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산행기록

동상의몽 산행 「유두류록」의 아홉모랭이길

도솔산인 2024. 7. 14. 21:50

동상의몽 산행 「유두류록」의 아홉모랭이길

 

 

▣ 일 시 : 2024년 07월 13(토)

▣ 코 스 : 송대-은병암-고열암-일강-미타봉-주막터-방장문-청이당-어름터-광점동

▣ 인 원 : 5명

▣ 날 씨 : 흐림

 

 

  옛 문헌을 상고하여 현재의 지명을 고증하는 일은 시행착오의 연속이다. 독녀성도 그렇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고 시간에 따라 생각도 바뀐다. 김종직의 유두류록에 나오는 구롱(九隴)을 아홉모롱이(처럼 구불구불한 언덕)길로 이해하는데 10년이 넘게 걸렸다. 이런 문제를 가지고 대화할 사람도 없다.

 

  최근 천왕봉 孤竹墨熙撰 花山權倫書석각의 권륜(權倫)이라는 인물을 찾기 위해 산청석각명문총람을 저술하신 권유현 선생님께 연락을 드렸다. 선생님께서 독녀암과 독녀성에 대한 의견을 정리하여 보내주셨다. 산음 관아에서 노장대(독녀암)가 보인다는 의견도 주셨다. 어외산성은 옛 산음현 관아의 북쪽인데, 경상대학교 박물관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어외산성을 독녀성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과 방향이 전혀 다르고, 관포(灌圃) 어득강(魚得江, 1470~1550)의 독녀심선(獨女尋仙) 시와도 부합(符合)하지 않는다.

 

 

현 산청군청에서 어외산성 방향은 北西方이다.

 

자료제공 : 장대영님

 

 

 

  다음은 권유현 선생님께서 보내주신 자료이다.

 

  獨女尋仙 독녀암에서 신선을 찾다.

 

  烏石岡西有石城址 俗稱獨女岩 古有獨女 鍊道冲空[오석강 서쪽에 돌로 쌓은 성터가 있는데 속칭 독녀암이라 한다. 옛적 한 여자가 도를 닦아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三峯森戟削 세 봉우리 창을 모아 세운 듯 뾰족한데

  獨女露城稜 독녀암이 성곽 모서리에 드러났네.

  日日樓中望 날마다 누각에 올라 바라보나니

  躋攀記我曾 오른다면 이전의 나를 기억하리라.

 

  오석강烏石岡오석촌烏石村 뒤쪽의 산등성이로 풀이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앞서 오석촌의 위치를 현 금서면의 매촌리와 향양리를 잇는 일대로 추정한 바 있다. 이에 대해서는 후술한다.

 

  그런데 이 시에서 읊은 독녀암은 어디에 있는 어느 것을 가리키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 두 가지 견해가 있는 듯하다. 하나는 산음현 내에 있었던 독녀성獨女城이고 다른 하나는 이른바 함양 독바위라 불리는 노장대老將臺이다.

 

  먼저 산음현 내에 있었던 독녀성獨女城을 살펴보기로 한다. 현재도 그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어 확인할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다음과 같은 기술이 보인다.

 

  獨女城

  在縣西二十七里石築周一千七百三十尺有溪泉今皆頹圮[현 서쪽 27 리에 있다. 석축으로 되어 있으며 둘레가 1,730척이고, 시내와 샘이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무너졌다.]

 

 

  이 기록은 1530년에 이뤄진 것으로 보는데, 당시 현의 읍치邑治는 현 산청읍이었다. 따라서 산청읍에서 서쪽 27리 지점이라 했는데, 관아가 있었던 현 산청군청 일대에서 서북쪽 방향으로 생초가 있다.

 

  경상대학교박물관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현재 생초의 ‘어외산성於外山城’으로 불리는 성터가 바로 위에 기술한 독녀성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 근거로서 첫째, 산청군청에서 이 산성까지 직선거리가 11.2km 로 여지승람에 기록된 27 리에 가깝고 둘째, 성의 둘레 1,730척은 조선 전기에 표준으로 사용한 포백척[布帛尺, 1= 46.7cm]으로 계산하면 795m로 현재 산성의 둘레와 거의 일치한다는 점을 들고 있다. 샘터는 지금까지 뚜렷한 흔적이 남아 있는 집수지集水地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만 시내의 흔적은 찾기 어렵다. 혹 집수지에서 흘러내리는 작은 물줄기를 가리킨 것이 아닐까?

 

  어쨌거나 이러한 기록과 남아 있는 유적을 근거로 관포가 읊은 독녀암은 이곳 독녀성, 곧 현재의 어외산성於外山城에 있다고 결론짓는 이들이 있다. 특히 석성石城이 있다는 표현과 독녀獨女라는 낱말에 이끌린 듯하다. 그런데 관포의 시를 찬찬히 음미하며 이 어외산성, 곧 독녀성과 맞추어 보면 서로 맞지 않는 점이 여러 가지다.

 

  첫째, 관포는 오석강烏石岡의 서쪽에 독녀암이 있다고 하였다. 오석강이 어디를 가리키는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오석촌烏石村, 오석리烏石里, 오계烏溪와 무관치 않을 것으로 본다면 생초의 독녀성은 방향과 거리 면에서 독녀암과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된다. 오석리는 앞에서 서술한 대로 현 금서면 평촌리, 향양리 일대로 추정한 바 있다. 그렇다면 오석강은 평촌, 향양, 수철 등 마을이 있는 방향이어야 하므로 생초에 있는 독녀성과는 전혀 맞지 않는다.

 

  둘째, 독녀성에는 독녀암이라 할 바위가 없다. 이 성은 산정 일대를 둘러싼 테뫼식 석성石城일 뿐이고 세 봉우리가 창을 모아 세운 듯한 뾰족한 바위가 없다. 성곽 모서리 어디에서도 시에 묘사한 그런 바위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셋째, 이 독녀성이 있는 일대는 옛 관아가 있었던 산청읍 어떤 지점에서건 보이지 않는다. 관포가 매일 바라보았다고 했는데 보이지 않는 곳을 어떻게 날마다 바라볼 수 있겠는가?

 

  넷째, 이 독녀성에는 부기附記한 사항 어떤 부인이 도를 닦아 하늘로 올라갔다는 등의 전설이나 기록이 전혀 없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관포가 시로 읊은 독녀암은 생초의 어외산성, 곧 독녀성으로 추정하는 과는 어떠한 관계도 지을 수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또 달리 관포가 읊은 독녀암이라 주장하는 바위는 산청의 경계 너머 함양 땅에 있다. 현 함양군 휴천면 운서리에 속한 산지에 있는 함양 독바위라 불리는 암괴군이다. 현지에서는 노장대老將臺라 부른다. 이 바위에 대해서는 점필재 김종직의 遊頭流錄독녀암獨女巖이라는 명칭으로 자세한 기록이 보인다.

 

  … 신열암新涅庵에 들렀는데 승려는 없었다. 이 암자 또한 우뚝한 절벽을 등지고 있었다. 암자 동북쪽에 바위가 있는데 독녀암獨女巖이라 하였다. 다섯 바위가 떨어져 서 있고 높이가 모두 1천여 자나 되었다. 범종이 말하기를 전하는 말에, 한 부인이 이 바위 사이에 돌을 쌓아 거처를 만들고 그 안에서 혼자 살며 도를 닦아 허공으로 날아올랐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바위를 독녀암이라 부르게 되었답니다.”라고 하였다. 돌을 쌓아 놓은 것이 여태 남아 있었다. 이 바위 중간에 잣나무가 나 있었다. 위로 올라가려는 자는 나무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이 나무를 잡고서 바위틈을 돌고 돌아 등과 배가 모두 긁힌 뒤에야 정상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나 목숨을 내걸 수 있는 자가 아니면 오를 수 없다. 따라온 아전 옥곤玉崑과 용산聳山이 올라가 엉거주춤 서서 손을 흔들었다. 내 일찍이 산음을 오가며 이 바위를 바라보았는데, 여러 봉우리와 함께 우뚝 솟아서 하늘을 떠받치는 기둥처럼 보였었다. 지금 몸소 이곳에 오르니, 머리털이 쭈뼛하고 등골이 오싹하며 정신이 아득하여 내가 아닌 듯하였다.

 

  관포가 읊은 시에 나오는 독녀암과 여기 점필재의 기록에 나오는 독녀암 내용과 서로 합치되는 점을 고찰해 보기로 한다.

 

  첫째, 관포가 부기附記옛적 한 여자가 도를 닦아 하늘로 솟아올랐다는 기록은 위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글을 인용한 것인 듯하다. 점필재가 독녀암을 찾은 시기는 1472814일이다. 관포가 산음현감으로 재직시절 시를 썼다고 보면 1502년에서 1508년 사이의 어느 해가 된다. 점필재의 기록 후 대략 30여년 뒤에 이 시를 쓴 셈이다. 관포는 가까운 함양에서 현감으로 있다가 지리산을 등정한 점필재의 遊頭流錄을 읽고 느낌을 얻어 누각에 오를 때마다 독녀암을 바라보며 내용을 상기하였고, 자신의 시에 반영한 것이 아닐까?

 

  둘째, 관포는 석성石城이 있다고 했는데 독녀암 주위에는 석성이 없다. 그런데 점필재의 기록에 도를 닦은 부인이 돌로 쌓은 것이 여태 남아 있었다는 구절이 있는데 이것을 관포는 석성으로 표현한 것이 아닐까 한다. 지금까지도 석축 일부는 남아 있다.

 

  셋째, 관포가 누각에 올라 매일 바라본다는 표현에서 산청 관아에 있던 누각에서 독녀암이 보인다는 이야기인데, 실제 상황과 맞는 표현이다. 산청 공원, 이전에 회계산會稽山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리라 보는 곳에서 독녀암은 뚜렷이 보인다. 다만 거리가 멀기에 작게 보일 뿐이다. 지금보다 공기가 훨씬 깨끗했을 당시라면 독녀암은 더욱 뚜렷이 보였음직하다.

 

  넷째 오석강烏石岡 서쪽이라는 방향을 생각해 본다. 오석리를 오계烏溪가 흘러내리는 현 금서면 평촌리와 향양리 일대를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면 오석강은 오석리 가까이 있을 것이다. 은 산등성이, 능선을 뜻하는 것이다.

 

  매일 바라보는 독녀암이 오석강 서쪽이라 했으니 그 위치가 뚜렷이 드러난다. 바로 왕산 아래 쌍재에서 고동재를 잇는 능선이다. 그 능선 너머로 독녀암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함양 독바위’, ‘노장대’, ‘독녀암을 관포가 읊은 대상으로 보는 견해에 대해 산음 땅도 아닌 곳의 바위군을 읊었을 리가 없다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시의 내용과 함양독바위(노장대)의 기록이 일치하는 점, 관아가 있는 곳에서 보인다는 점을 고려하면, 관포가 충분히 읊을 수 있는 소재라고 생각된다.

 

  끝으로 독녀암과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독녀성이 같은 곳을 지칭한다는 의견이 있다. 점필재나 관포가 읊은 독녀암은 산청 읍치(邑治)에서 상당한 거리로 멀리 떨어져 있다. 27리라는 표현과 전혀 맞지 않는다. 반면에 독녀성(생초 어외산성)은 읍치에서 가까워 ‘27라는 표현에 거의 들이 맞는다. 또 독녀성의 규모가 1.730척이라 하는데 현재 남아 있는 성터로 보아 일치한다고 한다.(경상대학교박물관)

 

  여지승람의 산음현 필자가 천령현(함양)의 독녀암을 기록했을 리가 없다. 게다가 독녀암 어디에 1,730척의 성벽이 있는가? 독녀암 주변에는 낮은 석축이 있긴 하지만 石列이라 할 정도이고 성을 쌓았으리라 볼 만한 돌무더기도 발견할 수 없다. 이런 견지에서 운서리의 독녀암과 생초면의 독녀성(어외산성)은 전혀 관계가 없는 별개의 유적지라 하겠다.(권유현 선생님)

 

 

烏石行春[오석(烏石)에 봄나들이를 가다.]

 

  縣西十里有黑石村 余效王半山改爲烏石

  [현의 서쪽 10리에 흑석촌(黑石村)이 있는데 내가 왕반산(王半山, 왕안석의 호) 過外弟飮(외사촌 집에 들러 술을 마시며)’ 3구에 나오는 시어 오석강(烏石岡)을 본받아 고쳐서 오석(烏石)이라고 하였다.]’

 

    茅屋皆臨水 : 띠집은 모두 계곡에 접해있고

    桃花盡掩門 : 복사꽃이 피어 다 문을 가렸네

    籃輿烏石逕 : 남여를 타고 오석으로 가는 길은

    擬入武陵村 : 무릉도원으로 들어가는 듯하네

 

    출처 : 「관포시집(灌圃詩集)」 어득강의 산음12영 중 제2수

 

  ■ 왕안석(王安石, 1021~1086) 중국 북송의 정치인. 자는 개보(介甫)며 호는 반산(半山)이다. 강서성(江西省) 출신이며, 5~6세 때 시경과 논어를 통달한 천재였고, 보원 원년(1038)에 부친상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노력한 끝에 4년 뒤 진사에 급제하여 북송의 시인·문필가로 활약했다. 송나라의 재상이자 문필가로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이다.

 

 

  관포(灌圃)의 독녀심선(獨女尋仙)의 부기(附記)에 나오는 오석강(烏石岡)은 어디인가. 관포(灌圃)의 산음(山陰)12() 중 2烏石行春[오석(烏石)에 봄나들이를 가다.]’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관포는 '현의 서쪽 10리에 흑석촌(黑石村)이 있다. 흑석촌(黑石村)을 왕반산의 시에 나오는 오석강(烏石岡)을 본받아 고쳐서 오석(烏石)이라고 하였다.[오석행춘]' '오석강 서쪽에 돌로 쌓은 성터가 있는데 속칭 독녀암이라 한다.[독녀심선]'라고 설명하고 있다. 두 기록을 근거로 오석강(烏石岡)은 현재 고동재로 추정된다.

 

  금서면은 본래 산청군 지역으로 금석면(今石面) 또는 검석면(黔石面)·오석면(烏石面)이라고 불렸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서상면(西上面)의 가등(佳鐙) 등 5개 리와 서하면(西下面)의 화계(花溪) 등 5개 리가 통합되어 12개 리로 개편되었고, 금석면과 서상면의 이름을 따서 금서면이 되었다고 한다. 흑석촌(黑石村)오석강(烏石岡), 그리고 금서면의 옛지명인 검석면(黔石面)·오석면(烏石面)을 연결하면, 독녀성이 뚜렷하게 보인다. 

 

  권선생님의 자료에서 독녀성과 독녀암이 별개의 유적지라고 결론을 맺고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도 의문의 여지를 많이 남겨놓으셨다. 경상대학교 박물관 조사 자료에 관포(灌圃) 어득강(魚得江, 1470~1550)의 독녀심선(獨女尋仙) 시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고 한다. 이렇게 동상이몽 오만가지 생각을 하며 구롱길을 둘러보고 장마로 물이 넘치는 의탄천을 다섯 번 건너서 어둠이 내리는 광점동으로 내려왔다. 끝.

 

 

일강 샘 『신증동국여지승람』의 溪泉이 '시냇물처럼 졸졸 흐르는 샘'은 아닐까.

은병암
선녀굴
의논대
고열암 앞 석축
고열암
시냇물처럼 흐르는 일강(미타봉) 샘
코끼리 바위
정든지사모 김제국님이 두고간 캔맥주
소림선방의 신목
題名于巖腹 : 바위 한가운데에 이름을 새기게 하였다.

 

  내가 지팡이로 계곡의 돌을 두드리면서 유극기를 돌아보고 이르기를, “아, 어떻게 하면 그대와 함께 은둔(隱遁)하기를 기약하고 이곳에 와서 노닐 수 있단 말인가?” 라고 하고는, 그에게 바위의 한가운데에 이끼를 긁어내고 이름을 쓰도록(새기게) 하였다. [1472년 김종직의 「유두류록」]  

 

방장문
구롱샘
서대초(맥문동)과 닮은 풀
김종직이 쉬어간 계석
지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