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산행기록

화개동천 내원골의 성불심원 폐암자와 설봉 이야기(181103~04)

도솔산인 2018. 11. 4. 21:25


화개동천 내원골의 성불심원 폐암자와 설봉 이야기(181103~04)



▣ 일   시 : 2018년 11월 03일(토)~04(일)

▣ 코   스 : 쌍계사-불출암-영대암-옥소암-비로봉(백학봉)-불일평전-상불재-1301봉(설봉)-상불암-불일암-불일폭포-불일평전-영대암-쌍계사

▣ 인   원 : 4명(자봉스님, 송연목님, 김성채님)

▣ 날   씨 : 맑음



 금년이 가기 전에 선인들의 유람록에 나오는 내원골의 옥소암, 영대암, 불출암을 거꾸로 잇고자 마음을 먹었지만. 차일피일 시간을 미루다가 해를 넘길 것 같아서, 관련 유람록을 다시 읽고 화개동천 청학동을 찾았다.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섬진강변을 지나 花開洞天으로 들어서면, 12시 방향으로 가장 높이 보이는 봉우리가 있다. 오늘의 목적지는 1301봉, 정상에 헬기장이 있고 빨치산 토벌을 위해 국군이 돌로 쌓은 참호가 있으며, 전란이 있을 때마다 망루의 역할을 한 듯한, 인위적으로 쌓은 석축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쌍계사 주차장에서 올려다보면 雪峰(설봉)으로 추정되는1301봉이 보이는데 헬기장의 전위봉(前衛峰)인 듯하다.







1. 내원골의 성불심원에서 불일암까지


 불출암은 1618년 조위한의 유두류산록에 쌍계사에서 1里라고 하였는데, 내원골의 등산로 옆에 위치해 있다. 폐 암자터 앞에는 烏竹과 은행나무가 있고, 석축이 바로 보이기 때문에 쉽게 찾을 수 있다. 지난 번 영대암(도성암)에서 쌍계사 쪽으로 내려가다가 갈림 길에서 좌틀하여 불출암으로 내려섰기 때문에, 이번에는 불출암터에서 오른쪽으로 올라가다가 불출암 샘터를 지나 잠시 계곡쪽으로 오르니, 중장비가 오르내린 뚜렷한 길이 나오고. 조금 오르니 울창한 대숲 위로 해우소가 나타난다. 현재 영대암(도성암)은 중장비가 올라와 축대를 쌓고 터를 확장했기 때문에 옛 모습은 아니지만, 나는 유람록에 나오는 영대암터로 추정한다. 이곳에서 자봉 스님이 가지고 오신 떡으로 간단히 요기를 한 후, 옥소암(사관원)의 샘터 쪽으로 내려가 소나무가 있는 우측 능선으로 올라갔으나, 희미한 산길은 사라지고 산죽 구간과 암릉 구간을 만났다. 산죽 구간에서 백두대간 늑대 송근성 대장님의 시그널을 보고 억지로 된비알을 치고 올라서니 백학봉(비로봉)이다. 불출암에서 영대암길은 연결했으나, 옥소암에서 불일암 길은 찾지 못했으니, 하산길에 다시 확인해보기로 하고, 조망 바위로  내려가 단풍이 절정인 만추의 불일암을 폰에 담았다.



가. 1618조위한의 유두류산록(遊頭流山錄)

 

414, 불일암에 도착하니 절은 오래 되었는데 승려는 없고 단청은 떨어져 나가 있으며 빈 감실(龕室)은 고요하고 창문은 영롱(구멍이 뚫리다)하였다. 오른쪽에 청학봉(靑鶴峯)을 마주하고 있는데 구름을 끼고서 푸른 절벽이 뾰족하게 서 있었다.

 

到佛日. 則寺古無僧. 金碧散落. 虛龕寂歷. 窓壁玲瓏. 右對靑鶴峯. 上切雲天. 蒼壁削立.

 

<중략> 시 몇 편을 짓고 왔던 길을 되짚어 가다가 한 가닥 좁은 길을 찾아내서 풀을 헤치고 덩굴을 제치며 곧장 몇 리를 내려가 옥소암(玉簫庵)에 닿았다. 암자는 깎아지른 절벽 위에 있는데 절벽을 뚫고 허공에다가 기둥을 세우고 난간을 설치해서 아득하게 허공에 떠서 새가 나래를 펴고 있는 것 같아, 마치 그림 속에 있는 듯해서 일반적인 승방이나 절과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승려가 말하기를, “이 암자는 담양 선비 이성국(李聖國)이 이 산에 들어와 이십 년 동안 도를 닦다가 재산을 다 털어 절에 시주해서 지은 것입니다.”라고 한다. 옷을 벗어 놓고 피곤해 누워 시를 짓고 돌아와 가마 타고 곧장 내려가니 마치 구덩이나 우물에 빠지는 느낌이었다. 수백 걸음 가서 영대암(靈臺庵)에 닿았고 수백 걸음 더 가서 불출암(佛出庵)에 이르렀다. 이 두 암자는 모두 험한 골짜기 위에 있어서 한 점 속세의 먼지가 없었으나 옥소암에 비한다면 풍격이 한참 못 미쳤다. 불출암(佛出庵)에서 또 1 리쯤 가서 쌍계사(雙溪寺)로 돌아와 묵었다.

 

賦詩數篇. 還向歸路. 而別尋一線鳥道. 穿蘿觸藤. 直下數里. 到玉簫庵. 庵在斷巘絶壁上. 鑿崖凌虛而架棟設檻. 縹渺浮空. 翬飛鳥翼. 有若畫圖之中. 殆非尋常僧房佛屋之比也. 僧云. 此庵. 乃潭陽士人李聖國者. 入此山修道二十年. 破產傾財. 作大施主. 構之云. 脫衣困臥. 賦詩而還. 乘輿直下. 如墮坑入井. 行數百步. 靈臺庵. 又行數百步. 佛出. 玆二庵俱在絶壑上. 無一點塵垢. 而比玉簫則風斯 下矣. 佛出. 又行一里許. 還到雙溪宿焉.

 

* 風斯在下 [풍사재하]새가 높이 날 때는 바람은 그 밑에 있다는 뜻으로, 높은 곳에 오름을 이르는 말[장자]

 

 

나. 1631 오숙(吳䎘)의 옥소암&불일암 기행시

 

 

玉簫庵 (옥소암) - 오숙 (吳䎘)

 

獨夜邀仙鶴 (독야요선학 ) : 홀로 있는 밤, 선학을 맞아

淸晨禮釋曇 (청신예석담 ) : 맑은 새벽, 부처님께 예배한다

乾坤一方問 (건곤일방문 ) : 천지 안의 어느 곳을 찾으니

今古此伽藍 (금고차가람 ) : 예나 지금이나 이 절간이로구나

雰氣生危檻 (분기생위함 ) : 안개 기운은 높은 난간에 피고

香煙擁小龕 (향연옹소감 ) : 향불 연기는 절 탑을 감싸는구나

從來貪佛日 (종래탐불일 ) : 종래에 불일암을 탐내었는데

更別玉簫庵 (갱별옥소암 ) : 다시 옥소암을 떠나야 하는구나

 

 

佛日(불일) - 오숙(吳䎘)

 

人世吾何事(인세오하사) : 나는 무슨 일로 인간 세상에서

名區得此山(명구득차산) : 산수가 이름난 이 산을 차지했나

佛日玉簫庵(불일옥소암) : 불일암옥소암

香爐靑鶴(향로청학간) : 향로봉와 청학봉 사이에 있구나

銀河垂絶壑(은하수절학) : 은하수는 깎아지른 구렁에 드리우고

琪樹繞空壇(기수요공단) : 옥 같은 나무는 빈 법당을 둘러있도다

且愛胡僧在(차애호승재) : 장차 參禪僧이 있음을 사랑하여

徐飛錫杖還(서비석장환) : 천천히 석장을 날리며 돌아가리라

 

 

출처 : 한시속으로 http://cafe.daum.net/heartwings

 

 

다. 1651오두인두류산기(頭流山記)

 

113, 폭포가 흘러가는 곳에서 시작하여 양봉(兩峯 : 향로봉과 청학봉) 남쪽이 학연(鶴淵)이며, 바로 그곳이 쌍계사 좌측 물줄기의 근원이다. 다시 청학봉을 넘어 봉우리 남쪽 기슭에 당도하니 두 세 개의 작은 암자가 있다. 어떤 암자는 남아 있고, 어떤 암자는 허물어져 없다. 옥소·영대(玉簫靈臺)는 그 명칭이고, 성불심원(成佛深院)은 그 터전이다. 불일암에는 스님 한 분이, 옥소암에는 스님 세 분이 계셨는데 모두 곡기(穀氣)를 끊고 수도에 전념하는 부류의 스님이다. 아래로 내려와 청학동 하류에 도착하니, 수석(水石)이 더욱 기이하여 정신이 상쾌해짐을 갑절이나 깨달았다. 계곡 주위를 배회하다가 갑자기 시 한 수가 바위 사이에 있음을 보았다. 그 시에 이르기를,


[원문] 由瀑流而爲鶴淵於兩峰之南. 此雙溪左流之源也. 還踰靑鶴峰. 至峰之南麓. 則數三小菴. 或存或廢. 玉簫靈臺. 其號也. 成佛深院. 其基也. 佛日則一僧棲焉. 玉簫則三僧處焉. 皆絶粒之流也. 下至靑鶴洞下流. 則水石轉奇. 倍覺神爽. 徘徊溪邊. 忽見一詩在巖間. 其詩曰.


[의문I]

☞ 성불심원(成佛深院) : 최석기 교수님의 지리산 유람록에는 성불암과 심원암으로 국역함. 그동안 '참선승이 수도하는 깊은 산중의 도량(선원)'으로 이해했는데...

                                     참고로 유람록에서 성불암, 심원암에 대한 기록은 발견하지 못함. 




장원암(狀元巖)

 

吳翮(오핵 : 16151653)

 

靑鶴峯前路 : 靑鶴峯(청학봉) 앞 길을 내려오니

澄潭影翠杉 : 맑은 못에는 비취빛 삼나무 그림자

羽仙探勝處 : 우선(羽仙)이 찾은 경치 좋은 곳이라

仍號狀元巖 : 이에 장원암(狀元巖)이라고 부른다네



* 靑鶴峯 : 여기에서 청학봉은 비로봉 즉 백학봉이다. 유람록에 동 향로봉, 서 비로봉은 일치하나, 당시 선인들의 유람록에는 비로봉을 청학봉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동 청학봉 서 백학봉의 東-靑 西-白의 개념은 1724년 명암 정식의 두류록에 처음 나타난다.


이 시는 계부(季父 : 吳翮오핵)께서 직접 쓴 詩이다. 그리고 우선(羽仙:오숙)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호이다. 선인(先人:돌아가신 아버지)께서 숭정(崇禎) 신미(辛未, 1631)에 남쪽에 관찰사로 계시면서 이곳에 유람한 적이 있으며, 그리고 작은 숙부도 또한 병술년(丙戌, 1646)에 장원 급제하여 두루 구경을 다니러 왔다가 떠난 적이 있다. 그러므로 시에 나타난 내용이 그런 것이다. [출처 : 지리99 산행기방(지리99 국역)]


[원문] 此乃季父手寫詩. 而羽仙卽先人號也. 先人曾在崇禎辛未. 按節于南. 嘗遊于此. 而季父又於丙戌. 以新恩狀元郞. 歷觀而去. 故其見於詩者. 如此.


[의문II]

☞ 오핵의 장원암 시 : 1646년 오핵이 바위에 손으로 쓴시를 5년 뒤인 1651년 오두인이 확인했다는 내용이 믿기지 않는다. 먹으로 썼다는데 지워지지 않았을까...  



吳䎘[오숙 : 1592(선조 25)~1634(인조 12)]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숙우(肅羽), 호는 천파(天坡). 오수억(吳壽億)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경상좌도병마절도사 오정방(吳定邦). 아버지는 전부(典簿) 오사겸(吳士謙)이며, 어머니는 한성서윤 이집중(李執中)의 딸. 승문원권지정자, 에조좌랑, 순검사종사관, 헌납, 동부승지, 경상도관찰사, 황해도관찰사등을 역임함. 문장이 간결 명료했고, 특히 기유시(紀遊詩)에 뛰어남. 이조참판 겸 양관제학에 추증되었으며, 저서로는 천파집4권이 있음.

 

吳翮(오핵 : 16151653) 열네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큰 형인 오숙(吳䎘)을 따라 공부하였고, 장유(張維)의 문하에 들어갔다. 열아홉살에 성균관에 입학하여 1646(인조 24) 정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 전적·병조좌랑·정언(正言)을 병조좌랑, 사서(司書), 기사관(記事官), 지평(持平)를 역임함. 저서로는 척화삼신전(斥和三臣傳)·만세감(萬世鑑)4·백천당유고등이 있음.


 

라. 1655김지백유두류산기

 

108, 다음날 비를 만나 그대로 머물며 날이 개기를 기다렸다가, 견여(肩輿)를 타고 출발하였다. 타다가 걷다가 하면서 불일암(佛日庵)에 거의 다 도착하니, 바위 벼랑이 입을 벌린 듯 가운데가 찢어져 있고, 건너지른 나무架木가 사다리가 되어, 겨우 인적이 통할 만하였다. 아래로는 깊이가 만여 길이나 될 듯한데, 몸을 비스듬히 기울이고 발만 믿고 걸으니, 혼이 떨리고 머리카락이 곤두섰다. 붙잡고 올라 불일암에 이르니, 암자 밖에 작은 석대(石臺)가 있는데, 완폭대(翫瀑臺)라고 부르는 것이다. 천신(天紳)수백 길이 향로봉(香爐峰)에서 흘러내리는 것을 바라보노라니, 그 형세가 마치 무지개가 일어나고 번개 치는 듯하여, 다만 여산(廬山) 폭포와 박연(博淵) 폭포만이 서로 견줄 수 있다. 전날 용추를 구경했던 사람들 또한 이 완폭대 아래에서 바람을 쐬었다. 날리는 물방울이 찬 기운을 만들어 내고 그늘진 골짜기가 서늘한 기운을 불러일으켜 몹시 추워 오래 머물 수 없었다. 산 막걸리를 두어 잔 데워 마시고 돌아오는 길에 청학봉(靑鶴峯)에서 지팡이 잡고 쉬면서 학 둥지를 엿보고, 내려와 옥소암(玉簫菴)에 들어가 이름을 쓰고, 다시 쌍계사로 돌아와 묵었다.

 

[원문] 翌日. 遇雨仍畱. 遂待晴. 肩輿而作. 或乘或步. 幾至佛日庵. 石崖呀然中裂. 架木為棧. 纔通人跡. 其下深可萬餘丈. 側身信足. 魂悸髮竪. 乃躋攀到菴菴. 外有小石臺. 所號翫瀑者. 望見天紳數百丈. 掛流香爐之側. 勢若虹起電掣. 直與廬山慱淵上下. 往日龍湫之所賞者. 亦風斯下矣. 飛淙釀寒. 陰谷動爽. 凛乎不可乆畱. 遂煖進山醪數杯. 仍復路憇杖靑鶴峯. 窺鶴巢而下. 題名玉簫菴. 復還䨇溪宿.


위 유람록에 나오는 청학봉은 지금의 비로봉, 즉 백학봉을 가리킴. 백학봉은 1724년 명암(明庵) 정식(鄭栻, 1683~1746])의 <두류록>에 처음 등장함.

 

 

김지백(金之白) [1623~1670]1648(인조 26)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평생 학문에만 정진하였다.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과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등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평생 명리를 구하지 않고 학문에 정진한 인물로, 사부일기류인 유두류산기(遊頭流山記)를 저술하기도 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담허재집[澹虛齋集]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유산기출처 : 한국문화콘텐츠닷컴]




2. 상불암과 雪峰(설봉) 이야기


상불암은 시대에 따라 그 이름을 달리한다. 1487년 추강 남효온의 寶珠庵(보주암)에서 1632년 성여신과 1686년 정시한의 普照庵(보조암), 그리고 1699년 명안대사의 상불암기와 김창흡의 영남일기에는 上佛庵(상불암), 1807년 남주헌은 普照庵(보조암)으로 기록하고 있다. 보조와 불일과 국사라는 이름만으로도 중량감이 있고,  여러 문헌에 普照庵(보조암)이라는 기록이 남아있으며, 고승들과 참선승들의 수행터였음이 분명하다. 이번 산행에 함께하신 자봉 스님도 이곳에서 한 동안 수행 정진을 하셨다고 한다. 아무튼 상불암터 초입을 지나 531년 전 1487년 추강 남효온 선생이 올라간 佛智嶺(불지령)인 상불재을 향해 천천히 나아갔다. 아마 1699년 상불암 이전의 시기에는 상불재의 옛 이름도 佛智嶺(불지령)이라고 하였을 것이다. 상불재에 오르니 석양으로 해는 넘어가고 '여기에서 헬기장쯤이야.'라고 만만하게 생각했지만, 1301봉에 도착했을 때에는 완전히 어둠이 내렸다. 이곳을 여러 번 지나갔고 이곳에서 머문 일도 있었지만, 설봉(雪峰)으로 알고 이곳에 오른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아침에 花開에서 까마득히 보이는 곳을 바라보고, 이곳에 올라와서 저녁을 맞았다. 아무튼 雪峰(설봉)설리갈화천(雪裏葛花天)에서 유래한 지명은 아닐까 생각한다. 



가. 상불암과 설봉에 대한 고문헌의 기록



유람록과 문헌

보조암(상불암)

상불재

설봉

비고

1

   1487년 남효온 지리산일과

寶珠庵(보주암)

佛智嶺(불지령)



2

   1616년 성여신 방장산선유일기



雪峰(설봉)

1565년경  설봉을 넘어감

3

   1632년 성여신 진양지

普照庵(보조암)




4

   1686년 정시한 산중일기

普照基(보조터)



中普照基(중보조터)

5

   1699明安의 상불암기

上佛庵(상불암)


雪峰(설봉)


6

   1708년 김창흡 영남일기

上佛庵(상불암)




7

   1807년 남주헌 지리산행기

普照庵(보조암)




8

   1823년 김선신 두류전지

普照庵(보조암)


雪峰(설봉)




나. 1616년 성여신의 방장산선유일기에 나오는 설봉(雪峰)


 우리들이 처음에는 그 뜻을 알지 못하였는데, 읊조리고 음미한 한참 만에 그 뜻을 조금 깨달았다. 그러고 나서 서로 탄식하며 말하기를 선생의 모습을 뵙지는 못했으나, 선생의 역량은 이 시를 통해 상상할 수 있겠네. 이번 걸음이 어찌 큰 다행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드디어 도천(桃川)(지금의 덕천서원)를 거닐다가 번천동(樊川洞:)을 지나 숙묵암(宿黙菴)을 거처서 설봉(雪峰)을 넘어 불일암(佛日菴)에서 묵었다. 쌍계사로 내려가 겨울 석 달 동안 역사서를 읽고, 다음 해 봄에 산을 나왔다. ! 을축년과 정묘년의 일이 벌써 50년이나 지났고, 그 때 함께 노닐던 사람들은 모두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니, 세상 사람들이 이른바 어찌 신선술을 배우지 않아 무덤만이 즐비한가.’라고 한 격이다. 난리와 많은 전쟁으로 사찰은 모두 잿더미가 되었고, 지금 새로 지은 절에 나 홀로 다시 와 옛터를 둘러보니, 이른바 늙은 신선 죽지 않고 흥망을 다 보았네.’라는 격이었다.

 

* 번천동(樊川洞) : 현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반천리(反川里)를 가리킨다. 일명 번내라고도 함. 乙丑丁卯等年은 1565년과 1567년이다.


[원문] 吾等初未識其意. 撫翫沈吟. 良久. 乃得小寤. 仍竊相嘆曰.先生儀形. 遂未得拜. 先生力量. 憑此可想. 豈非今行之一大幸乎. 遂散步於桃川上(卽今書院基也). 仍過樊川洞. 越宿默菴. 踰雪峰. 宿佛日菴. 下雙磎. 讀三冬史. 翌年春. 出山焉. 噫. 乙丑 丁卯等年. 已過五十歲. 而當日同遊人. 皆不在世. 所謂何不學仙塚累累者也. 亂離百戰. 寺刹皆入灰燼. 而今乃新營. 翁獨重來而訪舊. 所謂老仙不死閱興亡者也.



다. 1699년 상불암기에 나오는 설봉(雪峰)


 지리산의 한 줄기가 남으로 우뚝 솟아 하늘에 가까이 간 것이 설봉(雪峰)이다. 이 봉우리의 서쪽에 옛 사람이 숨어 쉬던 터가 있는데, 그 이름을 잃어 버린 것이 몇 년이나 되었는지 알 수 없다. 강희(康熙) 정축(丁丑 1697)년에 승단(僧團)에서 형 동생이 되는 호영(浩影)도인 해기(海機)와 사민(思敏)선사가 일찍이 청학동 대은암에서 함께 선업을 닦다가 문득 그 거처가 깊지 않은 것을 싫어해서 대매(大梅)가 집을 옮긴 일을 우러러 좇아 이곳으로 옮겨 들어와 집을 짓기 시작하였는데 한 해가 지나지 않아 완성되었다. 이곳이 불일암(佛日庵)의 위에 있기 때문에 상불(上佛)’이라고 편액을 붙였다.

 

[원문] 上佛庵記 智異之一支 南而斗之而近天者 卽雪峰 峰之西 有古人隱休之地而墟 失其名者 不知幾年也 康熙丁丑 浩影道人海機與思敏禪 爲法門昆仲 嘗居靑鶴洞大隱庵 同修白業 忽厭其居之不深 仰追大梅之移舍 乃轉入此 庇工幹事 不年成之 由其在佛日之上 以上佛扁焉


☞ 대매(大梅 ?808) 성은 정씨. 이름은 법상. 대매는 호. 또는 매자. 마조도일의 제자. 처음 마조를 참알하고 묻기를 「어떤 것이 佛입니까.」 馬祖「곧 마음이 부처다.」한데서 크게 깨침. 당 덕종 때 대매산에 호성사를 짓고 크게 종풍을 떨치다. 당 원화 삼3808)년 6월 9일 나이 88세로 입적함.
출처: http://studybuddha.tistory.com/115 [불교용어 사전]




라. 1823년 김선신의 두류전지에 나오는 설봉(雪峰)


설봉(雪峰): 악양 북쪽에 있다.[류씨견문록] 살펴보건데, 설봉(雪峰)은 지금 솔봉(松峰)이라고 부른다. 봉우리에 여러 그루의 소나무가 있으므로 그렇게 일컫는다. 그렇지만 실제로 '솔松'의 방언 발음은 '설雪'자의 발음과 비슷하다. 따라서 계속 잘못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원문]按. 雪峰. 今喚松峰. 峰有數松. 故云. 然而其實松之方音. 與雪之子音相近. 故訛傳相襲爾.




3. 설봉(雪峰)에서 쌍계사 가는 길


 설봉(雪峰)의 밤은 예상외로 포근했다. 나뭇가지마다 별들을 대롱대롱 매달고, 검푸른 어둠의 바다에는 수를 놓은 듯한 전경 펼쳐졌다. 일출 전에 아침을 먹고 어제 올라온 루트로 하산 길을 잡은 것은, 상불암터와 불일폭포를 돌아보고 불일암에서 옥소암 길을 되짚어 보기 위함이다. 상불암터에서 차 한 잔을 마시고 잣나무 숲으로 나오는 길이 부드러워 다시 보니 이곳이 상불재로 오르는 옛길이었다. 상불암터가 본래 상불재를 오르는 길목에 있었는데, 관리공단에서 다리를 놓아 길을 새로 만든 것임을 알게 되었다. 만산홍엽의 숲에 빛이 들어와 형형색색 푸른 산죽과 어우러져 붉은 빛을 발하는데, 폰에 담으니 눈으로 보는 것만 못하였다. 완폭대와 불일암 돌아보고, 불일폭포 아래 청학동 석문으로 들어가서 지난 일들을 생각하니 완폭대 석각 발견부터 감회가 새롭더라. 불일평전에서 마음에 점을 찍고 하산 길을 옥소암 영대암 사이 능선 길로 불일암과 성불심원 길을 연결하고 쌍계사로 내려왔다. 이번 산행에서 13번의 답사 결과를 종합·정리하였고, 내원골의 성불심원 폐암자설봉(雪峰)의 목적한 산행을 완수하였다. 하산 후 완폭대님과 김성채님의 안내로 내은적암 터를 둘러보고, 저녁을 먹고 대전으로 올라왔다. 함께하신 자봉스님과 송연목님 그리고 하동군청 학예연구사님 수고하셨습니다. ^^ 끝.



♣ 청학암, 지장암, 보조암과 상불암 불지령등 관련 자료 :  http://blog.daum.net/lyg4533/16487952







불출암터 추정



불출암 샘터


대숲으로 곧장 내려서면 불출암으로 이어진다.



도성암(영대암터 추정)




사관원(옥소암터 추정)




불일암











하동독바위







趙明師


1807년 4월 4일(여정 3일째) <하익범>과 불일암을 찾은 趙明師에 대한 기록이다. 바위 한 쪽에 조명사(趙明師, 조복(趙濮))가 이름을 새겼다.(石面有趙明師題名)'<하익범>의 [遊頭流錄]



photo by 조봉근(180415)


photo by 조봉근(180421)


photo by Dosol(180429)


탁본 조봉근 주무관(180501)












내은적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