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崇祖惇宗/止山年譜

止山 李先生 年譜(26세~43세)

도솔산인 2018. 8. 29. 14:31

止山 李先生 年譜(26~43)

 

高宗十五年戊寅先生二十六歲[1878]

 

高宗十六年己卯先生二十七歲參奉公患疾得雙鯉療疾

[1879] 고종 16년 기묘 선생 27세 참봉공이 병이 나자 두마리 잉어를 얻어 병을 치료하였다.

 

高宗十七年庚辰先生二十八歲六月丁參奉公憂自京奔喪

[1880] 고종 17년 경진 선생 286월 참봉공이 돌아가시자 서울에서 달려와서 초상을 치렸다.

 

高宗十八年辛巳先生二十九歲張公完相

[1881] 고종 18년 신사 선생 29장완상공의 편지에 답하다.

 

高宗十九年壬午先生三十歲秋服闋杓庭閔判書台鎬致意求見遂謝之

[1882] 고종 19년 임오 선생 30세 가을에 부친상 탈상을 하였다. 표정 민태호 판서가 뜻을 전해와서 만나기를 구하였으나 끝내 사양하였다.

 

高宗二十年癸未先生三十一歲春哭楠西先生加麻。○ 以先生遺命纂乙卯疏廳同苦錄。○ 李義國來硏于湖上錦沙李公鳳寧來監是縣而送子來學

 

[1883] 고종 20년 계미 선생 31세 봄에 남서 박춘립 선생이 돌아가시어 상복을 입었다. 선생의 유명으로 을묘소 청동고록을 편찬하였다. 여름에 이의국이 와서 호상에서 학문을 연마하였다. 때에 금사 이봉령공이 이 고을 현감으로 와서 아들을 보내 와서 배웠다.

 

高宗二十一年甲申先生三十二歲嶺南大饑 春糶穀以賑民接

[1884] 고종21년 갑신 선생 32세 영남에 큰 기근이 들어 봄에 곡식을 내어 백성들을 구휼하였다.

 

高宗二十二年乙酉先生三十三歲李公炳賢來接李公先生之姪壻而謹厚有器局常有資問之意至是來居焉

[1885] 고종 22년 을유 선생 33이병현이 와서 만났다. 이공은 선생의 조카 사위로 조심성 있고 중후하고 도량과 재능이 있어 항상 資問의 뜻이 있어 여기에 이르러 와서 거주하였다.

 

高宗二十三年丙戌先生三十四歲天迂子張公寬相來接講心經近思錄等書。○ 從姪康模來學。○ 秋哭從氏城湖公

[1886] 고종23년 병술 선생 34천우자 장관상공이 와서 만났다 심경과 근사록 등의 책을 강마하였다. 종질 감모가 와서 배웠다. 가을에 종씨 성호공이 돌아가셨다.

 

張寬相 : 의흥

 

高宗二十四年丁亥先生三十五歲二月子康殷生 從姪康周來問禮

[1887] 고종24년 정해, 선생 352월 아들 康殷(강은)이 태어남. 종질 康周(강주)가 와서 예를 묻다.

 

高宗二十五年戊子先生三十六歲冬哭仲氏

[1888] 고종 25년 무자, 선생 36, 겨울에 仲氏께서 돌아가셨다.

 

高宗二十六年己丑先生三十七歲春盡賣庄土以散施。○ 冬除朞服移寓尙州錦川

[1889] 고종 26년 기축 선생 37, 봄에 庄土를 다 팔아서 빚을 청산하였다.(散施) 겨울에 仲氏 1년 상복을 벗고 상주 금천으로 移寓하였다.

 

高宗二十七年庚寅先生三十八歲季冬以仲氏大祥哭于湖上

[1890] 고종 27년 경인, 선생 38, 음력 섣달 湖上(나호동)에서 仲氏大祥을 하였다.

 

高宗二十八年辛卯先生三十九歲雨生李公炳善來會。○ 謹次息山李先生天雲亭板上韻。○ 夏文義李海九李義立來學

[1891] 고종 28년 신묘, 선생 39, 우생 이병선 공이 찾아와서 만나다. 息山 이만부선생의 천운정 판상에 차운하다. 여름에 문의 이해구이의립來學하다,

 

천운정사

천운정사는 상주시 외답동에 자리한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1664(현종5)~1732(영조8)]의 정자이다. 중부내륙고속국도 상주 IC를 빠져 나와서 시내 쪽으로 약 200미터 가다가 좌회전하여 마을 안으로 올라가면 식산이 나오는데 천운정사는 그 식산 아래에 있다. 식산 이만부는 1697년에 서울에서 상주로 이거하여 천운정을 짓고는 독서와 교육, 선비의 집회 장소로 사용하였다. 이 정사의 원래 이름은 천운당으로 1700년에 세워진 것이다. 그러나 천운당보다는 천운정으로 널리 알려졌다. 1846년과 1892년에 중수하였고, 18935월에는 천운당을 영구히 보존하기 위해서 사림에서 계를 조직하기도 했다.

 

高宗二十九年壬辰先生四十歲鳳岩書堂行鄕飮酒禮

[1892] 고종 29년 임진, 선생 40, 상주 화동 봉암서당에 모여 향음주례를 행하였다.(당주 鄭東轍, 黃在稷)

 

高宗三十年癸巳先生四十一歲答李吉寧書問。○ 余樂堂重修記成。○ 李性稙羅容凞來學

[1893] 고종 30년 계사, 선생 41, 이길영 書問에 답하였다. 木川 西里 여락당 중수기를 지었다. 이성직 라용희 들이 와서 배웠다.

♣ 李吉寧(1876~1903) : 식산 이만부선생의 7대손(10대손 문경거주 이용덕 010-2879-4102)  

李啓夏 : 조선 후기 천안 지역의 목천 현감 및 직산 현감을 지낸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양 할아버지는 형조 판서를 지낸 이목연(李穆淵), 아버지는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이인명(李寅命)이다. 이계하는 양 할아버지인 이목연이 목천에 향저를 마련한 것을 새로이 개축 정비하여 자손들이 오래도록 살아갈 수 있도록 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高宗三十一年甲五先生四十二勢呂永勛來築室而居永勛有篤學之志如此時金健秀亦來課。○ 東學猖獗 : 化嶺與三山接境三山乃東徒窟穴也境內士大夫避難者多就謀於先生先生與共築於天卓山中以避之盧都士事敬洪進士龜疇鄭進士弘黙李進士建晩鄭永愚羅采正諸公皆與焉。○ 柳參奉萬植。(時慈仁柳公道奭。自鹿島解歸。故致書於其胤二江。以慰之。) 柳公以討東召募使陞叙而請先生議事不赴。(二江柳公。又以先生之子康夏。薦爲召募營書?。先生命往辭之)(○ 錦川洞約成

[1895] 고종 31년 갑오, 선생 42, 봄에 여영훈이 와서 집을 짓고 살았다. 영훈은 학문에 돈독한 뜻이 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때에 김건수 또한 와서 공부하였다. 동학이 창궐하였다. 화령과 삼삼은 접경인데 삼산이 바로 동학도의 소굴이다. 경내 사대부들이 피난하는 사람이 많아서 산생에게 나아가서 상의를 하니 선생이 함께 천탁산 속에 성을 쌓아서 피난하였다. 도사 노사경과 진사 홍구주, 진사 정홍묵, 진사 이건만, 정영우, 나채정 등 여러 공들이 모두 함께하였다. 참봉 유만식 공에게 위로의 편지를 보냈다.(때에 자인현감 류도석공이 녹도에서 유배가 풀려나 돌아오자, 그러므로 그의 장남 이강에게 서신을 보내 위로하였다.) ○ 海史 柳道奭 公이 討東召募使로 승서(陞叙)하여 선생에게 일을 논의할 것을 청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이강 유만식 공이 선생의 아들 강하를 소모영의 書?가 되는 것을 천거하였으나 선생께서 가서 사양하게 하였다.) 錦川洞約을 지었다.

 

召募使 : 조선(朝鮮) 시대(時代)에 의병(義兵)을 모집(募集)하기 위()해 임시(臨時)로 파견(派遣)하던 벼슬아치

 

建陽元年高宗三十二年乙未先生四十三歲鄭承旨宜黙爲召募使請先生以參謀謝不往。○ 著拾橡說戒諸子。○ 八月二十日中宮殿遇禍聞變而痛哭。○ 鄭承旨宜黙

[1894] 건양 원년, 고종 32년 을미, 선생 43, 승지 정의묵이 소모사(召募使)가 되어 선생에게 참모가 될 것을 청하였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拾橡說戒諸子를 지었다. 820일 중궁전이(명성황후가) 화를 만나서 변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통곡하였다. 승지 정의묵에게 보내는 서찰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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