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盈科後進/고전향기

야산 이달 선생의 생애와 사상[펌]

도솔산인 2016. 1. 11. 08:58

 

야산 이달 선생의 생애와 사상

 


① 개요(槪要)

야산(也山)은 정역(正易)의 대가(大家) 일부 김항(一夫 金恒 : 1826~1898)과 함께 양대 산맥(兩大 山脈)을 이루는 근대 주역(近代 周易)의 대가(大家)로서 일제 강점기(日帝 强占期)와 해방(解放) 및 한국전쟁(韓國戰爭)의 격변기(激變期)를 살면서 주역(周易)이 무엇이라는 것을 직접 보여주고 간 인물(人物)이라 할 수 있는데, 두 사람의 특징(特徵)을 구분(區分)하자면 일부(一夫)가 후천개벽(後天開闢)에 초점(焦點)을 둔 거시적 주역(巨視的 周易)에 능통(能通)했던 반면, 상대적(相對的)으로 야산(也山)은 일상사(日常事)에 주역(周易)의 원리(原理)를 적용(適用)하는 미시적 주역(微視的 周易)에 능통(能通)하였으며, 그리하여 일부(一夫)에게서는 웅혼(雄渾)한 우주사(宇宙史)의 변천(變遷)이 느껴지는 반면, 야산(也山)에게서는 마치 시계바늘의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것 같은 정밀(精密)함이 감지(感知)됨

특히 전설적(傳說的)인 기인(奇人)으로서 일제(日帝)로부터의 해방(解放)과 한국전쟁(韓國戰爭) 발발(勃發)을 예견(豫見)했다고 알려져 있는 야산(也山)은 사승 관계(師承 關係)도 없이 혼란(混亂)하던 시기(時期)에 혼자 돌아다니며 독학(獨學)으로 일가(一家)를 이루었는데, 한국(韓國)을 중심(中心)에 놓고 주체적(主體的)으로 주역(周易)을 풀이함으로써 ‘야산역학(也山易學)’이라는 독창적(獨創的)인 학문 세계(學問 世界)를 정립(定立)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독창적(獨創的)인 주역 해석(周易 解釋)을 통해 이상세계(理想世界)를 구현(具現)하고자 했던 인물(人物)이기도 함


② 일생(一生)

1889년 지례 원터[지금의 ‘경북(慶北) 김천시(金泉市) 구성면(龜城面) 상원리’]에서 몰락(沒落)한 향반(鄕班)의 아들로 태어난 야산(也山)은 어릴 적 한문(漢文)을 배울 때부터 ‘김시습(金時習 : 1435~1493)의 화신(化身)’으로 불릴 만큼 명석(明晳)한 두뇌(頭腦)의 소유자(所有者)로서 서당(書堂)에서 글을 배울 때, “하늘 천(天)”하고 가르치면 “하늘이 무엇이냐”고 물었고, “천(天)은 음(陰)이다”하면 “음(陰)이 뭐요”하고 끊임없이 묻는 통에 훈장(訓長)이 못가르치겠다고 해서 서당(書堂)에서조차 쫓겨날 정도로 호기심(好奇心)이 강했는데, 그리하여 그때부터 독학(獨學)에 나선 야산(也山)은 주역(周易)의 이치(理致)를 깨닫기 위해 금강산(金剛山)ㆍ덕유산(德裕山) 등지를 돌며 공부에 매진(邁進)하였음

야산(也山)은 1919년 3ㆍ1독립운동(三一獨立運動) 소식을 뒤늦게 듣고는 김천경찰서(金泉警察署) 앞에서 만세(萬歲)를 부르다 잡혀 취조(取調)를 받기도 하였는데, 당시 야산(也山)을 둘러싸고 “주역(周易) 읽다가 미쳤다”는 소문(所聞)이 나돌았던 탓에 이내 풀려나기는 했으나 그 때부터 요시찰 대상(要視察 對象)이 되었음

40대에 접어들어 대구(大邱)로 나온 야산(也山)은 기미(期米 : 주식 형태(株式 形態)의 투기(投機))에 손을 댔다가 상당한 돈을 벌었는데, 주역(周易)에 통달(通達)했다는 소문(所聞) 탓으로 야산(也山) 주위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따라다녔기에 야산(也山)은 철원(鐵原)에 집단농장(集團農場)을 꾸미고는 그들을 데리고 그곳으로 이주(移住)한 후, 고대 정전법(古代 井田法)에 따라 공동 경작(共同 耕作)ㆍ공동 분배(共同 分配)를 실천(實踐)하는 이상촌(理想村)을 만들어보려 했으나 2년여 만에 실패(失敗)로 돌아가고 말았으며, 그 후에도 야산(也山)은 동료(同僚)를 통해 백정(白丁)들의 인권운동단체(人權運動團體)인 형평사(衡平社)에 자금(資金)을 보내거나 만주(滿洲)로 독립자금(獨立資金)을 보내주기도 했음

1930년대 이후 식민지(植民地) 전시 체제(戰時 體制)에서 일본 제국주의(日本 帝國主義)는 신사참배(神社參拜)나 동방요배(東方遙拜), 또는 묵도(默禱)를 강요(强要)했지만 야산(也山)은 절대로 이에 굴복(屈伏)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와 관련해서는 다음의 일화(逸話)가 전해오고 있음

하루는 대전역(大田驛) 광장(廣場)을 지날 때 마침 묵도(?禱)를 알리는 오포(午砲)가 울리자, 모든 사람들은 일제히 걸음을 멈추고 묵도(?禱)를 했지만 야산(也山)과 그를 따르는 제자(弟子)들은 태연히 걸어갔다.

이 광경(光景)을 지켜보던 역전 주재소(驛前 駐在所)의 순사(巡使)는 일행(一行)을 불러 세운 뒤, 왜 묵도(?禱)를 하지 않느냐고 힐문(詰問)하였다.

그러자 야산(也山)은 느닷없이 그 순사(巡使)의 뺨을 후려치며, “너야말로 묵도(?禱)는 하지 않고 길가는 사람들을 눈뜨고 쳐다보고 있었으니 혼 좀 나야겠다”고 소리친 뒤, 유유히 걸어갔다.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면서 제자(弟子)들을 가르치다가 1942년에 전북(全北) 이리(裡里 : 지금의 ‘익산시(益山市)’)로 이사(移徙)한 야산(也山)은 해방(解放)되던 해에 ‘이제 대격변(大激變)의 시대(時代)가 오는데, 이것은 주역(周易)만이 다스릴 수 있다’는 생각에서 가족(家族)을 대둔산(大屯山) 아래 수락리(水落里)에 옮겨두고 혼자 대둔산(大屯山) 석천암(石泉庵)에 자리잡은 채, 108명의 제자(弟子)를 가르치며 태극사상(太極思想) 아래 모든 것이 하나라는 뜻의 홍역학(洪易學)을 제창(提唱)하면서 인재(人材)를 양성(養成)하다가 70세를 일기(一期)로 세상(世上)을 떠났음


③ 문하 제자(門下 弟子)

자식(子息)들 가운데 야산(也山)의 학문적 영향(學問的 影響)을 가장 크게 받은 아들은 셋째 이간화(李艮和)이고, 넷째 아들은 홍역사상연구소(洪易思想硏究所) 소장(所長)으로 있는 민중사학자(民衆史學者) 이이화(李離和 : 1937~ )이며, 손자(孫子)로는 이간화(李艮和)의 두 아들인 이전 이응국(利田 李應國)ㆍ청고 이응문(靑皐 李應文)이 조부(祖父)의 영향(影響)을 받아 모두 주역(周易)을 강의(講義)하고 있음

그리고 야산(也山)의 현존(現存) 유일(唯一)의 제자(弟子)로는 대산 김석진(大山 金碩鎭 : 1928~ )으로서 서울 대학로(大學路)의 흥사단(興士團) 강당(講堂)에서 무려 17년 동안 주역(周易)을 강의(講義)하였음


④ 홍역(洪易)이란?

‘홍역(洪易)’이란 원래 오행학적 관점(五行學的 觀點)에서 서술(敍述)한 정치서적(政治書籍)인『서경(書經)』의「홍범(洪範)」과 음양학적 관점(陰陽學的 觀點)에서 자연(自然)의 이치(理致)와 인사(人事)의 도리(道理)를 밝힌 철학서(哲學書)『주역(周易)』을 합쳐 부르는 말이지만, 이제는 야산(也山)이 중국(中國)에서 탄생(誕生)한『주역(周易)』을 우리 현실(現實)에 맞게 응용(應用)한 야산(也山)의 주역 사상(周易 思想)을 특별히 지칭(指稱)하는 이름으로『주역(周易)』과「홍범(洪範)」을 아울러 공부해야 음양오행(陰陽五行)의 도(道)에 통할 수 있다는 의미(意味)임


⑤ 관련 용어(關聯 用語)

㉠ 역술(易術)

‘주역(周易)’은 팔괘(八卦)를 조합(調合)한 육십사괘(六十四卦)로 인간(人間)과 세계(世界)를 설명(說明)하고 예측(豫測)하는 반면, ‘사주명리학(四柱命理學)’은 십간십이지(十干十二支)를 기본(基本)으로 한 육십갑자(六十甲子)로 인간(人間)과 세계(世界)를 설명(說明)하고 예측(豫測)하는 방법(方法)이기 때문에 양자(兩者)는 엄연히 다른 것이며, 따라서 ‘역술(易術)’이라 하면 ‘주역(周易)’과 ‘사주명리학(四柱命理學)’을 통틀어 부르는 이름임


㉡ 주역(周易)과 사주명리학(四柱命理學)의 차이(差異)

ⓐ 주역(周易)

기원전(紀元前) 5세기부터 이미 완성(完成)된 형태(形態)로 존재(存在)하고 있는 주역(周易)은 음양(陰陽)에서 출발(出發)하여 사상(四象)ㆍ사상(四象)에서 팔괘(八卦)ㆍ팔괘(八卦)에서 육십사괘(六十四卦)로 뻗어나가는 방식(方式)으로서, 이를 수(數) 형태(形態)로 표시하자면 2[음양(陰陽)] ? 4[사상(四象)] ? 8[팔괘(八卦)] ? 64[육십사괘(六十四卦)]로 그 뻗어나가는 방식(方式)이 아주 명료하게 드러나고 있음


ⓑ 사주명리학(四柱命理學)

10세기경에 그 체계(體系)가 완성(完成)된 것으로 보이는 사주명리학(四柱命理學)은 육십갑자(六十甲子) 모두를 음양(陰陽)으로 나누고, 이를 다시 오행(五行)으로 곱하는 방식(方式)이며, 여기에 다시 첨가(添加)되는 부분이 생년(生年)ㆍ월(月)ㆍ일(日)ㆍ시(時)라는 네 기둥, 즉 사주(四柱)이기 때문에 주역(周易)보다는 훨씬 복잡하며, 또한 숫자(數字)로 표현(表現)하기에도 어려움이 많음


ⓒ 양자간(兩者間)의 차이(差異)

주역(周易)으로 점(占)을 칠 때는 점(占)치는 순간(瞬間)의 시(時)만 필요하지만, 사주(四柱)로 볼 때는 생년(生年)ㆍ월(月)ㆍ일(日)ㆍ시(時)의 네 가지가 모두 필요하며, 따라서 주역(周易)은 OㆍX 방식(方式)처럼 둘 중 하나를 선택(選擇)하기 때문에 압축적(壓縮的)인 결론(結論)을 내리기에 유리(有利)한 반면, 사주(四柱)는 보다 구체적(具體的)이고 세밀(細密)한 설명 체계(說明 體系)이기 때문에 서술적(敍述的)인 전망(展望)을 하는데 더 유리(有利)함


㉢ 주역(周易) 연구(硏究)의 세 가지 흐름

ⓐ 점서(占書)로서의 주역(周易)

주역(周易) 연구(硏究)의 원조(元祖)인 점(占)을 치기 위한 목적(目的)에서 연구(硏究)한 것으로, 주역(周易)의 팔괘(八卦)와 육십사괘(六十四卦)는 일차적(一次的)으로 형상(形象)으로 나타나고, 이 형상(形象)은 다시 숫자(數字)로 환산(換算)할 수 있기에 보통 ‘상수학(象數學)’이라 부르고 있음

이 연구(硏究)의 대표적 인물(代表的 人物)은 송대(宋代)의 강절 소옹(康節 邵雍 : 1011~1077)이며, 그의 저서(著書)『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는 상수학적(象數學的) 입장(立場)에서 우주(宇宙)의 변화(變化)를 설명(說明)한 명저(名著)라 할 수 있지만, 그의 패러다임(Paradigm)이 너무나 거창(巨創)하고 복잡(複雜)하여 이천 정이(伊川 程? : 1033~1107)를 비롯한 송대(宋代)의 신유학자(新儒學者)들이 제대로 이해(理解)할 수 없었기에 그들의 어록(語錄)을 모아 놓은『근사록(近思錄)』에는 유독 소강절(邵康節)의 어록(語錄)만 빠져 있음

하지만 19세기 한국(韓國)의 민족종교(民族宗敎) 지도자(指導者)들이 공통적(共通的)으로 내세운 ‘후천개벽(後天開闢)’이라는 패러다임 쉬프트(Paradigm Shift)의 연원(淵源)은 바로 소강절(邵康節)인데, 그의 노선(路線)을 화담 서경덕(花潭 徐敬德 : 1489~1546)이 계승(繼承)한 후, 토정 이지함(土亭 李之函 : 1517~1578)을 거쳐 전라감사(全羅監司)로 유명(有名)한 낙서 이서구(洛瑞 李書九 : 1754~1825), 그리고 계룡산(鷄龍山)의 일부 김항(一夫 金恒 : 1826~1898)으로 이어졌으며, 다시 일부(一夫)의 영향(影響)을 받아 동학(東學)의 수운 최제우(水雲 崔濟愚 : 1824~1864)ㆍ모악산(母岳山)의 증산 강일순(甑山 姜一淳 : 1871~1909)ㆍ원불교(圓佛敎)의 소태산 박중빈(少太山 朴重彬 : 1891~1943) 등 후천개벽(後天開闢)을 주장(主張)한 민족종교(民族宗敎) 지도자(指導者)들로 그 맥(脈)이 이어지고 있음

한편, ‘후천개벽설(後天開闢說)’이 그 발생지(發生地)인 중국(中國)이나 일본(日本)에서는 별로 빛을 보지 못한 우주론(宇宙論)이지만, 19세기 서세동점(誓勢東漸)의 전환기(轉換期)에 처한 한국(韓國)에서만 유독 민중(民衆)들에게 파고들 수 있었던 이유(理由)는 한국(韓國) 사람들의 변혁(變革)에 대한 갈망(渴望)이 그만큼 더 강했음을 의미(意味)하는 것임


ⓑ 수양 차원(修養 次元)에서의 주역(周易)

점(占)을 쳐서 미래(未來)의 길흉(吉凶)을 예측(豫測)하는 것은 괴력난신(怪力亂神)에 빠질 위험(危險)이 있으니 여기서 벗어나 괘(卦)를 보고 스스로 마음을 수양(修養)하는 데 초점(焦點)을 둔, 즉 자기 수양(自己 修養)의 차원(次元)에서 주역(周易)을 연구(硏究)한 입장(立場)으로서 송대(宋代)의 이천 정이(伊川 程?)가 대표적 인물(代表的 人物)인데, 그는 기존(旣存)의 상수학적(象數學的)인 주역(周易)에서 벗어나 의리적(義理的)인 관점(觀點)에서 주역(周易)을 해석(解釋)하였음

한편,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중기(朝鮮 中期) 때의 겸암 류운룡(謙庵 柳雲龍 : 1539~1601)이 특히 대표적(代表的)인 인물(人物)로서, 그의 호(號) ‘겸암(謙庵)’은 주역(周易)의 겸괘(謙卦)에서 유래(由來)한 것이라고 하는데, 스승이었던 퇴계 이황(退溪 李滉 : 1501~1570)이 64괘(卦) 가운데 특별히 겸괘(謙卦)를 골라 제자(弟子)에게 준 배경(背景)에는 평소 그의 성격(性格)이 겸양(謙讓)과는 거리가 있기에 과격(過激)하고 독선적(獨善的)인 성격(性格)을 다스려 ‘겸손(謙遜)해지라’는 의미(意味)에서였다고 함

그리하여 겸암(謙庵)은 평생(平生) 겸괘(謙卦)를 의식(意識)하고 살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겸암(謙庵)이 29세 때 안동(安東) 하회(河廻) 마을 건너편의 산자락에 수양(修養)을 하기 위한 정자(亭子)를 지을 때도 바위 절벽(絶壁)의 꼭대기에 위치해 있어 탁 트인 전망(展望)을 가졌을 뿐 아니라, 터도 평평해서 정자(亭子)를 짓기에는 안성맞춤인 ‘부용대(芙蓉臺)’가 아니라, 그곳에서 한참 왼쪽으로 내려온 중간 지점(中間 地點)의 눈에 띄지 않는 곳을 택해 정자(亭子)를 짓고 ‘겸암정(謙庵亭)’이라 이름지을 정도로 위치 선정(位置 選定)이나 작명(作名)에서 겸괘(謙卦)의 의미(意味)를 담았음

또한 부용대(芙蓉臺) 오른쪽 밑에는 겸암(謙庵)을 모신 화천서원(花川書院)이 있고, 그 입구(入口)에 걸려 있는 현판(懸板) 글씨는 다름 아닌 ‘지산루’(地山樓)‘로 되어 있는데, ’겸(謙)‘은 주역(周易)의 64괘(卦) 가운데 15번 째에 해당되는 괘(卦)로서, 위에는 땅을 상징(象徵)하는 곤괘(坤卦)가 있고 아래에는 산(山)을 상징(象徵)하는 간괘(艮卦)가 배치되어 있기에 간단히 줄여 ’지산겸(地山謙)‘이라 부르며, “산(山)이 땅 위에 있지 않고 땅 밑에 있는 형상(形相)이니 겸손(謙遜)하라”는 뜻을 함축(含蓄)하고 있는 것으로, 따라서 ‘지산루’(地山樓)‘라는 이름 또한 ’지산 겸괘(地山 謙卦)‘를 상기(想起)시키는 작명(作名)임


ⓒ 도교(道敎)의 내단적(內丹的) 입장(立場)으로서의 주역(周易)

‘내단(內丹)’은 ‘외단(外丹)’의 반대 개념(反對 槪念)으로 ‘외단(外丹)’이 수은(水銀)과 유황(硫黃) 등을 제련(製鍊)하여 만든 불사약(不死藥)을 지칭(指稱)하는 것이라면, ‘내단(內丹)’은 약물(藥物)이 아닌 인체(人體) 내(內)에서 단(丹)을 찾는 것, 즉 다시 말하면 인체(人體) 내(內)의 하단전(下丹田)에 기(氣)를 모음으로써 신선(神仙)이 될 수 있다는 단전호흡(丹田呼吸)을 중시(重視)하는 단학(丹學)의 입장(立場)에서 주역(周易)을 연구(硏究)하는 것인데, 이는『주역(周易)』「계사전(繫辭傳)」에 등장(登場)하는 ‘근취제신 원취제물(近取諸身 遠取諸物 : 가깝게는 자기 몸에서 진리(眞理)를 찾고, 멀리는 각각의 사물(事物)에서 진리(眞理)를 찾아야 한다)’이란 표현(表現)에 바탕을 둔 것으로 “인체(人體)를 소우주(小宇宙)로 보고, 소우주(小宇宙)를 알면 대우주(大宇宙)를 알 수 있다”는 전제(前提)가 깔려 있는 것임

‘육십사괘(六十四卦)’는 대우주(大宇宙) 뿐만 아니라 소우주(小宇宙)인 인체(人體)의 변화(變化)도 설명(說明)할 수 있는 기제(基題)로서 내단(內丹)에서 말하는 인체 변화(人體 變化)의 핵심(核心)은 ‘감리교구(坎離交?)’에 있다는 것인데, 감괘(坎卦)와 이괘(離卦)가 서로 만나는 것이 감리교구(坎離交?)로서 ‘감(坎)’은 신장(腎臟)의 수(水) 기운(氣運)을, ‘리(離)’는 심장(心臟)의 화(火) 기운(氣運)을 상징(象徵)하기 때문에 오장육부(五臟六腑) 가운데 신장(腎臟)과 심장(心臟)이 만나고, 혼(魂 : 화(火))이 백(魄 : 수(水))의 가운데로 들어가고, 호랑이[호(虎)]와 용(龍)이 만나고, 물[수(水)]과 불[화(火)]이 만나야만 내단(內丹)을 형성(形成)할 수 있다는 것임

이것이 동양(東洋) 신비주의(神秘主義)의 정수(精髓)로 알려져 있는 ‘황금꽃의 비밀(The Secret of the Golden Flower)’이며, 이 내면(內面)의 연금술(鍊金術)을 설명(說明)하는 방식(方式)이 바로 주역(周易)인데, 이를 설명(說明)한 책이 중국(中國) 후한(後漢) 때의 도사(道士) 운아자 위백양(雲牙子 魏伯陽 : ?~?)이 지은『주역참동계(周易參同契)』로서 오늘날까지 단학(丹學)의 바이블(Bible)로 평가(評價)받고 있음

 

이상 박모씨가 기술한 것을 날라 왔다.

동백동에서 해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