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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산문 505] 혼자서 갈 수 있는 용기

도솔산인 2017. 11. 17. 20:44

[고전산문 505] 혼자서 갈 수 있는 용기

 

번역문

조정에서 선비들의 논의가 나뉜 뒤로 붕우의 도리를 어찌 끝까지 지킬 수 있겠는가? 벗 사귀는 도리는 하나인데 어찌하여 둘로 나뉘었는가? 둘도 오히려 불행한데 어찌하여 넷이 되고 다섯이 되었는가? 하나인 도리가 넷, 다섯으로 나뉘어 줄을 세워 사당을 만드니 한 개인에게 저버림이 없을 수 있겠는가? 한 편에 들어간 사람은 각기 하나의 세력이 되어 나머지 네다섯 편과 적이 되니 한 개인이 외롭지 않겠는가? …… 나는 혼자다. 지금의 선비를 보건대 나처럼 혼자인 자가 있는가? 홀로 세상길을 가나니 벗 사귀는 도가 어찌 한 편에 붙는 것이겠는가? 한 편에 붙지 않으므로 네다섯이 모두 내 친구가 된다. 그런즉, 나의 교유가 또한 넓지 않은가? 파벌의 차가움은 얼음을 얼릴 정도지만 내가 떨지 않으며, 파벌의 뜨거움은 흙을 태울 정도지만 나는 불타지 않겠다. 될 것도 없고 안 될 것도 없으니, 오직 내 마음을 따르겠다. 내 마음의 귀결점은 오직 나에게 있을 뿐이다. 그 거취가 어찌 넉넉하고 여유있지 않겠는가?

 

원문

自朝家士論相携, 朋友之道, 能皆可保終始乎? 交之道一也, 緣何而爲二乎? 二猶不幸, 緣何而爲四爲五乎? 其爲一其爲四五者, 自比而遂私, 能無負於一人乎? 入於一者, 各自爲一, 與四五敵, 爲一人者, 其不孤乎? …… 余獨也. 視今之士, 其有若余獨乎? 以獨而行于世, 交之道豈泥于一乎? 一之不泥, 於四於五, 皆吾友也. 則吾之倫, 不亦博乎? 其寒凝冰而吾不慄, 其熱焦土而吾不灼. 無可無不可, 惟吾心之從. 而吾心之所歸, 惟一人而已, 則其去就豈不綽有裕乎?

 

유몽인(柳夢寅, 1559~1623), 어우집(於于集)』 「연경으로 가는 이정귀(자 성징) 영공에게 주는 글[贈李聖徵(廷龜)令公赴京序]

 

해설 

화이부동(和而不同)은 함께 어울리되 같음을 따르지 않는다는 뜻이다. 사람은 저마다 생각이 다르고 취향이 같지 않다. 그 차이와 다양성을 존중하며 조화를 이루어갈 뿐, 자신과 동일한 것으로 만들지 않는다. ()가 차이와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라면 동()은 무리를 짓거나 편을 갈라 내 편으로 만들려는 행위이다. ‘우리를 확인하기 위해 남을 내 편으로 만들려고 한다. 일심동체(一心同體)를 강조하고 내외(內外)를 따지는 사회에서 조직의 생각을 거스르기란 참 어렵다. 양심을 따라서 행동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하지만 조선 중기의 유몽인은 편 가르기에 동의하지 않고 외로운 길을 걸어갔다.

 

유몽인(柳夢寅)어우야담(於于野談)의 저자이다. 이름자 끝의 인()12간지의 하나인 호랑이[]를 상징한다. 그의 호 어우(於于)과장하며 자랑하는 모습이란 뜻으로 장자천지편에서 가져왔다. 공자를 비판하는 말로 쓰인 말을 자신의 호로 삼아 특정한 규범에 얽매이지 않고 나의 방식대로 살겠다는 뜻을 담았다. 그는 특정한 스승 밑에서 배우지 않고 홀로 사찰을 돌아다니며 공부하면서 자유로운 정신을 배워갔다. 31살에 장원급제했을 때 징비록의 저자인 유성룡은 그의 답안지에 대해 백 년 이래 처음 보는 기이한 문장이라고 극찬했다.

 

하지만 관직에 오르면서 그는 실망스러운 현실을 목도해야 했다. 당시 조선 사회는 붕당 정치가 형성되고 있었다. 붕당은 개인의 신념보다는 당파적 입장을 우선할 것을 요구했고 줄을 세워 무리를 지었다. 유몽인은 깊이 고민했을 것이다. 자신이 속한 집단의 생각에서 벗어나 양심을 따르는 삶은 고달프고 외로운 길이다. 왕따를 감수하는 것은 물론, 삶의 기반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당파의 이익을 따르지 않고 옳다고 믿는 길을 가기로 했다. 뜻과 생각이 맞는 사람이 있으면 당파와 신분을 가리지 않고 사귀었다.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 1564~1635)는 유몽인의 오랜 벗이었다. 둘은 젊은 시절 성균관에서 함께 공부하면서 가까워졌다. 조정에서 함께 일하면서 더욱 친해졌고 재상의 반열에 올라서는 한층 친밀해졌다. 성격도 다르고 직위도 달랐지만 뜻과 지향이 맞았다. 유몽인이 북인인 반면 이정귀는 서인이었다. 당색의 차이를 뛰어넘어 둘은 변함없는 신뢰를 맺어갔다. 주변에서는 따가운 눈총을 보내고 음해도 했을 테지만 둘의 우정은 평생 지속된 것으로 확인된다.

 

16043, 이정귀가 세자책봉주청사(世子冊封奏請使)로 중국에 사신을 떠나게 되었다. 윗글은 유몽인이 떠나는 벗에게 전별의 뜻을 담아 보낸 편지이다. 글에서 그는 당색으로 인해 생각이 둘로 나뉘고 넷, 다섯으로 쪼개지는 현실을 슬퍼한다. 사귐의 윤리도 당색에 따라 둘이 되고 넷이 된다. 개인의 이성과 상식은 사라지고 집단의 이념과 이익만이 강조된다. ‘나 하나 옳은 말 한다고 받아들여지겠어?’ 하는 마음에 자기 생각을 정지하고 집단의 견해를 따라간다.

 

그는 왜 혼자라 말하는가? 삶의 줏대를 곧게 세워 한 편에 빌붙지 않고 살겠다는 다짐이다. 이해관계에 얽매일 필요 없으니 푸른 것은 푸르다고 하고 붉은 것은 붉다고 말한다. 나를 얼게 만들거나 태우려는 눈초리들이 해칠 기회를 엿볼 것이다. 그러나 내 마음이 믿는 바를 따라 흔들림 없이 나아갈 것이다. 유몽인은 그렇게 다짐했다. ‘될 것도 없고 안 될 것도 없다는 말은 공자의 말이다. 공자는 말하길, “군자는 천하의 일에 대해 오로지 주장하지도 않고 그렇게 하지 않는 것도 없어서 의()를 따를 뿐이다.[子曰, 君子之於天下也, 無適也, 無莫也, 義之與比]”라고 했다. 단 하나의 견해만을 고집하지 않고 의리를 따라 행동하겠다는 마음가짐을 공자의 말을 끌어와 이야기한 것이다.

 

이후 유몽인은 정치 현실에 실망하여 벼슬의 뜻을 접고 고향으로 내려가 살았다. 왕이 불러 다시 벼슬살이를 했으나 북인(北人)이 인목대비 폐위를 주장했을 때 당파의 입장을 따라가지 않고 반대했다가 실각(失脚)했다. 5년 후 인조반정이 일어나 서인이 집권하자 이번엔 광해군 복위 운동을 꾀한다는 모함을 받아 죽임을 당했다. 광해군 시절엔 집권 세력인 북인의 견해에 반대했다가 죽을 위기까지 겪었음에도 서인이 권력을 잡자 북인이라는 이유로 역적으로 몰리고 말았다. 하지만 역사는 그를 다시 평가하기 시작했다.

 

170여 년이 흐른 정조 대에 이르러 그의 신원은 복원되었다. 신원을 하교하는 글에서 정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유몽인은 갈라져 싸우는 사악한 의론을 돌아보아 명예와 이익을 헌신짝처럼 내던지고, 기꺼이 강호 사이에 자신을 맡겼다.[顧乃岐貳凶論, 屣脫名利, 甘自放於山顚水涯之際]”

 

내 편이냐 네 편이냐를 따지고 내 편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세태는 예나 지금이나 비슷해 보인다. 힘을 이용해 약자를 지배하고 자신과 동일한 곳으로 끌어들이려는 욕망도 여전하다. 그러나 좋은 사람(군자)’은 함께 어울리되 한통속이 되지는 않는다. 차이와 다름을 인정해 줌으로써 공존과 화해, 관용과 평화의 세계를 만들어간다. 편을 가르지 않고 양심과 의로움을 지켜간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다.


글쓴이박수밀(朴壽密)
한양대학교 인문과학대학 미래인문학교육인증센터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