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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목(李穆, 1471~1498) 짧게 굵게 산 곧은 선비

도솔산인 2021. 6. 2. 09:41

이목(李穆, 1471~1498) 짧게 굵게 산 곧은 선비

 

 

1.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말은 한다.

 

한재(寒齋) 이목(李穆, 1471~98)은 조선조 중기 무렵, 사화가 가장 치열하게 일어나던 시대에 살았다. 사화란 기골에 찬 선비들이 묵은 세력을 도려내고 새로운 정치와 기풍을 일으키려다가 떼죽음을 당한 것을 말한다. 이들은 개혁정치를 이루어 보려고 기성세력에 맞섰다. 그야말로 젊은 기백으로 일신의 안녕을 돌보지 않고 싸운 것이다.

그러면 기성세력은 어떤 부류인가? 그 당시 높은 벼슬을 대대로 누리며 떵떵거리면서 살아오던 훈구파와 언제나 왕의 주위에 몰려 이권을 낚아채는 왕비의 피붙이인 척족세력이었다. 이들이 계속 기득권을 누리고 더 많은 이권을 차지하기 위해 왕을 꼬드겨 패기에 찬 학덕 높은 사류들을 몰아서 죽인 것이다. 이목도 바로 이런 사류의 한 사람으로, 스물여덟 청년의 나이로 비명에 갔다.

그는 전주 이씨였는데 그의 할아버지나 아버지는 그리 높은 벼슬을 하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도 직장이라는 낮은 벼슬을 지낸 홍맹부의 딸이었다. 그는 어떤 연유인지는 모르지만 영남학파의 거두인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어릴 적부터 학문을 익히기 시작했다. 김종직은 그때 온 나라에 명망을 떨치던 학자였다. 김일손(金馹孫) · 정여창(鄭汝昌) 같은 훌륭한 청년 학자들이 점필재의 문하에서 배출되었다.

이목의 호는 한재인데, 어느 때부터 받아 썼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김종직에게서 호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 김종직의 문하에서 그는 선배격인 정여창 · 김굉필(金宏弼) 그리고 김일손 등과 어울려 학문을 토론하고 사물에 대해 새롭게 눈을 떴다. 이들의 사귐은 한 시대의 학풍을 이루는 것이었으나 한편으로는 그의 생애를 불행으로 몰아 넣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는 뛰어난 글 재능을 지니고 18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했다. 이어 성균관에 들어 시무(時務)에 관한 지식을 본격적으로 익히기 시작했다.

이목이 성균관에 있을 때에, 마침 성종은 병환으로 몸져 누워 있었다. 대비인 안순왕후(예종의 계비)는 무녀를 시켜 몰래 성균관 벽송정(壁松亭) 아래에서 제사를 지내고 기도를 드리게 했다. 이 사실을 안 이목은 동료 유생들을 데리고 가서 제사를 중단시키고 무녀에게 곤장을 쳤다. 무녀는 대비에게 억울함을 호소했고, 대비는 또 성종에게 일러바쳤다. 성종은 짐짓 성을 내며 그 일을 저지른 유생들의 명단을 바치라고 호령했다. 성균관 유생들은 큰 벌이 내릴까 두려워서 모두 도망쳤다. 그러나 이목은 꼼짝도 않고 방을 지켰다. 이 사실을 안 성종은 그에게 특별히 술을 내리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때부터 그의 꼿꼿함을 임금도 알게 된 것이다.

 

 

2. 그대는 이 늙은이의 고기가 먹고 싶은가.

 

그 뒤 여름 내내 가뭄이 심하게 들었다. 이때 이목은 권신인 윤필상이 정치를 그르친 탓이라고 하면서 “윤필상을 삶아 하늘에 제사를 지내야 비가 내릴 것이다”라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조정의 모든 벼슬아치들이 그 대담함에 깜짝 놀랐고, 젊은 그의 기개를 칭찬해 마지않았다. 어느 날 길을 가다가 이목이 윤필상과 마주치자, 윤필상이 그를 불러 세웠다.

“그대는 이 늙은이의 고기가 먹고 싶은가?”

그는 아무 대꾸 없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 버렸다. 윤필상은 그 오만한 태도에 울화가 치밀어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틈만 있으면 이목을 내몰 궁리를 했다.

윤필상이, 대비가 부처를 섬기는 일을 따라야 한다며 임금에게 권고한 사실이 발각되자, 이목은 또 유생들을 이끌고 윤필상을 간악한 귀신이라고 지적하는 상소를 올렸다. 임금이 크게 성이 나서 그에게 죄를 주려고 했으나 우의정인 허종(許琮)이 그의 인물됨을 아까워하며 임금에게 그를 구해 줄 것을 간청했다. 그의 도움으로 큰 벌을 받지 않고 공주로 유배되는 정도에 그쳤다. 그러나 그의 명망은 이때부터 조정뿐만 아니라 온 나라에 울렸다.

그는 성균관에 있으면서 여러 편의 시무책을 지었는데, 한결같이 임금이 덕을 닦고 나쁜 신하를 멀리해야 한다는 뜻을 담았다. 그리하여 임금도 그를 유달리 아꼈지만 과감히 대신에게 맞서는 그를 귀양 보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얼마 뒤 귀양에서 풀려났고 문과에 장원했다. 그의 나이 24세, 참으로 앞날이 보장된 창창한 청년이었다. 그는 성균관 전적이라는 벼슬을 받았다가 곧이어 평안도 평사라는 직책을 맡아 중앙에서 쫓겨났다.

원래 언관이나 사관은 곧고 바른 청년 문사들을 시킨다. 그래야만 과감하게 임금이나 대신의 잘못을 지적하고 실록 같은 역사책을 기록하면서 조금도 사정(私情)을 두지 않고 사실을 기록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언관이나 사관이 되지 못했다.

 

 

3.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죽다.

 

그가 벼슬살이를 할 당시는 저 희대의 폭군인 연산군이 왕위에 있었다. 그리고 그의 선배인 김일손이 사관으로 있었다. 김일손은 곧은 붓끝으로 권력을 쥐고 횡포를 부리던 이극돈(李克墩) 등의 비행을 낱낱이 실록에 기록했다. 이 사실을 안 이극돈이 자기와 관련되는 사실을 빼 달라고 부탁했지만 어림도 없는 말이었다. 김일손은 그의 부탁을 두말할 나위 없이 거절했다.

이에 이극돈은 김일손 일파의 잘못을 찾기에 혈안이 돼 있었다. 한편 김일손은 사관으로 있으면서 스승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吊義帝文)〉을 사초에 올렸다. 그 글 내용은 중국의 초나라 장수인 항우가 어린 의제를 죽이고 왕의 자리를 빼앗은 것을 비웃고 의제의 혼을 위로한 것이었다.

이 글을 사초에 실은 의도는 어디에 있었을까? 말할 것도 없이 어린 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위를 빼앗은 세조를 비유해서 쓴 것이다. 이 사실을 알아낸 이극돈이 연산군에게 일러바쳤다. 연산군 또한 자기의 행동을 낱낱이 지적하고 간언을 일삼는 이들 선비가 못마땅하던 참이었다. 임금은 즉각 이들을 잡아들였지만 특별한 죄가 있을 턱이 없었다. 이들은 결국 아무 죄도 없이 떼죽음을 당했다.

저 변방인 평안도에서 평사라는 한직에 있던 이목은 김일손 등이 쓴 역사기록에 참여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그는 한 패거리라는 이유만으로 서울로 잡혀 와 죽음을 당했다. 그는 형장으로 끌려가면서도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고 노래 한 곡조를 지어 부르고 난 뒤 칼을 받았다.

그가 젊은 나이로 죽게 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불의와 한 치도 타협하지 않을 뿐 아니라 불의를 저지른 자는 어느 누구든 맞서는 그의 기질 탓이었다. 그는 상대가 비록 권신일지라도 조금도 타협하지 않았다. 무오사화가 일어났을 때에 평소에 원한이 있던 윤필상이 무고한 그를 끌어넣었다고 한다. 윤필상은 그가 사형당한 것으로도 모자라 갑자사화 때 또다시 그에게 사지를 찢어 죽이는 능지처참(陵遲處斬)을 내리게 했다.

다른 하나는 신진 학자들과의 사귐이었다. 그가 김종직의 문하에서 정여창이나 김일손 같은 학자들과 어울리지 않았더라면 화를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학자들의 꿋꿋한 행동은 여러 차례 사화를 불러왔고, 중종시대의 조광조 일파에게까지 이어졌던 것이다.

 

 

4. 산수와 벗하며 살기를 원하다.

 

그가 남긴 글을 보면 크게 두 가지 내용을 담고 있다.

하나는 현실에 대해 과감히 맞선 것이다. 그는 “덕을 닦는 자는 일어나고 덕을 거스르는 자는 망한다”는 논지를 펴 임금에게 경고했다. 또 여자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는 논지를 펴서 왕비와 척족세력에 대한 강한 견제를 시도했고, 탐관오리를 뱀에 비유하여 그 간악함 · 교활함을 말하고 탐관오리를 뱀잡듯 잡아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하나는 세상을 조용히 관조하며 살아가는 삶을 노래했다. 그는 ‘차(茶)’를 무척 즐겼다. 이런 취미는 이태백이 달을 좋아한 것과 같은 것으로, 차를 통해 자신의 열정 어린 내면세계를 침착하게 가다듬었던 것이다. 그는 또 ‘허실생백(虛實生白)’을 노래했다. 곧 마음을 비우면 그 속에서 깨끗함이 우러난다고 했다. 온갖 명리를 떠난 무욕의 경지를 탐구한 것이다.

그가 공주에서 귀양살이를 할 때에 지은 시구를 보자.

 

이 생애는 어려운 세상을 만났으니
어느 강호에 산들 즐겁지 않으랴
푸른 물결 위에는 밝은 달이 비치고
푸른 산 머리에는 백운의 관이 씌웠네
내가 여기에 와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니
어찌 인간이 슬퍼하고 기뻐함을 알랴

 

이 시는 산수와 벗하여 조용히 살아갈 것을 노래한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투철한 대결의식으로 정치의 희생물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가 죽은 뒤에는 중종반정 이후 모든 명예가 회복되어 뭇 선비들에게 하나의 귀감이 되었다. 선비정신이 투철한 그는 짧고 굵게 산 표본이었다. 이런 위인의 삶은 뒷사람들의 귀감이 된다. 하지만 권력과 이권을 좇아 더러운 삶을 산 사람들은 우리에게 무슨 교훈을 남겼을까?

 

출처 : 이이화의 인물 학국사

 

 

☞ 이목(李穆, 1471~1498)

 

조선의 문신이다. 자는 중옹, 호는 한재,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연산군문과에 장원 급제하였으며, 일찍이 김종직에게 글을 배웠다. 태학에 있을 때, 성종이 병이 있어 대비가 무녀를 시켜 벽송정에서 기도를 베풀자, 이목이 태학생들을 데리고 가서 무녀에게 곤장을 쳐서 쫓아냈다. 후에 성종이 이 사실을 알고 노하여 당시의 유생들을 기록하게 하였다. 유생들은 모두 도망하였으나, 이목 홀로 도망하지 않아서 성종의 칭찬과 술을 받았다. 그는 늘 바른말 잘하기로 유명하였는데, 이로 인해 공주에 유배된 적도 있다.

 

무오사화, 윤필상의 모함을 받아 김일손·권오복 등과 함께 사형을 받았는데, 형장에 나갈 때 조금도 안색이 변하지 않고, 스스로 절명(絶命)의 노래를 지어 죽으니 그때 그의 나이 28세였다. 그는 일찍이 공주에 귀양 갔던 인연으로 공주의 인사들이 충현서원을 세우고 제사하였다.

 

출처 :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