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崇祖惇宗/청권사

歧陽書院刱建事蹟과 臨湖靑巖兩書院回文

도솔산인 2024. 3. 28. 18:41

歧陽書院刱建事蹟과 臨湖靑巖兩書院回文

 

 

 

歧陽書院刱建事蹟(기양서원창건사적)

 

正廟1)丙寅士論齊發 以謂靖孝公李先生 以王室懿親 托跡禪家2) 放浪山水 取諸文身適越之義 則吾夫子所謂身中淸(결자)中權3)者 又況先生文雅之質 孝悌之行 好學不倦 儉約自持 處高而厭華 有至德而晦 列聖朝褒揚4)之典 極其曠絶5) 而終無士林尊奉之所 慨然之甚 今者祀孫移寓他鄕 廟宇巋然 以前日主鬯之廟 爲今日俎豆之所 義理當然云

 

정묘(正廟:정조→純廟:순조) 병인년(1806)에 사림의 의론이 일제히 일어나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정효공(靖孝公) 이선생(李先生)은 왕실의 지친(至親)으로서 불가에 자취를 의탁하여 산수를 방랑하며, 옛날 주나라 태왕(太王)의 아들 중옹(仲雍:虞仲)이 머리카락을 자르고 몸에 문신을 새기고서 남쪽 월()나라로 떠난 의리를 취하셨으니, 우리 공자께서 그를 평하여 처신은 청렴(淸廉)에 맞았고, 왕위를 버린 것은 권도에 맞았다.’라고 하신 것이다. 그런데 하물며 선생은 법도 있고 단아한 자질과 효성스럽고 공경스러운 행실로 학문을 좋아하여 게을리하지 않고 검소와 절약으로 자신을 유지하셨으며, 높은 신분에 있었으나 화려함을 싫어하시고 지극한 덕을 지녔으나 자취를 감추셨다. 열성조에서 포상하고 현양하는 법전은 다시 없을 만큼 극진하였으나, 사림에서 존숭하고 우러르는 서원은 끝내 없어서 매우 안타까웠다. 지금 봉사손이 타향으로 이사하여 사당만 우뚝하게 남아 있다. 예전에 왕손에게 제사 지내던 사당을 오늘날 향사를 지내는 서원으로 만드는 것은 의리상 당연하다.”

 

1) 正廟純廟의 오류인 듯함. 병인년은 순조 6(1806).

2) 선가(禪家) : 참선(參禪)하는 승려[]가 거처하는 곳. 곧 불가(佛家)를 말함.[한국고전용어사전]

3) 身中淸中權 : 몸은 깨끗함에 맞았고 벼슬하지 않음은 권도에 맞았다.[論語 微子 8]. 필사본에 缺字

4) 포양(褒揚) : 칭찬(稱讚)하여 장려(奬勵). (淸權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리고, 대군 묘제의 치제문과 사당 편액을 하사함.)

5) 광절(曠絶) : ‘비우고 끊어지다.’라는 의미로 아주 드물다.’ ‘다시 없다.’

6) 주창(主鬯) : [역사] 예전에, 종묘에서 제사를 지낼 때 울창주(鬱鬯酒)를 올렸다고 하여 황태자(皇太子)’를 달리 이르던 말.

 

 

臨湖靑巖兩書院回文(임호청암서원회문)

 

伏以 靖孝公李先生伯仲 即周泰伯1)虞仲2) 泰伯之廟 建於姑蘇 虞仲之祠 立於晉陵我咸寜旣是妥靈之地3) 則無異於泰伯之姑蘇 虞仲之晉陵 伏見丙辰筵敎 炳然如昨 則不可捨此而就他所者 明矣 況先生道德之卓爾 文章之嵬越 載在國史 士林崇奉 自是次第事 伏惟僉尊 鄭重敦事 使先生孤節 炳然不泯 斯文4)之幸

 

삼가 생각건대, 정효공(靖孝公) 이선생(李先生) 백씨(伯氏:讓寧大君)와 중씨(仲氏:孝寧大君)는 곧 옛날 주나라 태백(泰伯우중(虞仲)과 같습니다. 태백의 사당은 고소(姑蘇:강소성 소주 姑蘇山)에 있고, 우중의 사당은 진릉(晉陵:강소성 常州)에 있습니다. 함녕(咸寧:경북 함창)은 이분들의 사당이 있는 곳이니, 태백의 사당이 고소에 있고 우중의 사당이 진릉에 있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삼가 살펴보건대, 병진년(1736, 영조 12)5) 임금께서 경연에서 하교하신 말씀이 어제의 일처럼 명확하니, 이곳을 버리고 다른 곳에 설립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더구나 선생은 도덕이 탁월하고 문장이 빼어나서 국사에 실려있으니, 사림이 숭봉(崇奉)하는 것은 절로 시급히 해야 할 일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여러분들께서 신중하게 일을 추진해서 선생의 고고한 지절(志節)로 하여금 사라지지 않고 찬란히 빛나게 하면 사문의 다행일 것입니다.

 

三年戊辰日 舊祠宇 享孝寧讓寧兩先生 祠號曰歧陽

 

3년 뒤 무진년(1808) 모일 옛 사당에서 효령대군과 양녕대군 두 선생에게 향사를 지냈다. 사당은 기양사(歧陽祠:현 상주시 공검면 율곡리)라고 하였다.

 

1) 태백(泰伯) : () 나라 태왕(太王)의 장자(長子). 태왕이 그의 아우 계력(季歷)의 아들인 문왕(文王)에게 성덕(聖德)이 있음을 알고는 왕위를 계력에게 전하려 하자, 왕위를 아우 계력에게 양보하고서 형월(荊越)지방으로 피하여 은둔하였음.

2) 중옹(仲雍) : 우중(虞仲)이라고도 한다. ()나라 때 사람. ()나라 고공단보(古公亶父, 太王)의 둘째 아들이다. 고공단보가 막내 계력(季歷)에게 전위(傳位)할 의사가 있음을 알고, 형 태백(泰伯)과 함께 자리를 양보하고 남쪽 형만(荊蠻)으로 피해 달아났다. 그곳의 풍속에 따라 머리를 깎고 문신한 뒤 오()나라를 세웠다. 태백이 죽자 자리를 이었다. 일설에는 우중은 춘추 시대 우()나라에서 처음 봉해진 군주라고도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중옹 [仲雍] (중국역대인명사전, 2010. 1. 20., 임종욱, 김해명)

3) 타령지지(妥靈之地) : 혼령(신주)을 모시는 땅. 타령(妥靈) : 신주(神主)를 사당에 봉안(奉安)하고 제사를 받듦.

4) 사(斯文) : 유교(儒敎)에서 유교의 도의나 문화를 일컫는 말. 1. 이 학문(學問), 이 도()’라는 뜻으로, 유학(儒學)의 도의(道義)나 문화(文化)를 이르는 말. 2. ‘유학자(儒學者)’를 높여 이르는 말.

5) 병진년(1736, 영조 12) : 영조 12(1736) 어명을 내려 경기 감영에서 효령대군 사당을 지었다.[출처] 청권사(효령대군 이보 사당과 묘역)

 

참고

1877(고종 14)에 함창현(咸昌縣)의 향교와 관련된 기록들을 모은 책으로 원제목은 횡당기사(黌堂記事) 내용에 포함된 사적입니다. 신황(申榥)이 쓴 횡당기사(書黌堂記事) ()에 의하면 원래는 1592(선조 25)에서 1758(영조 34)까지 153년간의 기록을 엮은 1책이 있었는데이후의 기록을 보완하여 본서를 엮었다고 하였으며, 기양서원 사적을 1877(고종 14)에 증보한 분은 알 수 없습니다. 증보한 분이 지난번 222일 말씀드린 1749년대에 사셨던 분으로 호가 청안(淸安), 이시욱(李時郁)이란 분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해서 문의 드렸었는데 확인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위 내용은 청권집유(이돈영, 1929)에도 실려있으나 일부 내용이 증보되었다. [청권사 이정식 문화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