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청권사 종친 문경 유적지 순례
▣ 일 시 : 2022년 06월 16일(목)~17일(금)
▣ 코 스 : 모심정-오태영당-근암서원-STX리조트-운강묘소참배-STX리조트(숙)-개바위-운강기념관-청운각-문경새재도립공원
▣ 인 원 : 209명
▣ 날 씨 : 맑음
사단법인 청권사 종친 문경 유적지 순례에 다녀왔다. 청권사는 효령대군을 모시는 사당 이름이고 종친회 명칭이다. 청권사는 서울 서초구 방배동 효령로에 있다. ‘청권(淸權)’은 옛날 중국 주(周)나라의 우중 왕자가 아버지 태왕의 뜻을 헤아려 아우에게 왕위를 양보한 미덕을 칭찬하면서 공자가 청권이라고 한데서 유래한다. 효령대군은 아버지 태종대왕의 의중을 헤아려 아우인 충녕대군(세종대왕)에게 왕위를 양보했다. 그 미덕을 세종대왕은 나의 형이 곧 청권(淸權)이라고 칭송했고, 정조대왕은 효령대군의 사당을 청권사로 사액(賜額)했다.
이번 문경 유적지 순례에는 이정일 이사장님, 자문위원, 임원, 대의원, 6자파 종회장, 전례위원, 문화위원, 효령문화원 임원 등 200여 명이 참가했다. 문경시 농암면 내서리 STX리조트에서 1박을 하고, 효령대군 영정을 모신 상주시 공검면 오태영당, 효령대군 8대손인 활재 이구 선생의 위패가 있는 근암서원, 한말 의병장으로 활약한 효령대군의 18대손 운강 이강년 선생의 묘소와 기념관, 항일 의병운동 유적지인 개바위와 고모산성 등을 둘러봤다. 문경에 계시는 학용(學用) 종현님의 도움으로 지산유고 창의일기에 나오는 仙遊洞(선유동)과 大井(대정)의 지명을 확인하였다. 大井(대정)은 지금의 문경시 농암면 한우물 마을이다.
청권사 종친 문경 유적지 순례에 참석하기 위해 대전에서 이강주(의성군댁) 대부님, 이강필(서원군댁) 대부님, 이강섭(서원군댁) 대부님과 동행하였다. 지난해 청권사 문화위원 위촉장을 받았지만 지난 6월 3일 청권사에서 문화위원 상견례에 참석한 것이 전부이다. 청권사 종중 일은 미지의 세계이다. 문중에서 사용하는 호칭과 용어도 모르는 내게 세 분의 대부님은 구세주와 같았다. 이번 답사에서 선유동(仙遊洞)과 대정(大井)을 확인하였다. 1896년 3월 28일 이기찬 대장의 김산(김천)의진은 함창에 주둔한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하고자, 선유동(仙遊洞)을 거쳐 문경 대정(大井)까지 진출했으나, 참모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지산 이기찬 선생과 운강 이강년 선생은 의성군댁 집안의 숙질간(21寸)이다. 두 분은 청권사에 묘소가 있는 사건(思騫) 공의 후손이다. 어찌 모골이 송연해지는 일이 아닌가... 사단법인 청권사 종친 문경 유적지 순례를 계획하시고 진행하신 이정일 이사장님 이하 청권사 임원 여러분들께 감사드리며 글을 맺는다. 끝.
▼ 오태영당(五台影堂)과 청은재(淸隱齋)
이곳은 효령대군의 영정을 모신 영당이다. 효령대군은 조선조 태종대왕 제2왕자로서 휘(諱)는 보(補), 자는 선숙(善叔), 아호(雅號)는 연강(蓮江), 시호는 정효공(靖孝公)이시다. 임진왜란 때에 종손(宗孫)이 난을 피하여 대군의 신주(神主)를 모시고 영남지방에 유락(流落)하여 함창땅에 정착하게 되었다.
숙종(肅宗) 12년(서기 1686년) 외예손(外裔孫) 10대손 경상감사 이규령(李奎齡)에 의하여 공검면 율곡리에 사당이 건립되어 신주(神主)를 모시고 봉사(奉祀)하여 오다가, 영조 13년(서기 1737년) 나라에서 대군의 묘하에 사액사당(賜額祠堂)인 청권사를 건립하게 되어, 영조 19년(1743년) 위패를 청권사에 이안(移安)하였다. 순조 6년(서기 1806년)영남 유림들의 공의(公議)로 구 사당에 기양서원(岐陽書院)을 설립하여, 양녕 · 효령대군을 병향(幷享)하고 유림(儒林) 봉사(奉祀)하였다.
1932년 음 7월 14일 대군의 신주(神主)를 청권사로부터 왕릉 괴리에 이안(移安)하여 모시고, 제향을 받들어 오다가 1973년 3월 25일에 다시 방배동 청권사로 모시게 되었다. 오랜 세월 대군의 위패가 계시던 사당을 길이 보전하기 위하여 대군의 영정을 봉안하고 매년 제향을 받들고 있으며, 1988년 재실 청은재(淸隱齋)를 신축하고 부대시설을 갖추었다. (안내판 건립일 1990.10.14)
사단법인 청권사
전주이씨 효령대군파종친회
▼ 근암서원(近嵒書院)
○ 위치 :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금천로 351-5
○ 문화재 지정 :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77호
근암서원(近嵒書院)은 조선시대 명현인 효령대군 8대손인 활재(活齋) 이구(李榘), 우암(寓庵) 홍언충(洪彦忠),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 사담(沙潭) 김홍민(金弘敏), 목재(木齋) 홍여하(洪汝河),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 청대(淸臺) 권상일(權相一) 칠현을 배향하는 서원이다.
1544년(중종 39)에 근암서당으로 설립되었다가 이후 1699년(현종 10)에 홍언충(洪彦忠)과 이덕형(李德馨)의 위패를 모시고 근암서원으로 개칭하였다. 1868년(고종 5)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毁撤)되었다가, 1982년 지역의 유림과 배향 인물의 후손들에 의해 사당과 강당이 중건된 바 있다. 2011년 지역 유림과 시민들의 연원을 담아 사당, 강당, 동 · 서재 등 모두 10동의 건물이 근암서원의 옛 모습으로 복원했다. 근암서원(近嵒書院)에서 암(嵒)은 바위암의 이체자이다. 品은 바위가 쌓여있는 모양과 山이 결합된 글자이다.
▶ 이구[李榘, 1613(광해 5)~1653(효종 5)]
휘(諱)는 구(榘), 字는 대방(大方), 號는 활재(活齋), 본관은 전주이다. 효령대군의 8대손이며 공조정랑 광흡(光洽)의 아들이다. 어릴 때부터 제자백가서를 탐독하였다. 외조부 칠봉(七峰) 황시간(黃時幹, 1558~1642)의 권유를 받고 성현의 학문을 탐구하게 되었다. 홍호(洪鎬, 1586~1646) 등과 교유하였으며 성리학에 있어서는 이기이원론을 따랐다. 퇴계의 문하중 병파(屛派)인 류성룡의 학통으로 이이와 성혼의 문묘종사가 추진될 때 류직[柳稷, 1602년(선조 35)∼1662년(현종 3)] 등 영남 유생 900여명의 반대소를 지어 올렸다. 이이(李珥)의 학설을 비롯하여 서경덕, 육구연(陸九淵, 1139~1192), 진헌장(陳獻章, 1428~1500), 왕수인왕수인(王守仁, 1472~1528), 장자와 불교를 모두 이단으로 배척하였으며, 특히 영남학파 형성에 있어 이(理)의 초월적 실재성을 강조하여 주리적이기론(主理的理氣論)을 발전하게 하였다. 정주학과 퇴도학에 전념하여 과거를 버리고 산간에서 후진에게 이기(理氣)의 진수를 논강하고 많은 저서를 남겼다. 42세에 돌아가셨다. 1786년(정조 10)에 근암서원(近嵒書院)에 추향되었다. 선계는 보성군-동양정-강성도정이다. 《활재선생문집 목판본》은 도지정유형문화재 제153호이다.
注 육구연(陸九淵, 1139~1192) 중국 남송의 사상가이다. 자는 자정(子靜), 호는 상산(象山), 시(諡)는 문안(文安)이다. 진헌장(陳獻章, 1428~1500) 자 공보(公甫), 호 백사(白沙)•석재(石齋), 시호 문공(文恭), 중국 명나라 사조(思潮)의 선구적 역할을 수행한 사상가이다. 왕수인(王守仁, 1472~1528) 중국 명나라의 정치인·교육자·사상가이다. 양영학의 창시자, 심학(心學)의 대성자로 꼽힌다.
▼ 지산유고 창의일기에 나오는 한우물(大井)
○ 丙申年(1896년) 三月 二十八日
二十八日 移陣于聞慶大井 去倭站才五十里 招諭諸將曰 吾輩用兵出於不已 而志在撥反 撥反不得 則非徒無益 此去彼站不遠 諸軍其從我進取乎 皆曰 彼强我弱 鋒不可當 俄而濃雲密布 雨下如注 非進趨之時也
삼월 이십팔일 陣(진)을 聞慶(문경) 大井(대정)으로 옮겼다. 倭(왜)의 驛站(역참)과의 거리가 겨우 五十里(오십리)였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 깨우쳐 말하기를 '우리들이 그만 둘 수 없음에 의병으로 나왔고,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아 정도로 돌아감에 뜻이 있으니, 난세를 바로잡아 태평한 세상으로 돌릴 수 없으면, 다만 이익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이곳과 저들(倭軍) 驛站(역참)과의 거리가 멀지 않으니, 제군들이 나를 좇아 나아가 왜적들을 취하겠는가?' 諸將(제장)들이 다 말하기를 '저들(日本軍)은 强(강)하고 우리(義兵)는 弱(약)하여 날카로운 기세를 당해낼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갑자기 짙은 구름이 빽빽하게 널리 퍼지고 비가 내리는데 마치 물을 퍼붓는 것과 같아 군사가 前進(전진)할 때가 아니었다.
余乃仰天歎曰 自八月以後 忠憤所激 有出位之思 而提兵數朔 內自相攻 幺麽小賊 容在垣墉 其於十八强國 何且乘輿播越 逼於外夷 哀痛之詔 反爲飭諭 有志之士 陷於無名 功成之前 措躬無地 顧此不佞 欲赴鬪以死 則人不從我 欲歸家安業 則生不如死 寧桴海竄林 待諸君報捷之日 是所望也 此間有子房 願諸君往見之 乃投書于柳兄建一 全付士卒 則建一以其從祖梁山丈 仗義一門 兩擧有所如何云 固不可强
내가 이에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여 말하기를 '팔월 이후부터 충성심과 분개함으로 소용돌이치는 바 자리에서 나올 생각이 있어서 군사를 거느리고 數朔(수삭) 안에 몸소 다스린 일들이 보잘것없이 매우 적다. 작은 도적들의 모습은 그 十八强國의 담 안에 있으며, 어찌 또한 임금의 수레가 도성을 떠나 난을 피하여(俄館播遷) 오랑캐에게 핍박을 당하는가?
애통한 詔書(조서:詔勅)는 도리어 勅諭(칙유:임금이 몸소 타이르는 말)가 되었다. 뜻이 있는 선비는 명분이 없음에 빠지게 되었고 성공하기 전에는 몸 둘 곳이 없다. 이곳을 돌아보고 내(재주가 없음:자기의 겸칭)가 나아가 싸워서 죽자고 하면 사람들은 나를 따르지 아니하고, 집으로 돌아가 편안하게 생업에 종사하자고 하면 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하다고 하니 차라리 뗏목을 타고 바다를 떠돌아다니듯 流浪(유랑)을 하고 숲 속에 숨어서 제군들이 원수를 갚고 승리하는 날을 기다리는 것, 이것이 바라는 바이다.'
이 사이에 子房(자방)이 있어 諸君(제군)들을 가서 만나기를 희망하여 이에 柳兄(유형)建一(건일)에게 글을 보내 '사졸들을 전부 부탁한다. 곧 건일은 그 從祖(종조:할아버지의 형제)가 梁山(양산) 어른으로 義兵(의병)을 일으킨 一門(일문)으로 두 사람의 이름을 높이 들어 올림이 어떠한가?' 라고 하였다. 진실로(굳이) 억지로 권할 수 없는 일이다.
☞ 류만식(柳萬植, 1860~1926) : 수암 류진의 10대 종손이요 溪堂 유주목(柳疇睦)의 장손이며 아버지는 海史 류도석(柳道奭, 1828-1908)이다. 자는 建一이고 호는 二江이다. 우천 수암종택에는 二江精舍라는 현판이 있다. 二江은 洛坡 柳厚祚의 曾孫인 柳萬植公의 號이다. 柳二江은 우천 수암 종가의 宗孫이기도 하다. 1860년(철종 11년)에 태어나 일정 때인 1926년 향년 67세로 졸했다. 道士林의 천거로 齊陵참봉으로 임명되었다. 박식과 담론으로 大家의 풍도가 있었다.
▼ 공연 및 문경소개(STX리조트)
▼ 운강묘소 참배
▼ 洞天岩(五丈碑)
《정본 수능엄경(正本 首楞嚴經)》의 게송(偈頌)에 우복동 동천(洞天) 석각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개운조사 나이 51세, 1840년(경자) 8월 23일(庚辰日 : 세 번째 庚日)의 일이다.
▼ 우복동도(牛腹洞圖)
▼ 개바우 공원
○ 위치 :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은성로 12-5
개바위 전설이 전해져오는 농암천변은 한국독립운동사에서 가장 빛나는 별 가운데 한 분인 운강 이강년 선생이 안동부 관찰사 김석중과 군졸 두 명을 처단한 곳이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이에 비분강개한 선생은 문경 가은 도태리(현 상괴1리)에서 창의하여 개바위에서 안동관찰사 등 친일부일배(親日附日輩) 3명을 처단하고 농암장터에서 창의의 깃발을 더 높였다.
※ 개바우 전설
옛날 문경 농암1리 냇가에 개 한 마리가 지나가다 중곡리의 괴정 뒷산에서 호랑이가 입을 벌리고 잡아먹으려고 노려보고 있었다. 마침 맞은편 성재봉 밑에 있던 사자가 호랑이를 견제하고 노려보므로 서로 잡아먹지 못하였다. 후일 사자와 호랑이, 개는 그대로 바위로 변했다고 한다. 지금도 그 형태를 찾아볼 수 있다. 출처 : 농암면지
▼ 금하굴(金霞窟)
▼ 희양산 봉암사
▼ 지산유고 창의일기에 나오는 선유동
○ 丙申年(1896년) 三月 二十七日
二十七日 踰葛嶺 抵高橋 問宗人秉禧 居喪中 火于壯岩李交河家 堤川召募將李華榮 執富人吳進士 與金都事 載前載後 余心不樂 先發至松面 松面近地 無一人 安業者細細 探得前到十輩 不知何許無名 而逢人必討逐戶 而索可駭 分付中營 捕捉不得 且聞炮殺尙州首吏與申倅 中房云耳 進宿仙遊洞
삼월 이십칠일 葛嶺(갈령)을 넘어 高橋(고교)에 이르렀다. 宗人(종인) 秉禧(병희)를 찾아갔는데 喪中(상중)에 있었고 장암 李交河(이교하)의 집에 불이 났다. 堤川(제천) 召募將(소모장) 李華榮(이화영)이 부자인 吳進士(오진사)와 金都事(김도사)를 잡아서 곧 앞서거니 곧 뒤서거니 하니 내 마음이 즐겁지 못했다. 먼저 출발하여 松面(송면)에 도착했다. 松面(송면) 근방에는 한사람의 인적도 없었고 편안하게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매우 적었다. 먼저 도착한 10여명의 무리를 찾아서 잡으려 했으나 어느 곳 사람인지도 모르고 이름도 없으나 사람을 만나면 반드시 집에서 벌하여 내 쫓고 돈이나 물품을 억지로 취하니 가히 놀랄만한 일이라 중영에 분부하여 잡도록 하였으나 잡지 못하였다. 또한 尙州(상주) 首吏(수리)와 申守令(원님)을炮殺(총살)하였다고 中房(중방)이 말하는 것을 들었을 뿐이다. 전진하여 仙遊洞(선유동)에서 묵었다.
▼ 운강이강년기념관
○ 위치 :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대야로 1683
운강이강년기념관은 대한제국시대구국의 일년으로 의병을 일으켜 빛나는 승리를 거둔 도창의대장 효령대군 18대손 운강(雲崗) 이강년(李康秊) 선생의 업적을 기리는 장소로 한말 의병전쟁의 횃불, 선생이 남기신 숭고한 구국정신을 이어가고 있는 곳입니다.
1. 건립배경
의병대장 운강 이강년 선생의 구국항일투쟁의 숭고한 위업을 재조명하고 이를 널리 알려서 자라나는 후손들에게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여, 애국애족의 국민정신을 고취시키고 또한 올바른 민족 가치관을 창립하고자 건립하였다.
2 연혁
○ 1993년 02월 이강년 생가지 문화재지정(경상북도지정기념물 제90호)
○ 1994년 06월 이강년 생가 복원
○ 1997년 12월
○ 1998년 07월 운강이강년기념관 유물 전시관 건립
○ 1999년 05월 운강이강년기념관 사당 건립
○ 2001년 12월 운강이강년 동상 건립
○ 2002년 04월 운강이강년기념관 개관
3. 운강(雲崗) 이강년(李康秊) 선생의 생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낙인(樂仁, 樂寅), 호는 운강(雲岡). 아버지는 기태(起台)이다. 1880년(고종 17) 무과에 급제하여 절충장군행용양위부사과(折衝將軍行龍驤衛副司果)로서 선전관(宣傳官)이 되었으나,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1895년 8월 민비가 일본군에 의해 학살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1896년 1월 11일 문경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때 안동관찰사 김석중(金奭中)과 순검 이호윤(李浩允), 김인담(金仁覃) 등 3명을 체포하여 농암장터에 운집한 군중 앞에서 효수(梟首)했다.
이어 제천의 유인석(柳麟錫)을 찾아가 사제(師弟)의 의를 맺고, 유인석 의병부대의 유격장으로서 문경·평천·조령 등지에서 활약했다. 이해 4월에 장기렴(張基濂)이 거느린 관군과 제천에서 싸워 패한 후, 강원도를 거쳐 압록강을 건너 랴오둥[遼東]으로 가고자 했으나 영월에서 더 전진하지 못하고 소백산에 들어가 7월에 의병을 해산했다. 유인석이 랴오둥으로 가자 그도 잠시 랴오둥으로 건너갔다가 돌아와서 단양 금채동(金采洞)에서 학문에 전념했다.
1907년 일본의 침략이 더욱 노골화되어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고종이 강제로 물러나고 한일신협약으로 한국군대가 해산당하자, 영춘(永春)에서 더 큰 규모의 의병부대를 일으켰다. 1907년 7월 7일 제천에서 일본군과 교전한 것을 비롯하여, 9월 16일에는 싸릿재, 9월 27일에는 죽령, 10월 5일에는 단양 고리평(故里坪), 10월 23일에는 풍기 백자동(柏子洞)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이때 강원도의 이인영(李麟榮) 의병부대 및 경기도의 허위(許蔿) 의병부대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풍기·문경·단양·연풍·영월·죽령 일대에서 일본군 수비대를 격파했다.
이후 이인영으로부터 경기도로 집결하라는 통문을 받고 경기도 건천(乾川)으로 진출했다. 1908년 7월까지 충청도·강원도·경기도 일대에서 약 500명을 이끌고 치열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다. 1907년 11월 경기도 양주에 모인 의병장들이 13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鎭所)를 성립시키고 관동창의대장(關東倡義大將) 이인영을 13도창의총대장으로 추대하고 각 도별로 진명을 내리고 지휘체계를 정비할 때, 호서창의대장(湖西倡義大將)으로 임명되었다.(13도 창의군) 이후 13도연합의병부대가 해체된 다음 1908년 2월 17일의 경기도의 용소동(龍沼洞)전투를 비롯하여 2월 26일의 갈기동(葛基洞)전투, 3월 12일의 백담사(百潭寺)전투 등에서 큰 전과를 올리는 등 강원도 인제 부근에서 일본군의 포위 공격망을 돌파·항전하면서, 1908년 4월경에는 소백산·일월산 일대로 활동무대를 옮겨와 일본군과 항전을 계속했다.
이때 변학기(邊鶴基)·성익현(成益顯)·김상태(金尙台)·정경태(鄭敬泰)·백남규(白南奎)·정연철(鄭蓮哲) 등 의병장과 제휴하여 안동 서벽(西壁)전투에서 일군을 맞아 매복작전으로 크게 승리하는 등 많은 전과를 올렸다. 소백산·일월산 일대에서의 활약으로 일본군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 넣고 큰 전과를 거두었으나, 청풍(淸風)·작성(鵲城) 싸움에서 부상을 입고 1908년 6월 4일 일본군 수비대에 체포되었다. 같은 해 7월 8일에 서울의 일본군 헌병사령부로 압송되었다가 평리원으로 옮겨 9월 22일에 교수형을 선고받고 10월 13일 처형되었다. 시신은 유언에 따라 과천의 효령대군의 묘 아래 장례했다가 나중에 상주시 화북면 입석리로 옮긴 듯하다. 저서로는 〈운강문집〉·〈운강선생창의일록〉이 있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 가운데 최고 등급인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갈평에 전승비, 왕릉 역전에기념비, 제천 의림지에 전적추모비, 가은 완장리에 기적비, 독립기념관에 시비 등이 세워졌다. 사단법인 청권사가 간행한 《국역 운강 이강년 전집》과 일대기를 소설로 쓴 《의병대장 이강년》이 있다. 묘소는 경북 상주시 화북면 입석리에 모셔져 있으며 2002년 3월 경북 문경시 가은읍 완장리 운강이강년기념관 경내에 충의사 사당을 세웠다. 선계는 의성군-무송군-유성군이다.
▼ 고모산성
고모산성은 한말 일본 제국주의 침략에 저항하여 의병항쟁에 나선 운강 이강년 의병장의 전적지이다. 운강선생은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시행되자, 이를 비통하게 여겨 1896년 2월 23일 향리에서 창의(倡義)하였다. 창의 후 운강 성생은 농암장터(현 농암면 개바위)에서 단발령에 앞장선 친일파인 안동 관찰사와 순검 2명을 처단하였다.
이때 운강 선생은 600명의 의병을 이끌고 모곡(마성면 모곡리)을 거쳐 1896년 2월 26일 밤 고모산성으로 진군하여 방어진지를 구축하였다. 고모산성은 태봉(함창읍 태봉리)과 수안보에 주둔한 일본군의 병참선상에 있는 중요한 지점으로 1896년 2월 27일 새벽 일본군과 관군의 기습 공격으로 6시간에 걸친 치열한 전투를 했던 장소이다.
1907년 7월 일제가 강제로 군대를 해산시키자 운강선생은 다시 제천에서 창의하여, 제천과 충주룰 거쳐 1907년 9월 문경으로 진군하여 신현(마성면 신현리)에 지휘소를 두고 고모산성에 방어진을 설치하였다. 이후 약 1주일 동안 문경새재, 갈평, 동로, 적성에서 전투를 벌였다. 갈평에서는 일본군 진지를 괴멸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고모산성은 신라가 5세기경 문경에 진출한 이후 축조한 거점 성곽이다. 이곳은 신라가 고구려의 남진을 방어하고 한강 유역으로 진출하기 위해 소백산맥 이남에 설치한 전진기지였다. 산성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주흘산 이남이 한눈에 보이며, 남쪽으로는 불정 지역 외에는 다른 곳으로 길을 만들 수 없어 반드시 이곳을 통과해야 하는 길목에 있다. 그래서 임진왜란, 동학 농민운동, 한말 이강년 선생 의병항쟁 등 여러 차례 전략적 요충지로 이용되었다. 성은 장방형(직사각형) 구조로 총 둘레는 1,270m이다. 성의 높이는 성벽이 낮은 곳은 1m, 높은 곳은 11m로 지형에 따라 차이가 있다.
▼ 청운각(박정희 대통령 첫 하숙집)
▼ 문경새재도립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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