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천면 강청리 섬말(도촌) 짚신문학 기념비
소재지 : 경남 함양군 마천면 강청리 도촌 571-3
행적자 : 오동춘 박사 창립 연대 : 1999년 3월 1일(제80주년 3.1절)
건립 시기 : 2019년 10월 9일 제573돌 한글날 세운이 : 짚신문학회 회원 일동
[개요]
오동춘 박사는 1937년 부 오문달 님과 모 하정임 님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1944년 8살 때에 부모님을 따라 일본에서 귀국하여 아버지의 고향인 마천면 도촌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마천초등학교와 함양중학교 졸업하고, 1954년 서울 용문고등학교에 수석 입학하였다. 연세대학교 국문과에 진학하여 외솔 최현배(1894-1970) 박사, 한결 기윤경(1894-1969) 박사에게 한글사랑 나라사랑 정신을, 청록파 시인 박두진(1916-1998) 교수를 통해 순국 시인 윤동주의 시 정신을 배웠다.
1962년 1월 22일 연세대를 졸업하고, 해병대에 입대 만기 전역을 한 후 교육계로 진출했다. 중·고등학교에서 약 30년간 교편을 잡고 연세대학교 교육대학원 교육학 석사(1974), 한양대에서 문학석사(1982), 문학박사(1990)를 취득하며 대학으로 진출, 연세대, 한양대, 광운대, 한경대, 총신대, 서울여대, 성신여대 인하공전 등 여러 대학에 출강했다. 마천초등학교 시절부터 글짓기를 좋아했고 중·고등학교 시절, 대학시절에도 창작에 몰두했다. 대신고교에서 교편을 잡을 때 첫 시조집 《짚신사랑》을 발간했다. 1972년에 발행된 이 송골 시조집으로 정식 문단에 등단하였다. 이 시조집 속의 연작시 17편은 다른 문예지에 발표된 짚신작품 연작시 3편과 함께 1978년도 제2회 흙의문학상 수상작이 되어 문공부장관상(당시 김성진 장관)을 받았다. 이밖에도 한글 공로로 국무총리표창 2회(1990, 2016), 제15회 노산문학상(1990), 제3회 장로문학상(2003), 제27회 외솔상(2005) 등을 많이 받았다. 2018년도 팔순 시조집은 《짚신인생 나라사랑》인데, 짚신 소재의 시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발행 송골 시조집이 19권에 이르고, 《한알의 밀알이 되어》 등 수필집 5권을 발행하였다.
1999년 3월 1일 80주년 3·1절 날 연세대 사회교육원 문창 과정 연세대 7기와 8기 문창과정을 수료한 제자들과 광화문 한글회관 강당에서 짚신문학회를 창립하였다. 세종정신, 3·1정신, 짚신 정신을 기본 사상으로 하며 우리말 우리글 우리 얼 사랑의 문학단체로 짚신문학회를 조직한 것이다. 그간 짚신문학 22호까지 발행하고 짚신 시낭송 68회, 제21회까지 짚신문학상 시상, 청소년를 위한 시낭송 10회, 시화전 4회 등의 활발한 활동 업적을 남겼다. 2021년도 10월 6일 함양 상림공원 사운정에서 575돌 한글날 기념 및 함양 산삼 항노화 엑스포 기념 제68회 짚신 시낭송회를 열었다.
2019년 3월 1일은 3·1절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짚신문학회 창립 20돌이 되는 해이다. 2019년 한글날에 짚신문학회 임원회에서 경남 함양군 마천면 강청리 도촌 마을 곰달비산 기슭에 짚신창립 20돌 「짚신문학기념비」를 세웠다. 오동춘 회장의 중·고교·대학 제자들 중심으로 한글단체와 마천 고향 후배 일부 문단 문인들이 기꺼이 후원하여 약 3천만 원의 예산을 마련하였다. 회원 36명과 비회원 34명이 찬조하였다. 보령 석공예가 김유제 시인이 8톤의 자연석으로 「짚신문학기념비」를 제작하여, 2019년 9월 30일에 마천 섬말 도촌마을 언덕에 세웠다. 비석 앞에는 위에 작은 글씨로 「한글사랑 나라사랑 짚신사랑」이라 새겼다. 그 밑에 비석 위치를 알리는 「마천 섬말」이라 새기고, 한가운데 큰 글씨로 「짚신문학기념비」라고 새겼다. 그 아래에는 작은 글씨로 「짚신창립 20돌 기쁨으로 세우다」, 그 밑에 세운 날짜 「2019년 10월 9일 제573돌 한글날」 이렇게 새겼다. 그리고 비석 뒤에는 짚신문학회 임원과 찬조자 이름을 새겼다.
내가 보고 듣고 겪은 마천 공비 현황
오동춘 박사 (마천 도촌 출신 마천초등 17회 졸업)
1. 마천에 들이닥친 공비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 주둔해 있던 14 연대 중에 지창수 인사계 상사, 김지회 중위(육사 3기), 홍순억 중위(육사 3기) 세 사람과 40여 명의 남로당 군인들이 제주 4.3 폭동을 진압하라는 정부의 명령을 거부하고 여·순 반란 사건을 일으켰다. 반란군은 한때 여수 순천을 완전히 장악하고 보성, 광양, 남원의 일부까지 세력을 확장했으나 정부가 파견한 토벌군 사령관 송호성 준장 지휘로 9일 만에 모두 수복되고 반란군은 지리산으로 도피하여 공비가 되었다.
이 지리산 공비들의 일부가 마천면 백무동에 본부를 차려 두고 인근 마을인 강청, 도촌, 실덕, 뇌전, 삼정 등에 나타나 식량을 탈취해 갔다. 어느 날 낮에 도촌에 온 공비들이 당시 도촌 구장(이장) 일을 맡았던 강화춘 씨(후에 민선 면장 지냄) 댁 재산을 모두 몰수해 갔다. 그 어느 밤에 식량 탈취 차 도촌에 온 공비 하나가 우리 집 안방에 들어왔다 국민(초등) 학교 4학년인 내 눈에 너덜너덜하게 다 떨어진 군복을 걸친 공비는 M1 소총으로 옷걸이에 걸린 아버지의 여름 홑바지를 건드리며 나의 어머니에게 “우리가 누군지 압니까?”라고 물었다. 어린 누이동생을 안고 있는 어머니가 약간 겁에 질린 채 “우리가 누군지 어째 알겠는기요”라고 대답하자 공비는 “반란군이요. 반란군!”이렇게 정체를 밝히고 집을 나갔다.
도촌에는 공비들이 강화춘 구장과 유일하게 도촌 기와집에 사는 강구옥(일명 강주언)씨 두 사람을 지역의 반동분자로 낙인찍고 수시로 잡으러 도촌을 찾아왔다. 강화춘 씨는 마천 지서 근처 한 여관에 머물며 공비를 피해 살았기 때문에 목숨을 잃지 않았다. 그러나 강구옥 씨는 도촌에서 공비가 습격 오면 재빨리 피신하곤 했다. 그러나 1949년도 1월 어느 날 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사랑방에서 바둑을 두고 있을 때, 느닷없이 공비가 들이닥쳤다. 날쌘 동작으로 피해 도망을 치다가 도촌 입구를 지키던 공비에게 끝내 잡히고 말았다 분명 살해했을 것으로 보고 도촌마을 사람들이 눈 쌓인 주위 야산을 사흘간 헤맸으나 강구옥 씨 시신을 찾지 못했다. 일주일 후에 삼정리 뒷산 영원사로 가던 스님 한 분이 영원사 절 입구 바위 아래 시체 하나가 보인다는 기별이 와서 도촌 마을 사람 몇 사람 달려가 보니 아주 비참하게 살해된 강구옥씨 주검을 보았다. 나의 아버지 오문달 님에게 직접 들은 사실이다. 도촌 마을 논바닥에서 장례를 준비하여 당시 자기의 목화밭 도촌 뒷동산에 묻혔다. 강구옥 씨 이름은 반공 투쟁 애국자로 마천 도계 공원 충혼탑에 새겨져 있다.
도촌 마을 적색 사상 소유자로 활동했던 박또개비 형제는 행방불명이 되었다. 그리고 강화춘 씨의 아우 강ㅇㅇ 씨가 6.25 중에 마천 인민위원장으로 부역하여 지리산 공비 활동을 하다가 8사단의 지리산 전면 토벌 작전에 생포되어 대전 감옥에 5년 형을 살고 나왔다. 형제간에도 좌와 우로 나누어졌던 한 사례가 되겠다. 도촌이 당한 공비 피해는 인명 살상까지 컸다.
다음은 마천 지서가 공비 습격당한 내용을 말하겠다. 반란군 주모자인 김지회(육사 3기) 홍순억(육사 3기)이 삼정리 양정 부락을 거쳐 마천 지서 습격에 나섰다. 여·순 반란 사건이 발생한 지 2개월이 되던 1948년 12월 19일 김지회 홍순억 일당은 M1 소총을 어깨에 메고 총끝에 태극기까지 달고 “양양한 앞길에” 군가까지 부르며 도촌에서 보이는 실덕 앞길 신작로 길로 씩씩하게 행진에 가던 모습을 나는 보았다. 든든한 국군 행진으로 생각했다. 한참 있다가 콩 볶는 소리가 땅벌(가흥리) 쪽에서 들려왔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으로 어린 나는 짐작했다. 오전에 보았던 모습으로 김지회 홍순억 반란군 일당은 삼정리로 가서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뒤에 알게 된 피해 상황으로 반란군 공비 일당은 그날 가흥교 다리목에 보초를 선 주민 자치대 민보 단원 한 사람을 뒤로 손을 묶어 전선주에 매 두었다. 그 길로 마천 지서에 이른 공비들에게 난로가에 앉아 있던 순경 4명이 목숨을 잃었다. 공비들은 민간인들에게도 총질을 했다. 당시 연초 매상 일을 보던 함양 거창 전매서 직원 6명이 사살되었다. 사망자는 손인도(함양 연초조합 이사), 양판주(거창전매지국 서무과장), 박인호(거창전매지국 판매과장), 허판천 (함양연초조합 기수), 임갑수(함양연초조합 기수), 정철상(함양연초조합 기수) 등 6명의 귀한 목숨이 희생된 것이다. 이 아수라장 총질 속에 마천초등학교 4학년 박용석 군이 유탄을 맞고 숨졌다.
2. 내가 들은 일화 세 가지
일화 하나-공비가 살려 준 민보 단원
마천 지서 습격 차 다리목 초소에 이른 공비들은 퇴각 길에 전선주에 묶어 두었던 민보 단원 한 사람을 두 손을 뒤로 묶은 채 삼정까지 끌고 갔다 그때 공비 하나가 큰 소리로 “이 땅개 새끼 제가 쏴 죽이고 가겠습니다. 저한테 즉결 처분하게 해 주십시오!” 대장은 ”응 그렇게 해, 동무가 즉결처분하고 따라와 “ 하는 대장의 즉결처분 명령을 받은 한 공비는 ”이 땅개 새끼 이리 와 “라고소리치며 근처 나무에 다시 매어 두고 그 공비는 공중을 향해 M1 소총 한 방을 탕 쏘았다. 그리고 그 현장을 떠났다. 끌고 온 민보 단원을 재빨리 기지를 발휘하여 자신이 즉결 처분자로 허락받고 한 생명을 살려 준 것이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그 공비와 민보 단원은 일본에서 이웃으로 함께 살았던 아는 사이였다고 한다. 좌우익을 떠난 인간 사랑으로 훈훈한 느낌이다.
일화 둘-변소로 피해 살아난 순경
마천 지서 습격 온 공비들이 다리목에서 만난 민보 단원을 묶어 전봇대에 묶어 두는 것을 본 순경 하나가 심상치 않은 모습을 보고 즉시 초소로 가던 발길을 돌려 지서로 달아나다가 뒤쫓아오는 공비에게 붙잡힐 위기를 느껴 신작로 길가 변소 수앙(큰 똥통)에 풍덩 빠져 머리 위를 지푸라기로 가렸다. 변소까지 뒤쫓아 온 공비는 “어! 이 새끼 어디로 갔어”라고 한마디 하더니 포기하고 변소를 나갔다. 공비 일당이 물러간 뒤 수앙에서 똥투성이로 빠져나와 근처 흐르는 임천강 냇물에 몸과 옷을 씻고 씻어도 똥 냄새가 가시지 않더라는 이야길 들었다. 그 순경도 공비들에게 잡혀 죽을뻔했는데 잘 피해 겨우 살아났던 것이다.
일화 셋-M1 소총 8발 맞고 살아난 면서기
도촌 마을 건너 강청 마을 출신으로 도촌 출신 나의 막내 숙부 오문환 님과 마천초등학교 6회 동문 허문오 님을 서울 돈암동 숙부 댁에서 만난 일이 있다 1954년 가을 무렵이다. 그 무렵 마천 면서기를 지내고 인월 동면 부면장을 역임하고 서울로 온 허문오 님이 고향 친구 오문환 집을 찾아온 것이다. 어느 일요일 오전에 나와 그때 아저씨로 부르던 허문오 님과 돈암동 동도 극장 근처 목욕탕에 함께 갔다. 옷 벗은 엉덩이를 보니 커다란 흉터가 보였다. “왜 그렇게 큰 흉터가 엉덩이에 있느냐?”라고 물었는데, 허문오 아저씨는 목욕탕 안에서 내게 생생하게 들려주셨다.
1948년 12월 19일 공비들이 마천 지서를 습격하며 민간인들에게도 총질할 때였다. 그 급박한 상황에 면서기 완장을 찬 채 마천 지서 근처 개울 위를 가로지른 조그만 돌다리 밑에 면서기 완장이 밖으로 내보인 채로 쪼그리고 앉았는데, 많은 총소리가 요란한 중에 자신의 엉덩이가 뜨끈뜨끈하더라는 것이다. 공비가 물러간 뒤 축축한 엉덩이에 피가 쏟아지는 것을 느낀 허문오 님은 다급한 한 위기감에 당황하여 “사람 살려라.” 소리치고 개울에 숨어 있던 농부들의 머릿수건을 모아 상처에 지혈을 시키고 면사무소에 온 트럭에 실려 함양 박애병원으로 간 것이다. 더욱 안전 지혈과 간단한 치료를 받고 마산에 있는 큰 병원에 입원 치료를 받았다고 한다. 허문오 님은 마천 땅벌 돌다리 밑에 앉아 공비의 M1 소총 8발 총알을 다 맞은 것이다. 그래도 살아났다.
총을 맞은 엉덩이 구멍 난 상처에 소독한다고 의사와 간호사가 소독약 묻은 붕대를 끼워 넣어 양쪽에서 왔다 갔다 잡아당길 때 죽음과 같은 고통을 느꼈다고 했다. 당시 마천면 서기 허문오 님은 공비의 M1 소총 8발을 다 맞고도 살아난 의지와 신념의 사나이가 아닐 수없다. 서울 돈암동 목욕탕에서 당시 강문고(현 용문고) 1학년 오동춘 학생에게 공비에게 총 맞은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려주시던 허문오 님 모습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현재 마천 원방장학회 이사장을 맡고 있는 허태오 님의 맏형님 되시는 어른이 허문오 님이다.
3. 마천 곰달래산 전투
곰달래산은 지리산의 한 봉우리로 도촌마을 뒷산이다. 800m의 산 높이를 가지고 있다 이 산에 숨어 있는 공비토벌 작전이 1948년 12월 16일에 있었다. 3 연대(진주),15 연대(마산)로 구성된 토벌군이 민보단 박계원 등의 길잡이를 앞세워 진격해 정상을 향해 올라갔으나 망원경으로 지켜본 공비들이 유효사거리 지점에서 중무기(기관총)로 토벌군을 공격했다. 얼떨결에 전투준비가 부실했던 토벌군의 인명 피해가 컸다. 그러나 곰달래산(일명 웅달산) 건너 위치한 백무동 공비 아지트를 완전히 불을 질러 없애버렸다. 곰달래산 기슭에 위치한 도촌에 콩 볶듯 요란한 총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들었다 저녁 무렵 하산하여 내려오는 군인들을 보았다.
도촌마을 위쪽에 있는 강화춘 씨 댁 그리고 우리 집 근처 논바닥에 군인들이 청솔 모닥불을 피워놓고 5, 6명의 군인들이 불을 쬐고 있었다. 나도 불을 쬐며 곁에 당거에 누워있는 군인 시체와 입에 총 맞은 군인도 보았다. 총상 입은 군인은 누가 눈(雪)을 이야기하니 눈 한 움큼 먹게 해 달라고 애원을 했다. 소위 계급 단 장교가 누가 눈(雪) 소리를 했느냐고 주변에 둘러선 부하들을 나무라고 총 맞은 군인에게 치료 없이 눈 먹으면 너는 금방 죽게 된다. 저 건너 송알 신작로에 대기 중인 군 트럭을 타고 병원 치료 후 물을 먹어야 살 수 있다며 친절하게 그 병사를 타일러 주었다.
전투 경찰로 곰달래산 800 고지 전투에 참여했던 전투 경찰 하나도 볼을 관통하는 총을 맞고 살아난 것은 자기가 조상의 덕이라 말하며 동료에 의지한 채 고통을 참으며 불을 쬐고 있었다. 많은 전사 시체를 민보 단원 동순호(원정), 표태평(강청), 박계원(실덕), 이동근(가흥) 등 30여 명이 도촌으로 운반하여 송알 신작로 군용 트럭에 실었다. 800 고지 전투가 끝난 뒤의 토벌군 군인들의 모습 일면을 나는 도촌 우리 집 앞 논바닥 모닥불 함께 쬐며 생생하게 보았다. 곰달래산은 내가 어렸을 때 나의 고모 오경남 처녀와 현 나드리 농원 사장 신평수 어머니 강두김 처녀 둘이서 나를 데리고 나물 뜯으러 갔던 산으로 내 유년 추억이 깊은 고향마을 산이기도 하다.
注 곰달래산은 오공산(문헌에는 蚣達飛山)
4. 마천초등학교에 불 지른 공비들
1949년 1월 30일에 단층 목조건물 나의 모교 마천국민학교가 불타버렸다. 음력 설날 무렵 마천 여러 동네에서 대접해 온 음식을 먹고 학교 교실에 3 연대 대대 병력 토벌군이 잠든 틈을 노려 공비들이 습격을 감행한 것이다. 정신을 차리고 습격 온 공비를 물리치긴 했으나 탄약, 무기 등을 빼앗기는 큰 손실을 입었다. 퇴각하면서 공비들이 기름을 끼얹고 학교에 불을 질러 일제강점기 건축된 학교가 다 타버렸다. 도촌에서 밤에 마루에 나와보니 땅벌 하늘이 벌겋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나는 아침 일찍 학교에 가 보았다 새까만 잿더미 속에 불에 녹은 유리 조각이 나뒹굴고 있었다. 5년을 짚신 신고 다닌 정든 모교였다. 학교를 잿더미로 만든 공비들이 얄미웠다. 학교 화재로 교실에서 잠결에 나오지 못한 군인들의 인명 피해도 컸다 항상 긴장된 방어태세가 없으면 적의 기습을 받게 된다는 교훈을 느끼게 했다. 나의 6학년 담임 선생님이던 등구 출신 서재익 선생은 지리산 공비와의 내통자로 의심을 받아 총살 직전까지 같으나 3 연대 안에 달성 서 씨 대위 장교 종씨라는 것을 알게 되어 총살 직전에 살아남은 실화가 있다. 마천초등학교 동창회 4대 회장 무렵 1996년도 8월 어느 날 마천 찻집에서 선생님께서 들려주신 일이 있다.
난데없이 공비가 학교에 불을 질러 교실을 잃은 어린이들이 공부할 장소가 없었다. 3개월 휴교였다 그동안 나는 강청 표 씨 댁 서당에서 천자문을 배웠다. 3개월 휴교 후에 양채용 교장선생님을 비롯한 학교 당국과 면 유지들 노력으로 면사무소 공간 일부, 임업시험장, 숯 창고,면장 사택 등 6개 임시교실을 마련하여 마천국민학교가 가을쯤 개교했다. 우리 6학년은 면사무소 누에고치를 받는 장소가 교실이 되고 그 옆에 교무실이 있었다. 양채용 교장선생님이 곧 석복국민학교로 전근을 가시고 잠시 계신 김생규 교장 선생님 뒤를 이어 3대 염동석 교장선생님이 부임해 오셨다.
열악한 교육환경 속에서 6학년 학생들은 열심히 공부했으나 1950년 5월 함양중학교 입학시험에 10여 명 응시자 모두 합격하지 못했다. 당시 김경도 제헌국회의원이 공비가 학교에 불을 질러 제대로 공부를 할 수 없었던 점을 감안하여 4명을 입학시키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함양중학교에 건의하였다. 한중환 교장 선생님과 백질갑 교감 선생님을 비롯하여 학교 당국이 수용하여 마천초등학교 출신 4명이 함양중학교 입학 7회 졸업생이 되었다. 성적 순위로 뽑지 않고 배경과 연고 순으로 뽑혀 비판도 따랐다 그 뒤 다시 학교의 배려로 2학기에 4명 추가 입학을 허락하여 마천초등학교 17회 출신 8명이 모두 함양중학교 졸업생이 되었다.
마천초등학교 제17회 함양중학교 졸업생 명단은 다음과 같다. 곽대근<경북사대 졸업>, 오동춘<연세대 국문과 졸업>, 양정환<동국대 상대 졸업>, 서정철<함양도서관장 역임>, 정재진<마천중학교 교사 역임>, 김종섭<마천초등학교 김종수 선생의 아우>, 임종근<임명근 마천 유지 아우>, 서정부<작고 마천초등학교 서재익 선생 집안 아우>이다.
재경 마천향우회 전신인 마향회(회장 오동춘)에서 당시 마천초등학교 박영근 교장선생님과 학교 후원회장 허태오님 요청으로 1976년 4월 5일 곽재희 박병주 두 회원으로 하여금 앰프시설을 직접 운반 전달하여 기증함으로써 교내 방송시설이 완비되어 학교 교육에 크게 이바지했다. 면소재지인 가흥리에 있던 마천국민(현초등)학교는 1970년대 마천면 마천 삼정로126번지로 옮겨 2층 콘크리트 건물로 잘 건축되어 있다.
참고 : 마천면사편찬위원회 문호성위원장님이 발굴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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