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조형시비

마천면 구양리 오도재 전망공원 시비(詩碑) 조형물

도솔산인 2022. 1. 9. 11:57

마천면 구양리 오도재 전망공원 시비(詩碑) 조형물

 

 

 

智異山 (지리산)
    
                경암(敬菴) 문동도(文東道)

浩浩復浩浩(호호부호호) : 넓고 넓은 그위에 또 겹쳐 광대한 모습 
悠然出世塵(유연출세진) : 그렇게 아득히 세속 먼지 벗어났네 
花落溪流錦(화락계류금) : 꽃이 떨어져 계곡에는 비단 같은 물 흐르고
雲生壑舖茵(운생학포인) : 구름이 생겨나니 구렁에 자리를 펼쳤네.
山川人覓道(산천인멱도) : 산과 시내에는 사람들이 길을 찾으며
天地鳥鳴春(천지조명춘) : 온세상에서 새들이 지져귀는 봄이로구나.
欲題探勝句(욕제탐승구) : 절경을 찾아서 시구를 쓰고자 하여
憑崖筆驅神(빙애필구신) : 언덕에 의지해 서니 붓은 절로 흐르는구나.

 


☞ 문동도[文東道, 1646(인조24년)~1699(숙종25년)] 조선후기의 시인, 본관은 단성(丹城),자는 성원(聖源), 호는 경암(敬菴)이다. 일찍이 성리학을 강마하여 학행으로 문명을 떨쳤으며 숙종 때 후릉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불취하고 오직 학문에만 전념했다. 합천의 용연서원(龍淵書阮)에 제향되었다.

 

 

 

 

 

天王峯上朝景壯觀吟 : 천왕봉 위 아침 경치 장관을 읊다.


                                    碧松人 元應 裵久閒(벽송인 원응 배구한) 
 
七仙淸流濯世塵(칠선청류탁세진) : 칠선골 맑은물에 세상티끌 씻어내고
天王峯上雄氣生(천왕봉상웅기생) : 천왕봉 올라서니 웅장한 기운이구나
俯望矗矗千山峰(부망촉촉천상봉) : 굽어보니 우뚝우뚝 일천산 봉우리요
雲海茫茫萬里廻(운해망망만리회) : 구름바다는 아득히 만리에 돌아드네


☞ 元應(1935~2018) 스님 : 1935년 2월9일 성주 배씨 상식 거사와 단양 우씨 선이 보살의 차남으로 경북 달성군 옥포면 반송동에서 태어났다. 서울 중동고교 재학 시절 병가 휴학 중 부친의 권유로 부산 선암사에 주석 중이던 석암 스님의 문하로 출가, 이후 선산 도리사, 금룡사, 해인사 등 제방선원에서 수행정진했다. 세수 27세에 지리산 벽송사에 머물며 하봉 부근 국골토굴에서 3년 결사를 성만한 스님은 벽송사를 중창했을 뿐만 아니라 사찰림 30만 평(약 992,000㎡)가 개인의 손에 넘어가 있는 것을 알고 대법원 승소 판결을 받아 이를 회복하기도 했다.

1970년대 말 원력을 세우고 지리산 자락인 함양에 화엄도량 서암정사 불사를 시작한 스님은 새벽예불로 하루를 시작해 낮에는 밭을 일구고 밤에는 사경을 수행 삼아 정진을 거듭했다. 특히 사경통선(寫經通禪)을 주창한 스님이 1985년부터 15년에 걸쳐 ‘대방광불화엄경’ 80권 전권을 먹사경과 금니사경으로 성만한 불사는 고려시대 이후 최초로 회자된다. ‘화엄경’ 전문 59만8000여자를 4년여에 걸쳐 한 자씩 먹으로 옮겨 적은 후 그 위에 감지를 덧대어 곱게 빻은 금가루를 이용해 다시 붓으로 적은 금니사경에 6년이 걸렸다. 이를 마무리하는데 또 5년이 걸렸다. 작업에 소요된 금은 신도들이 지원했고, 닳은 붓만 60자루에 달했다. 참선을 하면서 적게는 하루 2~3시간씩 많게는 8시간씩 작업을 계속하는 바람에 한때 실명에 가까울 정도로 시력을 잃기도 했다. 완성된 ‘화엄경’은 병풍형 책자로 14~15m 크기의 병풍첩 80권이다. 전체 길이만도 1300m에 이르는 대작이다. 이 금니사경본은 서암정사 사경법보전에 봉안돼 있다.

원응 스님은 서암정사에 주석하며 석암문도회 문장으로 문중의 화합을 이끈 것은 물론 대만, 호주, 중국, 미국 등 국내외를 막론하고 후학들을 제접했다. 어느 날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고?”라는 질문을 상좌들에게 던지며 한번 일러보라 하신 원응 스님은 임종게를 남기고 광복절이던 8월15일, 세수 84세, 법랍 66세로 원적에 들었다.

다음은 스님의 임종게다.

明明靈源體 밝고 밝은 신령한 근원의 본체는
寂然無所住 고요하여 머무는 바가 없도다.
自體非形色 자체는 형색도 없으니
隨緣萬般解 인연 따라 온갖 것을 알 뿐이니라.

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출처 : 법보신문

 

 

 

 

天王峰(천왕봉)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乾坤初闢在何年(건곤초벽재하년) : 하늘과 땅이 처음 열린 게 어느 해였던가?
準備頭流擎彼天(준비두류경피천) : 두류산을 준비하여 저 하늘 떠 받쳤네.
層崖陰織春無盡(층애음직춘무진) : 층계진 언덕엔 그늘 쌓여 봄이 다하지 않고
下界雲蒸晝欲眠(하계운증주욕면) : 하계엔 구름이 끼어 낮에도 잠자려 하네.
瞻依日月頻回首(첨의일월빈회수) : 해와 달을 보며 자주 고개 돌려보고
管轄山河摠俯前(관할산하총부전) : 산하를 관할하니 모두 앞에서 구부리네.
莫謂尋眞多別路(막위심진다별로) : 진경을 찾는데 다른 길이 많다고 하지 마라.
發源自有逝斯川(발원자유서사천) : 발원지가 절로 있어 이 시내 이루어 간다네. 

 

 

☞ 최익현(崔益鉉, 1833~1907) 대한제국 때 을사조약의 무효를 선포하고 국권회복에 힘쓴 문신. 본관은 경주, 아명은 기남, 자는 찬경, 호는 면암(勉菴)으로 1855년 급제하여 관직에 오른 이후 대원군의 정책을 비판하는 등 직언을 아끼지 않았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약의 무효를 국내외에 선포하고 망국조약에 참여한 외부대신 박제순 등 5적을 처단할 것을 주장했다. 〈포고팔도사민〉을 각지에 보내 우리 민족이 당당한 자주민임을 밝히고, 국권회복에 동참할 것을 호소했다. 1895년 8월 명성황후시해사건이 일어나고, 11월에 단발령이 내려지자 포천군 내의 양반들을 모아 국모의 원수를 갚고 단발령에 반대할 것을 꾀했다. 1906년 수백 명의 유림을 모아 의병을 모집했으나 곧 잡혀 쓰시마섬으로 유배되었고, 병을 얻어 순국했다.

 

 

 

送金修撰宗直作宰咸陽 二首

 

智異山高萬丈長 : 지리산 높이 솟아 올라 만 길이나 거대한데

山藏古郡號咸陽 : 그 산속에 묻힌 옛 고을 함양이라 부른다네.

花長舊刹嚴川路 : 화장사 옛 절터 지나서 엄천으로 가는 길에

翠竹茅茨是故鄕 : 푸른대밭 띠집 있는 곳 거기가 내 고향일세.

 

 

☞ 강희맹(姜希孟, 1424~1483) 자는 경순(景醇), 호는 사숙재(私淑齋), 국오(菊塢), 운송거사(雲松居士) 조선 전기의 문신. 뛰어난 문장가이며 공정한 정치를 하여 세종과 성종 때 모두 총애를 받았다. 1447년(세종 29) 18세에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했다. 1473년 병조판서가 되고 1482년에는 좌찬성에 이르렀다. 부지런하고 치밀한 성격으로 공정한 정치를 했고 박학다식하다는 말을 들었다. 소나무 및 대나무 그림과 산수화를 잘 그렸다고 알려져 있는데, 현재 일본의 오쿠라 문화재단에 <독조도>가 남아 있다. 신숙주 등과 함께 <세조실록>, <예종실록>을 편찬했다. 저서로는 농업에 관한 <금양잡록>, 해학을 모은 <촌담해이> 등이 전하고 있다.

 

※ 사숙재의 내 고향(吾鄕, 원제 : 送金修撰宗直作宰咸陽 二首) 시는 김종직이 함양군수로 부임할 때 사숙재가 한양에서 전송 시로 지은 것이다. 김종직이 함양군수에 임명된 것은 성종 1년(1470년) 40세 때 12월 말이니, 다음 해 1월 부임 행차 때(1471년, 성종 2년, 1월쯤) 지은 것으로 보인다. 오도재의 입석 조형물에는 뜬금없이 '내 고향(吾鄕)'으로 각색되어 소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