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崇祖惇宗/경술통문

경술통문 동지인 이지선(李芝璇)

도솔산인 2018. 9. 21. 14:33


경술의병 통문 동지인 이지선(李芝璇)




이지선(李芝璇) : 1876(고종 13)-1918, 용궁면 월오리 나산(蘿山) 출신, 이명은 지원(芝元), 자는 인보(仁甫), 호는 나강(蘿崗), 본관은 성주, 세심헌(洗心軒) 규홍(圭洪)의 장자, 이강년 의진(李康秊義陣)의 좌종사(坐從事)로서 예천, 문경, 충북 제천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이지선은 러일전쟁(1905) 직후 일제의 강요와 위협 아래 체결된 을사조약을 보고, 우리 민족에게 국망의 위기가 닥쳤음을 절감하고, 국권회복운동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으나 여의치 않았다. 그러던 중 19078, 그는 의병 항쟁을 모색하던 아버지 이규홍(李圭洪)의 소개로 거창 출신의 의병장 차성충(車晟忠)과 함께 이강년 의진에 갔다가 의병 대열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1908년 정월에 석주 이상룡(石洲李相龍)이 그의 아버지에게 군자금을 요청하자, 그것을 마련하여 그의 매부 이세형(李世衡)과 함께 의병 활동을 모색하고 있던 차성충에게 직접 전달하였고, 그 후에도 여러 차례 군자금을 전달하여 의병 활동을 도왔다. 이후 그는 을미의병(1895)에 참여했다가 정미7조약 직후 재봉기한 이강년 의병진에 가담하여 좌종사로서 활동하였다. 이강년 의병 부대는 주로 태백산맥을 동서남북으로 오르내리고 넘나들며 정미의병(丁未義兵, 1907)에서 가장 뛰어난 활약상을 보였다. 특히 의병장 이강년은 대담한 유도 작전으로 적에게 결정적 타격을 주는 전과를 올렸던 것으로 유명했다. 그 후 19086월 청풍(淸風) 까치재에서 이강년 의병장이 적들에게 피체되었으나, 그의 부장들은 의병 활동을 지속하였다. 한일합방(1910) 이후 국권 회복 의지에 불타는 그는 의병을 재규합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동지인 이승재(李承宰), 장한문(張翰文), 안재극(安在極), 김두활(金斗活), 이긍재(李兢宰), 유시연(柳時淵), 노병대(盧炳大), 김철상(金喆相), 이은화(李殷和), 이명재(李明宰), 이응수(李應洙), 정희섭(丁喜燮), 주구상(周九相) 등의 동지와 지속적으로 연락을 취하여, "일본은 임진년 이래로 우리의 원수로서 수 많은 사기와 기만으로서 우롱하더니, 이제는 침략을 자행하고 있다. 특히 국모를 시해하는 등 천인공로할 행위를 서슴없이 행하면서 우리를 금수와 같이 하려는 이 때를 당하여 모든 젊은이들은 의병의 대열에 동참하여 일신을 산화함으로써 의를 행하여 대의를 바로 세우자."라는 취지의 격문(檄文)을 작성하여 항일 의식을 고취시켰다. 그리고 그는 이강년 의병장의 장자 이승재(李承宰)가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동분서주하다가 병을 얻어 객지에서 사망하자, 여러 동지들에게 알려 재물을 마련하여 고향으로 보내는 등 의병의 가족을 돌보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召募檄文 筆寫本, 通告 1917 9, 獨立有功者功勳錄 1卷 報勳處 395, 13359-360, 石洲李相龍遺稿 高麗大出版部 1973268269334335, 李圭洪 親筆記年 575962, 國譯李康秊全集 淸權祠 1993449477, 義兵大將 雲崗李康秊 李錫宰 1993160, 店村 聞慶鄕土抗日義兵史 刊行年度 未詳 26, 韓國獨立史 金承學 下卷 213, 獨立運動史資料集 國家保勳處 第1290305)

 

이지한(李芝漢) : 1856(철종 7)-1940, 용궁군(龍宮郡) 출신, 자는 유흥(有興), 호는 연소(蓮昭), 본관은 성주, 19073월 충북 제천에서 이강년 의병장(李康秊義兵將)이 재기의거(再起義擧)하자 입진(入陣)하여 19086월 해진(解陣)할 때까지 좌종사부(坐從事部)에 소속, 1년여에 걸쳐 충청, 경상도 일대에서 의병 활동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愛族章)을 추서(追敍)하였다.(獨立有功者功勳錄 1395, 金承學 下卷 213, 大韓民國 獨立有功者功勳錄 第11卷 國家保勳處 1994231, 獨立運動史資料集 國家保勳處 第1303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