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수정·관선재와 달궁산성의 황령암터(230207)
▣ 일 시 : 2023년 2월 7일(화)
▣ 코 스 : 퇴수정-달궁산성-흑담(수월대)-퇴수정
▣ 인 원 : 5명
▣ 날 씨 : 맑음(-4도)
지난주 매동마을에서 소동폭포 마애 석각 명문에 나오는 박동한(朴東漢, 1875~?)의 후손을 만났다. 박동한(朴東漢, 1875~?)은 박상철(朴相喆, 義府都事 行泰川郡守)의 아들로 박치기(朴致箕)의 손자이다. 박상호(朴相湖)는 매천(梅川) 박치기(朴致箕)의 둘째 아들로 박동한(朴東漢, 1875~?)과 숙질간이다. 소동폭포는 소동파의 「전적벽부」 첫 구절에 나오는 "壬戌之秋 七月旣望"과 석각의 "壬戌 七月"이 일치하는 것으로 미루어 '소동폭포'라고 이름한 듯하다. 석각 시기는 임술년이니 1922년이다. 의은대(疑銀臺) 석각 또한 이 시기에 함께 석각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운성지』 속편에 의은정(疑銀亭)의 원운(原韻)과 기문(記文)이 『운성지』 구지(舊誌)에 실려 있다고 하는데 확인되지 않았다.(운성지에 없음) 1870년 매천(梅川) 박치기(朴致箕)는 퇴수정을 지었고, 1922년 박상호(朴相湖)와 박동한(朴東漢)은 관선재(觀善齋)를 지었다. '달궁산성'과 '황령암 터'라는 곳을 돌아보고 퇴수정과 관선재에서 일정을 마쳤다. 달궁산성 안에 황령암(黃嶺庵)이 있었다면 황령(黃嶺)은 어디일까.
방선대(訪仙臺) : 남원시 산내면 대정리에 있다. 큰 바위가 깎아지른 듯하고 연기와 안개가 땅에 널려 있어 마치 신선이 사는 곳과 같다. 유학자 양동섭(梁東燮)이 사람들과 함께 이곳에 모여 술을 마시고 손님들을 맞이하여 이곳에 올라 여흥을 즐겼다.
조선 후기에 선공감(繕工監) 가감역관(假監役官)을 지내다가 가선대부(嘉善大夫) 공조참판(工曹參判)에 증직된 매천(梅川) 박치기(朴致箕)가 벼슬에서 물러나 은거하기 위하여 1870년(고종 7)에 지은 2층 누각 건물이다. 퇴수라는 정자의 이름은 관직에서 은퇴하겠다는 의지를 담은 것이다.
전형적인 호남지방의 정자 유형을 따랐으며, 앞쪽으로 시냇물이 흘러 풍광이 아름답다. 냇가 높은 바위절벽 앞쪽에 장대석 2벌대 기단을 쌓고 네모난 주춧돌 위에 누하주(樓下柱)를 받쳐 두리기둥을 세웠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기와로 된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며, 가구(架構)는 5량가(五樑架)의 몰익공 구조로 짜여 있다. 가운데 1칸은 방을 들이고 그 외의 공간은 모두 마루를 깔았다. 방 삼면에는 머름대가 있고 문비를 설치한 흔적이 있으나 남아 있지 않다. 마루 주위 사방에는 퇴와 계자난간을 둘렀다.
정자 왼쪽의 사당 관선재(觀仙齋)는 4칸 규모로, 1922년 박치기의 후손들이 지은 것이다. 박완경(朴完卿)·이명상(李明翔)·권도용(權道溶)·노보현(盧普鉉)의 기문(記文)과 이규남(李圭南)의 상량문이 남아 있다. 가구 구조가 건실하고 정자의 입지가 뛰어나 정자 건축의 좋은 자료로 쓰이고 있다. 2000년 11월 17일 전라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퇴수정 [退修亭]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注 통사랑 박치기(通仕郞 朴致箕): 호 매천(梅川). 밀양 사람. 참판 명부(明榑)의 9 세손이다. 성품이 온후하고 행실이 결백하며 종족과 화목하였고, 형제가 우애하였으며,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고, 흉년이 들면 혜택을 베풀어 면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송덕비를 세워 주었다. 행선공 감가감역 증 공조참판이다. 반선대기(伴仙臺記)를 저술하였고, 면우(免宇) 곽종석(郭鍾錫)이 묘갈명을 지었으며, 안의에서 매동(梅洞)으로 이주하였다.(운성지)
注 별업(別業) : 살림집 밖에 경치(景致) 좋은 곳에 따로 지어 놓고 때때로 묵으면서 쉬는 집. 전원(田園)의 집이라는 뜻으로 별장(別莊)을 말함. 별서(別墅)라고도 한다. 업(業)은 전원(田園)이라는 뜻이다.
반선대(伴仙臺) : 산내면 퇴수정 아래 야박담(夜泊潭) 위에 있다. 돌이 깨끗하게 펼쳐 있고 봉우리들이 에워싸고 있으며, 반선대를 가로질러 흐르는 강줄기가 잠시 이곳에 머물러 못을 이루고 있다. 맑은 물은 거울과 같고, 세차게 흐르는 물은 여울을 이루어 물거품이 용솟음치고 있다. 참판 매천 박치기(梅川 朴致箕)가 이곳에 거처하면서 암벽에다가 시를 썼다.
塵外孤坮晩托蹤: 세속을 떠난 반선대에 만년에 찾아드니
淸流九曲嶽千重: 청류(淸流) 구곡(九曲)에 산은 천 겹이어라
蒼松隔水冷冷韻: 창송(蒼松)은 물 건너에서 냉랭한 음률이오
白石和雲淡淡容: 흰 바위 구름 속에 말쑥한 자태여라
忘世許同群鶴鹿: 세상사 잊었노라 학과 사슴 벗을 삼고
存身愧比蟄蛇龍: 몸 보존은 몸을 숨긴 蛇龍에 비해 부끄러울 뿐이다
靜觀認是仙人過 : 조용히 바라보니 이에 仙人이 거쳐간 줄 알겠노니
林壑依然道氣濃 : 숲 사이에 의연히 도인 기운이 무르녹는다
반선대기(伴仙臺記)
신선을 짝할 수 있는 것일까? 성현이 이에 대해 말한 바 없으며 만승천자로서도 구할 수 없는 일이다. 참으로 신선이라는 말은 황당한 것이다. 그렇다면 신선이란 짝할 수 없는 것일까? 신선이란 산사람(山人)을 말한다. 아름다운 산수를 지닌 한 지역을 얻어 그곳에 살면서 호흡하고 밖으로는 흥망과 영욕을 내 몸에 가하지 않고 안으로는 걱정 수심 온갖 생각들이 마음에 침범하지 아니하고서 정신을 함양하여 장수를 누린다면 어느 누가 신선이 아니겠는가.
내가 산에 들어와 은거함으로부터 세상사를 끊어버리고 더불어 지내는 자들은 대부분 조그만 집에 주경야독하는 선비들과 구름 덮인 산에서 나무하고 나물 캐는 무리들 뿐이다. 날마다 손님들과 더불어 한 병의 술을 차고서 한강가를 거닐며 강줄기를 따라 서쪽으로 내려오면서 우람하게 하늘이 만들어 놓은 듯한 누대에 앉으니 앞에는 삼선루(三仙樓)가 있고 옆에는 세진대(洗塵臺)가 있다. 위를 보면 푸른 성벽이 솟구쳐 있고 나무 그늘이 드리워지고 아래를 보면 맑은 시냇물이 격동하며 굽이치고 물줄기들이 얽혀있다.
이에 회포를 푸노니 정신이 맑고 마음이 기쁘다. 아! 만족스러워서 인간이 어떤 세상인지 알 수 없으며 기쁘고 기쁘니 늙음이 장차 이르는 것조차 알 수 없다. 나는 이에 술을 떠서 객에게 권하기를 “나는 옛적에 말하는 신선을 볼 수 없지만 또한 후인이 나와 그대를 보면 거의 신선이라 말하지 않겠는가.” 객이 웃으면서 대답하지 않기에 나는 이로 인하여 나의 누대의 이름을 삼고 암벽의 석면에 ‘반선’이라 새기어 산중고사를 삼는 바이다.
임술(?) 중춘, 매천(梅川) 박치기(朴致箕) 기록함.
야박담(夜泊潭)은 당나라 시인 장계(張繼)의 ‘풍교야박(楓橋夜泊)’에서 따온 이름이다.
楓橋夜泊 [풍교에서 밤에 배를 대다.]
張繼(장계)
月落烏啼霜滿天: 달 지고 까마귀 울고 하늘엔 서리 가득한데
江楓漁火對愁眠: 강풍교의 고깃배 등불 마주하고 시름 속에 졸고 있네
姑蘇城外寒山寺: 고소성(姑蘇城) 밖 한산사(寒山寺)의
夜半鐘聲到客船: 한밤중 종소리가 객선까지 들려온다
장계는 중당(中唐)의 시인으로, 자는 의손(懿孫)이며, 후베이성[湖北省] 샹양[襄陽] 사람이다. 현종(玄宗) 때 진사(進士)가 되었고, 검교사부원외랑(檢校祠部員外郎)과 홍주(洪州) 염철판관(鹽鐵判官) 등의 벼슬을 지냈다. 기행과 유람을 내용으로 하는 시를 많이 남겼으며, 특히 절구(絶句)에 뛰어났다.
제목은 '풍교에서 밤에 배를 대다'라는 뜻으로, 배를 타고 가다 날이 저물어 풍교의 강가에 배를 대고 밤을 보내며 지은 시이다. 풍교는 장쑤성[江蘇省] 쑤저우[蘇州]의 서쪽 교외에 있는 다리를 가리킨다. 고소성은 쑤저우에 있는 성이고, 한산사는 쑤저우의 풍교진(楓橋鎭)에 있는 사찰이다. 달도 기울고 까마귀 울어대는 이른 새벽에 밤새 내린 서리는 스산함을 더하고, 배 안의 나그네는 강가의 단풍나무와 고기잡이 배들의 등불을 바라보며 잠 못 이루는데 멀리 한산사에서 친 종소리가 귓전까지 닿아 시름을 더한다. 객지에서 바라본 늦가을 밤의 정경과 나그네의 심정을 빼어나게 묘사한 시로, 청나라 강희제(康熙帝)가 이 시에 끌려 풍교를 찾았다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풍교야박 [楓橋夜泊]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심진암(尋眞巖): ‘진경(眞景)을 찾는 바위’라는 뜻으로, 예전에는 속세의 티끌이 묻지 않은 깨끗한 곳을 심진동(尋眞洞)이라 하였다. 즉 퇴수정이 있는 곳을 심진동으로 본 것이고, 그곳에 있는 바위를 ‘심진암(尋眞巖)’라고 한 것이다.
原韵
目愛江山好 晩占水月坮 逍遙千載下 只喜白鷗來
○○(판독이 안됨)
※ 참고자료 : 『운성지』 전편(상, 하), 『운성지』 속편, 『신운성지』 (1, 2)
▶ 황령과 황령암에 대한 문헌의 기록
1. 1487년 남효온의 「지리산일과」
그 북쪽에 중봉산(中鳳山)은 빈발봉(貧鉢峰)의 북쪽에 솟은 봉우리이고 산등성이 절벽 아래에 적조암(寂照庵)․무주암(無住庵)등의 암자가 있었다. 그 북쪽의 금봉산(金鳳山)에는 금대암이 있었고 봉우리 서쪽에는 방장산이 있었다. 산봉우리에 만복대(萬福臺)가 있었으며 만복대 동쪽에는 묘봉암(妙峰庵)이, 북쪽에는 보문암(普門庵)이 있는데 일명 황령암(黃嶺庵)이라고도 하였다. 이 반야봉 남쪽에는 고모당(姑母堂_노고단)이, 고모당의 남쪽에는 우번대(牛翻臺)가 있는데 우번선사(牛翻禪師)의 도량(道場)이었다. 이 반야봉 동쪽에 선인대(仙人臺)가 있고, 그 동쪽이 바로 쌍계동(雙溪洞)이었다. 빈발봉이 봉우리의 동쪽에 있었고 천왕봉(天王峰)도 그 동북쪽에 있었다.
2. 1560년 서산대사의 「황령암기(黃嶺庵記)」
동해에 한 산이 있으니 이름은 지리산이라 하고, 그 산의 북쪽 기슭에 한 봉우리가 있으니 이름은 반야봉이라 하며 그 봉우리 좌우에 두 재(嶺)가 있으니 이름은 황령(黃嶺)과 정령(鄭嶺)이라 한다.[東海中有一山 名智異山也 山之北麓 有一峯 名般若峯也 峯之左右 有二嶺 名黃與鄭也]
注 서산대사의 황령암기에 나오는 문제의 이 문구가 황령의 위치에 혼란을 준다.
옛날에 한(漢)나라 소제(昭帝)가 즉위한 지 3년에, 마한(馬韓)의 왕이 진한(辰韓)과 변한(弁韓)의 난리를 피하여 이곳에 도성을 쌓을 때 黃·鄭 두 장군을 시켜 공사를 감독하였으므로 두 사람의 성을 따서 재를 이름하고, 도성을 72년 동안 보호하였다. 그 뒤 신라 진지왕(眞智王) 원년(576)에 운집대사(雲集大師)가 중국에서 나와 황령 남쪽에 절을 세우고, 그 이름을 따라 황령암(黃嶺庵)이라 하였다. 그 암자의 규모는 가운데 황금전(黃金殿)이 있고 동쪽에는 청련각(靑蓮閣)이 있으며 서쪽에는 백옥교(白玉橋)가 있어 꽃과 대나무가 서로 비추어 그 그림자가 금지(金池)에 떨어지면 마치 安養世界(극락세계)와 비슷하였다.
<중략> 이 암자는 신라를 지나 많은 세월을 겪는 동안에 신승(神僧)과 고사(高士)들이 중창하면서 대대로 살았더니 우리 中廟(중종시대)에 이르러 무술(戊戌, 1538)년의 난리에 모두 없어지고 다만 물소리와 산빛이 남아 있을 뿐이다. 성희(性熙) 법사 또한 운수(雲水)의 도인으로서 가정(嘉靖) 23년 갑진(甲辰, 1544)년 봄에 그 터를 지나가다 개연히 절을 다시 일으킬 마음을 갖고 신사(神師) 강연(姜淵)의 무리들과 더불어 절을 세우고 시주를 널리 교화하니 물건은 마치 하늘에서 오는 것 같았고 공사는 귀신을 부리는 것 같아서 을사(乙巳, 1545)년 가을에 낙성을 보았다.
3. 1598년(戊戌) 조경남의 『난중잡록』
○ 4월 10일 반야봉(般若峯)을 넘어 14일에 몰래 남원의 황령암(黃嶺庵), 운봉(雲峯)의 대암(臺庵) 등의 절에 이르러 함부로 살육 약탈하고, 여러 왜적이 다시 칠불사로 집합하여 먼저 몇 놈의 적을 보내어 석주성(石柱城)을 밀탐하였다.
4. 1753년 용담(龍潭: 1700~1762) 스님의 「황령암 중창기」
(황령암)암자 뒤로는 우뚝 솟아 곧장 구름으로 들어가 만복(萬福)을 굽어 본다. 암자 앞에 우뚝 서 있으며 허공을 가로질러 있는 것은 생각하건대 반야봉이다. 바람을 막고 암자 우측에 우뚝 오묘한 봉우리가 서 있다. 수레 자취를 끊어버리고 암자 좌측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은 실상동(實相洞)이다. (황령암)암자는 실상동 안에 있으면서 복, 지혜, 오묘함, 진실의 덕을 가지고 있다. ‘황령(黃嶺)’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은 일법 위에서 중도(中道)의 본체를 잃지 않아서 아니겠는가? 그리고 황령암 앞에는 황계수(黃溪水)가 있다.
<중략> 정묘년(丁卯年: 1747)이다. 그 해 3월에 팔인지화(八人之禍)를 당했는데 전각(殿閣)이 하나도 남김없이 불에 타버렸다. <중략> 그 해 1747년 4월에 공사를 시작하였다. 1749년에 대전(大殿)을, 1750년에 정루(正樓)를, 1751년에 익실(翼室: 좌우 양옆에 딸린 방)을, 1753년 5월에 단청공사를 하여 마무리를 지었다.
注 八人之禍 : 화재(八+人=火)
5. 1818년 정석구(鄭錫龜)의 「두류산기」에 나오는 황령(黃嶺)
동남쪽으로 가파르게 솟아 있는 곳이 정령(鄭嶺)이다. 고개 위에 둘레가 10여 리나 되는 성이 있는데, 「황령기(黃嶺記)」에 이르기를 "옛날 마한(馬韓)이 진한(辰韓)과 변한(卞韓)에 쫓겨 당궁(達宮)으로 피해 왔는데, 황(黃) 장군에게 황령(黃嶺)을 지키게 하고 정(鄭) 장군에게 정령(鄭嶺)을 지키게 하였다."라고 하였다. 이 두 곳이 그런 이름을 얻은 것은 혹 그럴듯하지만, 또한 무엇을 근거했는지는 알 수 없다. <중략> 오른쪽으로 만복대(萬福臺)가 된다. 그(만복대) 동쪽으로 낮아지는 산줄기는 황령(黃嶺)의 주능선이고, 서쪽으로 낮아지는 산줄기가 가까이에서 혈(血)을 이룬 곳이 파근사이며, 남쪽으로 뻗어내려 잔강(潺江, 신월리 잔수역)에서 멈춘다.
6. 1823년 김선신의 『두류전지』에 나오는 황령암
지리산 산중(황령 골짜기 안에 있다고 해야 한다)에 있다. 고려 공민왕 때에 처음 창건됐다. 가정 정유년(1537)에 중수했는데 대들보·기둥·서까래 등은 모두 예전 재목을 그대로 사용했다. 그러므로 사람의 어깨와 다리에 닳아 기둥의 형체가 요(凹) 자 모양으로 됐다. 사찰로 가는 길이 매우 험하고 멀어 병화가 미치지 못한다.
7. 1997년 간행된 『신운성지』에 나오는 황령골과 새목재
① 황령골 : 달궁 남쪽에 있는 골짜기. 황장군이 달궁을 지키던 고개였다고 한다. ② 새목재 : 조항(鳥項). 보듸재(柳峙) 서남쪽에 있는 마을. 지형이 새의 목처럼 되어 있다. ③ 북당골 : 옛날에 불당이 있어서 불당골이라고 부르던 것이 변하여 북당골이라고 부르는 골짜기다.
※ 황령암 관련 기록을 종합하여 요약하면
만복대에서 동쪽으로 뻗은 산줄기가 황령의 주능선이고, 황령 남쪽에 황령암이 있다. 황령은 만복대 동릉에 있는 황장군이 달궁을 지키던 고개이다. 구례 산동장 가는 길목의 새목재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달궁 남쪽 골짜기가 황령골이고 황령암 앞에는 황계수가 흐른다. 황령과 황령암은 한 세트이다. 황령암을 황령과 떼어놓고 논할 수는 없다.
① 황령과 황령암은 한 세트
② 황령암 앞에 황계수(黃溪水)가 흐른다.
③ 만복대에서 동쪽으로 뻗은 산줄기가 황령의 주능선
④ 달궁 남쪽 골짜기 황령골, 황령은 황장군이 달궁을 지키던 고개
⑤ 진지왕 원년(576)에 운집대사가 황령 남쪽에 절을 세우고 황령암이라고 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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