다.】

 

人之皈附 受道佩戒者 雲屯輻輳 尤於前日 掘𢫾成胝 不可勝數 所謂現壽量以存存 示生滅而化化者矣

사람들이 귀의하여 따르며, 도(道)를 배우고 계(戒)를 받으려는 자(者)들이 수레바퀴 통에 바큇살이 모이듯, 구름처럼 모여드는 것이 예전보다 더 많았는데, 손가락을 꼽다가 굳은살이 되어도 다 헤아릴 수 없었다. 이른바 이승의 수명(壽命)을 잘 보존하여, 태어났다가 사라짐은 변화하는 것을 변화하게 하는 것[化化者]임을 보여주었다.

 

師壽 五十八 法𦡳三十八

대사(大師) 나이 58세로, 법랍(法𦡳) 38세이다.

 

先師平生所著𦀇論註䟽詩賦篇章 固不為不多矣 然 散在諸䖏 未能盡求

선사(先師)께서 평생 저작(著作)한 경론(𦀇論)의 주석[註解/註疏]과 시(詩)와 부(賦)의 서적이 진실로[固] 많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그러나 여러 곳에 흩어져 있어 아직 다 찾지(求) 못하였다.

 

但以手書圓覺䟽三卷 般若五家説誼一卷 顯正論一卷 般若懴文二帙 綸貫一卷 對𩂳小叅下語䒭 校正之 書之數本 留鎮願刹 示之扵後

 

단지 손수 저술(著述)한 『원각소(圓覺疏)』3권ㆍ『반야오가설의(般若五家説誼)』1권ㆍ『현정론(顯正論)』1권ㆍ『반야참문(般若懺文)』2질ㆍ『윤관(綸貫)』1권. 『영가(靈駕)를 대(對)하는 소참(小參) 하어(下語)』등을 교정하고, 책 몇 본[數本]이 원찰(願刹)에 남아 있어 후세에 보여 줄 뿐이다.

 

然 先師德行 固已偉矣 實非弱辞草語 所能稱述

그러나 선사의 덕행은 진실로 이미 위대하다. 사실 변변치 못한 거친 말(글재주)로 자세하게 기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然 余强為記之 𡸁扵後世者 所以崇孝故也 是孝子孝孫之至誠也

그런데도 내가 억지로 이것을 기록하여 후세에 남기는 것은, 효(孝)를 높이는 까닭이다. 이것이 효자  효손의 지극한 정성(至誠)이다. 그러나 내가 억지로 이를 적어 뒷시대에 남기는 것은 효를 높이기 때문이니, 이는 효자·효손들의 지극한 정성이다.

 

又况職在秉筆 何敢固讓

또한 하물며 직책이 붓을 잡는 자리에 있으니 어찌 감히 굳이 사양하겠는가? 

 

肆不獲己(已) 粗記始末 以傳不朽云爾 記行之言 雖已窮 而慕師之意 實難𥁞叙故 係之以詩一首 露之以情悰

부득이한 나머지(마지못한 나머지) 거칠게나마 시말을 기술하여 후세에 전하여 영원히 없어지지 않게 할 뿐이다. 행장을 적는 말은 비록 이미 다 하였지만, 대사를 경모하는 마음은 진실로 다 서술하기가 어렵다. 까닭으로 시 한 수를 붙여서 마음[情悰]을 드러내고자 한다. ※ 己(已) 원문 확인요

 

法乳㤙深天廣大

법유(法乳)의 은혜 깊고 하늘처럼 넓고 큰데,

 

哀㢤無力報先師

슬프도다! 선사(先師)께 보답할 힘 없네.

 

毛錐記德真兒戯

붓으로 덕(德)을 기록함은 진정 애들 장난이고,

 

萬世人人口是碑

만세토록 사람들의 입이 올바른 비석(碑石)이라네.

 

正統五年庚申 七月 日 門人 文秀書

정통 5년 경신년(1440, 세종 22) 7월 일에 문하생 문수 씀.

 

留板曦陽山鳳岩寺

희양산 봉암사에 판각(板刻)하여 두었다.

 

募緣門人 學眉 達明 智生 海修 道然 允悟 元澄

시주 권유자 문하생 : 학미, 달명, 지생, 해수, 도연, 윤오, 원징

 

助揚 前 敎官 全汝弼, 安人 崔氏 正貞, 前 永春 崔敬孫, 前 注簿 李地保,

禹氏, 前 護軍 李人保, 前 護軍 劉宏, 劉陽漢, 金拔, 五敦, 崔德, 信戒,

性加伊.

선양(宣揚) : 전 교관 전여필, 안인 최씨 정정, 전 영춘 최경손, 전 주부

이지보, 우씨, 전 호군 이인보, 전 호군 유굉, 유양한, 김발, 오돈,

최덕, 신계, 성가이.

 

刻手 正心, 信空, 頓修.

각수 : 정심, 신공, 돈수.

 

≪해석 참조 –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 고전번역원 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