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崇祖惇宗/止山年譜

止山 先生 年譜(44세~56세)

도솔산인 2018. 9. 11. 13:22


止山 先生 年譜(44세~56세)

 

 

建陽二年高宗三十三年丙申先生四十四歲二月八日與族大人起夏(字岐卿號小山甁窩嗣孫也)同訪許旺山蔿於州西甘川議倡義事。○ 이월십일 을해 입김천역

[1895] 건양 2, 고종 33년 병신, 선생 44, 28일 족대인 기하(자 기경, 호 소산, 병와의 사손이다)와 같이 상주 서쪽 감천에 있는 왕산 허위를 방문하여 창의하는 일을 논의하였다.

 

병와(甁窩) 이형상(李衡祥)[1653~1733] : 본관은 전주이며, 효령대군의 10대손이다. 그의 자는 중옥(仲玉), 호는 병와(甁窩순옹(順翁)이다. 1677(숙종 3) 사마시에 합격하고 1680(숙종 6) 문과에 급제했다. 호조 좌랑·성주 목사·동래 부사·제주 목사 등을 역임하면서 많은 선정을 베풀었다. 제주 목사 재임 당시에는 제주 지역에 만연하던 미신을 타파하고 유학의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 큰 성과를 이룩했다.

 

이형상은 경주 부윤을 역임한 후 영천(경상북도 영천시 쌍계동)에 호연정(浩然亭)을 짓고 30년을 우거하면서 영천 일대의 많은 선비들과 학문적 교유와 더불어 후학 양성에 매진하였다. 1728(영조 4) 경상도 소모사로 이인좌의 난을 진압하였으며, 경주 부윤을 역임하기도 했다. 1735(영조 11) 영천의 성남 서원(城南書院)에 제향(祭享) 되었다. 1796(정조 20) 청백리에 오르고, 1829(순조 29)에는 제주 유생들이 그를 기려 영혜사(永惠祠)에 제향했다. 저서로 병와집(甁窩集)·둔서록·강도지(江都志)·남환박물지(南宦博物誌)·악학편고(樂學便考)·예학편고(禮學便考)·성리학대전등 다수가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十日乙亥 入金泉驛

210乙亥 김천역으로 들어갔다.

 

十一日丙子夜入據金陵

211일 병자 밤에 금릉에 들어가 웅거하였다.

 

十五日庚辰入龜城

215일 경진 구성으로 들어갔다.

 

二十日乙酉還錦川爲文告于祠堂再到甘川與許公蔿約定

220일 을유, 금천으로 돌아와 글을 지어 사당에 고하고, 다시 감천에 이르러 許蔿公과 약정을 하였다.

 

二十七日壬辰大會于黃岳寺義士雲集衆望所推咸曰大將之任於先生不可乃三讓后登壇誓告于衆以趙東奭爲軍門都摠姜懋馨爲贊畫許蔿爲參謀將李時佐呂永昭爲書記梁濟安爲中軍尹鴻采爲先鋒草檄通于列邑士林及義陣

227일 임진, 황악사에서 크게 모여 의사들이 운집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신망을 받아 대장으로 추대하여 모두 선생에게 대장의 소임을 맡으십시오.’라고 하자, 불가하다고 3번 사양한 뒤에 단에 올라가 많은 사람에게 誓告하기를 趙東奭(조동석)軍門都摠(군문도총)으로 삼고, 姜懋馨(강무형)贊畫(찬획)으로 삼고, 許蔿(허위)參謀將(참모장)으로 삼고, 李時左 呂永昭(이시좌, 여영소)書記(서기)로 삼고, 梁濟安(양제안)中軍(중군)으로 삼고, 윤홍채를 선봉으로 삼는다.’라고 하고 격문과 통문을 작성하여 열읍(列邑)의 사람과 의진에 통보하였다.

    

* 呂永昭 : 呂永祚

 

三月一日丙申再入龜城邑人懼之。○ 李在夏已逃躱李周弼曺奭永以軍需代贖其餘皆赦咸頌本城有再奠之安發砲兵二十名附本陣(軍容稍成騎士三十餘人步卒砲兵已數百人) 時李判書容直退在黃澗而聞之以其紅心洞山庄許以餉軍遂入據鍊兵。○ 柳公寅睦自陜川敗歸迎爲軍門執禮

31일 병신 다시 구성에 들어갔는데 읍인들이 두려워하였다. 李周弼曺奭永이 군수품으로 대속(代贖)하였고 그 나머지는 다 사면하니 모두 본성이 다시 안정을 찾은 것을 칭송하는데 어찌 발포하겠는가? 병사 20명이 본진에 더하였다.(군용이 점차 갖추어졌다. 기사가 30여인 보졸과 포병이 수 백인이다.) 때에 판서 이용직이 벼슬에서 물러나서 황간에 있었는데 의병이 일어났다는 것을 듣고 그의 홍심동 산장에서 餉軍할 것을 하락하여 드디어 들어가 웅거하여 군사를 훈련시켰다. 양산 유인목공이 협천에서 패하고 돌아왔는데 군문집례의 예를 행하여 맞이하였다.

 

逃躱

 

丁酉建大將旗整點軍哨宣誓群衆

32일 정유일 대장기를 세우고 군초를 가지런히 점검하고 군중에게 선서하였다.

 

癸卯前防守將李周善爲參謀得野譟兵三百餘人前茂朱府使李倬有願附之意送火藥三百斤。○ 斥候來報達城官兵一陣入據知禮邑本陣將卒皆示可用夜出二路兵未至邑十里止舍

38일 전방수장(前防守將) 이주선(李周善)을 참모로 삼았다. 야조병 300여인을 얻었다. 전 무주부사 이탁이 종군을 하려는 뜻이 있어 화약 300근을 보냈다. 읍의 본진의 장졸들이 다 보았다. 밤에 두 길로 나와서 병사들이 읍 십리에 이르지 않아서 멈추어 머물렀다.

 

願附之意 : 願從之意 종군을 원하는 뜻

 

丙辰移駐黃澗

321일 병진일 황간으로 진을 옮겨 주둔하였다.

 

丁巳過永同界問閔致純聚斂之罪近邑守宰貪贓及鄕曲武斷皆聞夙逃焉

322일 정사일 만치순의 취렴지죄를 물었다. 가까운 읍의 수령들이 재물을 거두어들이고 백성들을 억압으로 탄압하였다. 모두 민치순의 단죄를 듣고 일찍 달아났다.

 

聚斂 : 백성의 재물을 탐내어 함부로 거두어들임. 鄕曲武斷 : 시골에서 지위 있는 사람이 백성을 위엄과 억압으로 내려 누름을 말함.

 

庚申移陣于俗離山下帳內

325일 경신일 속리산 아래 장내리로 진을 옮겼다.

 

癸亥移陣于聞慶大井

328일 계해일 진을 문경 대정으로 옮겼다.

 

四月三日戊辰傳任于趙都摠

43일 무진일 趙東奭 군문도총에게 대장의 임무를 넘겼다.

 

六月長子康夏逮繫尙州獄

[1896] 6월 장자 강하가 체포되어 상주 옥에 수감되었다.

逮繫 : 붙잡아서 옥에 가둠.

光武元年丁酉先生四十五歲時二雲學士居憂於文義鄕廬請移先生杖屨於文上遂移就之 春長胤擧家先往。○ 先生在京陳疏未徹楊州故嶺尹判書宜善號退樵請邀而甚禮之數日留話有酬唱詩。○ 夏南遊洛東江上數月柳二江 同伴從游諸公甚衆  因入河回拜石湖柳先生霞隱柳公臣榮 及弟號東濬志同義合相與甚歡數朔見留多有述作而幷逸之

[1897] 광무원년 정유, 선생 44세 때에 이운 이의국 학사가 문의 향려에 상제로 있어, 선생에게 杖屨를 문의로 옮길 것을 청하여 마침내 이사를 하였는데 봄에 長子 강하가 가족을 이끌고 먼저 갔다. 선생께서 서울에 계시면서 상소를 올렸으나 관철되지 않았다. 양주 고령의 판서 호 퇴조 윤의선 공이 청하여 맞이하면서 매우 예의가 있었다. 수일동안 머물면서 이야기하였고 수창한 시가 있다. 여름에 남쪽 낙동강 가를 몇 달 동안 유람하였다. 柳二江 과 동반하였는데 좇아서 유람하는 諸公 들이 매우 많았다. 이로 인하여 하회마을에 들어가 류석호 선생께 인사를 드리고, 하은 류신영 공과 아우 (東濬)을 방문하였는데, 뜻이 같고 의기가 투합하여 서로 더불어 매우 환영하였다. 몇 달 동안 머물면서 술작한 것이 많았고 편안하게 지냈다.

 

하은(霞隱) 류신영(柳臣榮)

류신영(柳臣榮 1853.6.27.~1919.2.2.) (항일자정순국)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경부(敬夫). 호는 하은(霞隱). 출신지는 풍남면(豊南面) 하회동(河回洞현 풍천면 하회리). 류신영은 경술국치(庚戌國恥) 순절한 류도발 (柳道發 )의 큰아들이다. 그는 19192월 고종황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장례에 아들 종묵 (宗黙)을 참례시킨 뒤, 33(2.2) 독약을 마시고 자결 하였다. 1968년 대통령표창, 1991 건국훈장 애국장. ▣ 『기려수필 , 한국독립사하권 독립운동사7

 

류동준(柳東濬, 18591939) : 호는 시산(時山), 본관은 풍산(豊山)이다.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의 후손이며, 생부는 류도발(柳道發)이고 양부는 류도성(柳道誠)이다. 저서로는 시산집이 있다.

 

居憂 : 상제로 있는 동안, 杖屨: 장구(지팡이와 신)

 

光武二年戊戌先生四十六歲春始還文義寓所自是遠近諸子日益進。○與翰林義國書論出仕大義

[1898] 광무2년 무술, 선생 46, 봄에 비로소 문의 寓所(우거하는 곳)로 돌아왔다. 이로부터 원근의 제자들이 날로 더욱 나아갔다. 한린학사 이의국에게 서찰을 보냈는데 출사의 대의를 논하였다.

 

寓所 : 임시로 몸을 붙여 살고 있는 곳.

 

光武三年己亥先生四十七歲廣居亭成黌舍難容遂不日構成命名曰 廣居 先生作上梁文及四律原韻七絶八景遠近士友多有和之者

[1899] 광무3년 기해, 선생 47, 광거정(廣居亭)을 지었다. 횡사(글방)이 비좁아서 드디어 날이 오래 걸리지 않고 집을 짓고 명명하여 광거정이라고 하였다. 선생께서 상량문과 4율원운, 7절팔경을 지으니, 원근의 사우들이 화답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黌舍 : 서당, 글방

 

光武四年庚子先生四十八歲與柳二江書。○ 送朴承祚南歸有序

[1900] 광무4년 경자, 선생 48, 二江 유만식에게 서찰을 보내다.

 

朴承祚(1876.12.03.~1954.12.05.) : 경북 군위 우보 나호동 국내항일, 대통령표창(2008)

 

光武五年辛丑先生四十九歲答李貞會書廣州人田艮齋門人

[1901] 광무5, 선생 49, 이정회의 편지에 답하다. 광주이씨 전간재의 문인

 

光武六年壬寅先生五十歲移住道湖就閒調養于二子康殷第。○ 行先考緬禮舊兆不寜久營未遑至是命康夏敦事三百餘里移奉于懷仁鹽峙白石山辰坐之原慰朴顯(+西)夢魯書聞外姑訃書送李義大歸金浦詩幷書義大字明遠學精行端數年從學今乃歸覲。○ 入月裏寺調養從門生之請也

[1902] 광무6, 선생 50, 도호로 이주를 하였다. 둘째 아들 강은 집에 가서 한가하게 조양하였다. 先考(선고)緬禮(면례)를 하였다. 옛 무덤(舊兆)이 편안하지 못하고 오랫동안 관리할 겨를이 없어 이에 이르렀다. 강하에게 명하여 敦事를 하게하여 삼백여리가 되는 길을 회인 염티 백석산 辰坐之原으로 移奉(이봉)을 하였다. 박현서 몽로에게 서찰을 보내 위로하였다. 장모님(外姑) 부음 소식을 들었다. 이의대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내고 김포시를 짓고 편지를 썼다. 義大明遠이다 학문이 정통하고 행실이 바른 사람으로 수년 동안 나를 좇아 공부하다가 이제야 고향으로 돌아갔다. 월리사에서 조양을 하였는데 문생들의 청을 좇았다.

 

歸覲 : 부모를 뵙기 위해 타향에서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돌아옴.

 

光武七年癸卯先生五十一歲聞許蔿以議政府參贊出歎曰 何處義之前後不同也已矣已矣前旣倡義討復而未成今乃出仕與立同朝。○ 答李參判勝宇書以宗事請會謝未往。○ 慰李校理炳鋈書李公字範五號春岡以非罪久在(+:)及丁內艱其胤東寜代囚以書慰之。○ 秋哭庶弟起

[1903] 광무7년 계묘, 선생 51, 왕산 허위가 의정부참찬으로 출사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어찌 의리의 앞뒤가 다르게 처신하는가? 끝났구나! 끝났구나! 토복을 하려고 창의를 하였으나 성과를 이루지 못했는데, 이제 출사를 하여 같은 조정에 함께 서다니...참판 이승우의 서찰에 답하다. 宗事로 만나기를 청하였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홍문관 교리 이병옥에게 서찰을 쓰다. 이공의 자는 범오 호는 춘강이다 죄가 아닌데도 아아버지가 옥에 갖혀 있다가 모친상을 다하여 그 아들 동령을 대신 가두어 서찰로써 위로하였다. 가을에 庶弟 起가 죽었다.

 

李勝宇(1841~1914)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치경(稚敬), 호는 벽서(碧棲회와(晦窩). 효령대군(孝寧大君)15대손이며, 증 규장각제학 이종청(李鐘淸)의 아들이다.

李炳鋈 : 본관은 연안 한말의 문신 홍문관 교리 영해군수를 함. 독립운동가 이동녕의 아버지, 이동녕은 할아버지 이석구(충북 청원 후곡리)에게 한학을 배움.

丁內艱(정내간) : 모친상을 당하다.

 

光武八年甲辰先生五十二歲聞與日條約再成時與湖隱李上舍友蓮李參奉諸公痛哭而罷

[1904] 광무8년 갑진, 선생 52, 일본과 조약을 다시 맺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때에 호은 이상사와 우연이참봉과 제공들이 통곡하고 파하였다.

 

光武九年乙巳先生五十三歲湖上問答說成論理氣陰陽動靜之說。○ 幽居序成

[1905] 광무9, 선생53, 湖上問答說을 지었다. 이기음양동정지설을 논한 것이다. 유거서를 지었다.

 

光武十年丙午先生五十四歲華東史源序成友蓮李公炳勖所撰詩史自中華及我東先生書之

[1906] 광무10년 광무 10년 선생 54, 화동사원서를 지었다. 우연 이병욱공이 중국과 아국의 시사를 편찬항 것이다.

 

光武十一年丁未先生五十五歲風火作祟晩年長在病床弟子常以刀圭위사猶以學問講論不怠

[1907] 광무11, 선생 55, 風氣火氣가 빌미가 되어 만년에 오래 병상에 있었다. 제자들이 도규술을 가지고 섬겼으나 오히려 학문과 강론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隆熙元年戊申時以丁未爲純宗元年非紀年之大經也故移于此先生五十六歲正月十三日己亥辰時考終于後谷里第正寢晨起若無病坐誦易繫辭一二章及原始反終句後呼門生之在近者各以其事勉之遂命正席以終訃聞遠近莫不傷歎曰賢人亡矣知友驚哲人萎矣至如婦人輿臺皆言某老爺云亡巷里如空遂撤業停務者數日門人加麻如禮李炳國等以喪服終制者幾人同年四月葬于後谷炭峴酉坐之原士林會葬者四百餘人 執輓誄文來奠者百餘人

 

[1908] 융희원년 당시 정미년을 순종 원년으로 삼았다. 紀年大經이 아니므로 이곳에 옮겼다. 선생56세 정월13일 기해일 진시 후곡리 집 정침(주로 사용하는 방)에서 운명하셨다. 새벽에 일어나 병이 없는 것 같이 앉아서 주역계사 1~2장을 외우다가 원시반종구에 이른 후, 문생들 중 가까이 있는 사람을 불러 각각 그 일에 힘쓰도록 당부하고, 마침내 바르게 앉게 하고 운명하였다. 부음을 듣고 원근각지에서 슬퍼하지 않는 사랍이 없었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현인이 죽었구나! 지우들이 철인이 떠난 것을 놀라워하는구나! 至如婦人輿臺皆言某老爺云亡巷里如空드디어 일을 그만하고 업무를 멈춘 사람들이 數日門人加麻如禮이병국 등 상복의 복상을 끝낸 사람이 몇 사람이었다. 동년 사월 후곡 숯고개 유좌지원에 장사지냈다. 사림에서 장례에 모인 사람들이 400여인이고, 挽誄文을 가지고 와서 바친 사람이 百餘人이었다.

 

考終 : 목숨을 마침. 죽음. 正寢 : 주로 일을 보는 곳으로 쓰는 몸채의 방, 挽誄 : 만사(輓 詞)와 제문(祭 文). 죽은 사람을 위하여 지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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