止山 先生 年譜(44세~56세)
○ 建陽二年。高宗三十三年丙申。先生四十四歲。二月八日。與族大人起夏(字岐卿號小山。甁窩嗣孫也)。同訪許旺山蔿於州西甘川。議倡義事。○ 이월십일 을해 입김천역
○ [1895년] 건양 2년, 고종 33년 병신, 선생 44세, 2월 8일 족대인 기하(자 기경, 호 소산, 병와의 사손이다)와 같이 상주 서쪽 감천에 있는 왕산 허위를 방문하여 창의하는 일을 논의하였다.
♣ 병와(甁窩) 이형상(李衡祥)[1653~1733] : 본관은 전주이며, 효령대군의 10대손이다. 그의 자는 중옥(仲玉), 호는 병와(甁窩)·순옹(順翁)이다. 1677년(숙종 3) 사마시에 합격하고 1680년(숙종 6) 문과에 급제했다. 호조 좌랑·성주 목사·동래 부사·제주 목사 등을 역임하면서 많은 선정을 베풀었다. 제주 목사 재임 당시에는 제주 지역에 만연하던 미신을 타파하고 유학의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 큰 성과를 이룩했다.
이형상은 경주 부윤을 역임한 후 영천(경상북도 영천시 쌍계동)에 호연정(浩然亭)을 짓고 30년을 우거하면서 영천 일대의 많은 선비들과 학문적 교유와 더불어 후학 양성에 매진하였다. 1728년(영조 4) 경상도 소모사로 이인좌의 난을 진압하였으며, 경주 부윤을 역임하기도 했다. 1735년(영조 11) 영천의 성남 서원(城南書院)에 제향(祭享) 되었다. 1796년(정조 20) 청백리에 오르고, 1829년(순조 29)에는 제주 유생들이 그를 기려 영혜사(永惠祠)에 제향했다. 저서로 『병와집(甁窩集)』·『둔서록』·『강도지(江都志)』·『남환박물지(南宦博物誌)』·『악학편고(樂學便考)』·『예학편고(禮學便考)』·『성리학대전』 등 다수가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 十日乙亥 入金泉驛
○ 2월 10일 乙亥 김천역으로 들어갔다.
○ 十一日丙子。夜入據金陵
○ 2월 11일 병자 밤에 금릉에 들어가 웅거하였다.
○ 十五日庚辰。入龜城。
○ 2월 15일 경진 구성으로 들어갔다.
○ 二十日乙酉。還錦川。爲文告于祠堂。再到甘川。與許公蔿約定
○ 2월 20일 을유, 금천으로 돌아와 글을 지어 사당에 고하고, 다시 감천에 이르러 許蔿公과 약정을 하였다.
○ 二十七日壬辰。大會于黃岳寺。義士雲集。衆望所推咸曰。大將之任於先生。不可乃三讓后。登壇誓告于衆。以趙東奭爲軍門都摠。姜懋馨爲贊畫。許蔿爲參謀將。李時佐呂永昭爲書記。梁濟安爲中軍。尹鴻采爲先鋒。草檄通于列邑士林及義陣。
○ 2월 27일 임진, 황악사에서 크게 모여 의사들이 운집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신망을 받아 대장으로 추대하여 모두 ‘선생에게 대장의 소임을 맡으십시오.’라고 하자, 불가하다고 3번 사양한 뒤에 단에 올라가 많은 사람에게 誓告하기를 ‘趙東奭(조동석)을 軍門都摠(군문도총)으로 삼고, 姜懋馨(강무형)을 贊畫(찬획)으로 삼고, 許蔿(허위)를 參謀將(참모장)으로 삼고, 李時左 呂永昭(이시좌, 여영소)를 書記(서기)로 삼고, 梁濟安(양제안)을 中軍(중군)으로 삼고, 윤홍채를 선봉으로 삼는다.’라고 하고 격문과 통문을 작성하여 열읍(列邑)의 사람과 의진에 통보하였다.
* 呂永昭 : 呂永祚
○ 三月一日丙申。再入龜城。邑人懼之。○ 李在夏已逃躱。李周弼曺奭永。以軍需代贖。其餘皆赦。咸頌本城有再奠之。安發砲。兵二十名附本陣(軍容稍成。騎士三十餘人。步卒砲兵已數百人) ○ 時李判書容直。退在黃澗。而聞之。以其紅心洞山庄。許以餉軍。遂入據鍊兵。○ 柳公寅睦。自陜川敗歸。迎爲軍門執禮。
○ 3월 1일 병신 다시 구성에 들어갔는데 읍인들이 두려워하였다. 李周弼과 曺奭永이 군수품으로 대속(代贖)하였고 그 나머지는 다 사면하니 모두 본성이 다시 안정을 찾은 것을 칭송하는데 어찌 발포하겠는가? 병사 20명이 본진에 더하였다.(군용이 점차 갖추어졌다. 기사가 30여인 보졸과 포병이 수 백인이다.) ○ 때에 판서 이용직이 벼슬에서 물러나서 황간에 있었는데 의병이 일어났다는 것을 듣고 그의 홍심동 산장에서 餉軍할 것을 하락하여 드디어 들어가 웅거하여 군사를 훈련시켰다. ○ 양산 유인목공이 협천에서 패하고 돌아왔는데 군문집례의 예를 행하여 맞이하였다.
♣ 逃躱
○ 丁酉。建大將旗。整點軍哨。宣誓群衆。
○ 3월 2일 정유일 대장기를 세우고 군초를 가지런히 점검하고 군중에게 선서하였다.
○ 癸卯。前防守將李周善。爲參謀。得野譟兵三百餘人。前茂朱府使李倬。有願附之意。送火藥三百斤。○ 斥候來報。達城官兵一陣入據知禮。邑本陣將卒皆示。可用夜出二路。兵未至邑十里止舍。
○ 3월 8일 전방수장(前防守將) 이주선(李周善)을 참모로 삼았다. 야조병 300여인을 얻었다. 전 무주부사 이탁이 종군을 하려는 뜻이 있어 화약 300근을 보냈다. 읍의 본진의 장졸들이 다 보았다. 밤에 두 길로 나와서 병사들이 읍 십리에 이르지 않아서 멈추어 머물렀다.
♣ 願附之意 : 願從之意 종군을 원하는 뜻
○ 丙辰。移駐黃澗。
○ 3월 21일 병진일 황간으로 진을 옮겨 주둔하였다.
○ 丁巳。過永同界。問閔致純聚斂之罪。近邑守宰。貪贓及鄕曲武斷。皆聞夙逃焉。
○ 3월 22일 정사일 만치순의 취렴지죄를 물었다. 가까운 읍의 수령들이 재물을 거두어들이고 백성들을 억압으로 탄압하였다. 모두 민치순의 단죄를 듣고 일찍 달아났다.
♣ 聚斂 : 백성의 재물을 탐내어 함부로 거두어들임. 鄕曲武斷 : 시골에서 지위 있는 사람이 백성을 위엄과 억압으로 내려 누름을 말함.
○ 庚申。移陣于俗離山下帳內。
○ 3월 25일 경신일 속리산 아래 장내리로 진을 옮겼다.
○ 癸亥。移陣于聞慶大井。
○ 3월 28일 계해일 진을 문경 대정으로 옮겼다.
○ 四月三日戊辰。傳任于趙都摠。
○ 4월 3일 무진일 趙東奭 군문도총에게 대장의 임무를 넘겼다.
○ 六月長子康夏。逮繫尙州獄。
○ [1896년] 6월 장자 강하가 체포되어 상주 옥에 수감되었다.
♣ 逮繫 : 붙잡아서 옥에 가둠.
○ 光武元年丁酉。先生四十五歲。時二雲學士。居憂於文義鄕廬。請移先生杖屨於文上。遂移就之 春長胤擧家先往。○ 先生在京陳疏未徹。楊州故嶺。尹判書宜善號退樵。請邀而甚禮之。數日留話。有酬唱詩。○ 夏南遊洛東江上數月。與柳二江 同伴。從游諸公甚衆 ○ 因入河回拜石湖柳先生。訪霞隱柳公臣榮 及弟號東濬。志同義合。相與甚歡。數朔見留。多有述作而幷逸之。
○ [1897년] 광무원년 정유, 선생 44세 때에 이운 이의국 학사가 문의 향려에 상제로 있어, 선생에게 杖屨를 문의로 옮길 것을 청하여 마침내 이사를 하였는데 봄에 長子 강하가 가족을 이끌고 먼저 갔다. ○ 선생께서 서울에 계시면서 상소를 올렸으나 관철되지 않았다. 양주 고령의 판서 호 퇴조 윤의선 공이 청하여 맞이하면서 매우 예의가 있었다. 수일동안 머물면서 이야기하였고 수창한 시가 있다. ○ 여름에 남쪽 낙동강 가를 몇 달 동안 유람하였다. 柳二江 과 동반하였는데 좇아서 유람하는 諸公 들이 매우 많았다. ○ 이로 인하여 하회마을에 들어가 류석호 선생께 인사를 드리고, 하은 류신영 공과 아우 (호 東濬)을 방문하였는데, 뜻이 같고 의기가 투합하여 서로 더불어 매우 환영하였다. 몇 달 동안 머물면서 술작한 것이 많았고 편안하게 지냈다.
☞ 하은(霞隱) 류신영(柳臣榮)
류신영(柳臣榮 1853.6.27.~1919.2.2.) (항일자정순국)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경부(敬夫). 호는 하은(霞隱). 출신지는 풍남면(豊南面) 하회동(河回洞:현 풍천면 하회리). 류신영은 경술국치(庚戌國恥) 때 순절한 류도발 (柳道發 )의 큰아들이다. 그는 1919년 2월 고종황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장례에 아들 종묵 (宗黙)을 참례시킨 뒤, 3월 3일 (음 2.2) 독약을 마시고 자결 하였다. 1968년 대통령표창, 1991 건국훈장 애국장. ▣ 『기려수필 』, 『한국독립사』 하권 『독립운동사』 7 권
☞ 류동준(柳東濬, 1859∼1939) : 호는 시산(時山), 본관은 풍산(豊山)이다.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의 후손이며, 생부는 류도발(柳道發)이고 양부는 류도성(柳道誠)이다. 저서로는 『시산집』이 있다.
☞ 居憂 : 상제로 있는 동안, 杖屨: 장구(지팡이와 신)
○ 光武二年戊戌。先生四十六歲。春始還文義寓所。自是遠近諸子。日益進。○與翰林義國書。論出仕大義。
○ [1898년] 광무2년 무술, 선생 46세, 봄에 비로소 문의 寓所(우거하는 곳)로 돌아왔다. 이로부터 원근의 제자들이 날로 더욱 나아갔다. ○ 한린학사 이의국에게 서찰을 보냈는데 출사의 대의를 논하였다.
☞ 寓所 : 임시로 몸을 붙여 살고 있는 곳.
○ 光武三年己亥。先生四十七歲。廣居亭成。黌舍難容。遂不日構成。命名曰 廣居 先生作上梁文及四律原韻。七絶八景。遠近士友多有和之者。
○ [1899년] 광무3년 기해, 선생 47세, 광거정(廣居亭)을 지었다. 횡사(글방)이 비좁아서 드디어 날이 오래 걸리지 않고 집을 짓고 명명하여 광거정이라고 하였다. 선생께서 상량문과 4율원운, 7절팔경을 지으니, 원근의 사우들이 화답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 黌舍 : 서당, 글방
○ 光武四年庚子。先生四十八歲。與柳二江書。○ 送朴承祚南歸有序
○ [1900년] 광무4년 경자, 선생 48세, 二江 유만식에게 서찰을 보내다.
☞ 朴承祚(1876.12.03.~1954.12.05.) : 경북 군위 우보 나호동 국내항일, 대통령표창(2008)
○ 光武五年辛丑。先生四十九歲。答李貞會書。廣州人。田艮齋門人。
○ [1901년] 광무5년, 선생 49세, 이정회의 편지에 답하다. 광주이씨 전간재의 문인
○ 光武六年壬寅。先生五十歲。移住道湖。就閒調養于二子康殷第。○ 行先考緬禮。舊兆不寜。久營未遑至是。命康夏敦事。三百餘里。移奉于懷仁鹽峙。白石山辰坐之原。○ 慰朴顯(土+西)夢魯書。聞外姑訃書。○ 送李義大歸。金浦詩幷書。義大字明遠。學精行端。數年從學。今乃歸覲。○ 入月裏寺調養。從門生之請也。
○ [1902년] 광무6년, 선생 50세, 도호로 이주를 하였다. 둘째 아들 강은 집에 가서 한가하게 조양하였다. ○ 先考(선고)의 緬禮(면례)를 하였다. 옛 무덤(舊兆)이 편안하지 못하고 오랫동안 관리할 겨를이 없어 이에 이르렀다. 강하에게 명하여 敦事를 하게하여 삼백여리가 되는 길을 회인 염티 백석산 辰坐之原으로 移奉(이봉)을 하였다. ○ 박현서 몽로에게 서찰을 보내 위로하였다. 장모님(外姑) 부음 소식을 들었다. 이의대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내고 김포시를 짓고 편지를 썼다. 義大는 字가 明遠이다 학문이 정통하고 행실이 바른 사람으로 수년 동안 나를 좇아 공부하다가 이제야 고향으로 돌아갔다. ○ 월리사에서 조양을 하였는데 문생들의 청을 좇았다.
☞ 歸覲 : 부모를 뵙기 위해 타향에서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돌아옴.
○ 光武七年癸卯。先生五十一歲。聞許蔿以議政府參贊出。歎曰 何處義之前後不同也。已矣已矣。前旣倡義討復而未成。今乃出仕與立同朝。○ 答李參判勝宇書。以宗事請會謝未往。○ 慰李校理炳鋈書。李公字範五號春岡。以非罪久在(糸+累:누)絏。及丁內艱。其胤東寜代囚。以書慰之。○ 秋哭庶弟起
○ [1903년] 광무7년 계묘, 선생 51세, 왕산 허위가 의정부참찬으로 출사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어찌 의리의 앞뒤가 다르게 처신하는가? 끝났구나! 끝났구나! 토복을 하려고 창의를 하였으나 성과를 이루지 못했는데, 이제 출사를 하여 같은 조정에 함께 서다니...○ 참판 이승우의 서찰에 답하다. 宗事로 만나기를 청하였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홍문관 교리 이병옥에게 서찰을 쓰다. 이공의 자는 범오 호는 춘강이다 죄가 아닌데도 아아버지가 옥에 갖혀 있다가 모친상을 다하여 그 아들 동령을 대신 가두어 서찰로써 위로하였다. ○ 가을에 庶弟 起●가 죽었다.
☞ 李勝宇(1841~1914)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치경(稚敬), 호는 벽서(碧棲)·회와(晦窩). 효령대군(孝寧大君)의 15대손이며, 증 규장각제학 이종청(李鐘淸)의 아들이다.
☞ 李炳鋈 : 본관은 연안 한말의 문신 홍문관 교리 영해군수를 함. 독립운동가 이동녕의 아버지, 이동녕은 할아버지 이석구(충북 청원 후곡리)에게 한학을 배움.
☞ 丁內艱(정내간) : 모친상을 당하다.
○ 光武八年甲辰。先生五十二歲。聞與日條約再成。時與湖隱李上舍。友蓮李參奉。諸公痛哭而罷。
○ [1904년] 광무8년 갑진, 선생 52세, 일본과 조약을 다시 맺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때에 호은 이상사와 우연이참봉과 제공들이 통곡하고 파하였다.
○ 光武九年乙巳。先生五十三歲。湖上問答說成。論理氣陰陽動靜之說。○ 幽居序成。
○ [1905년] 광무9년, 선생53세, 湖上問答說을 지었다. 이기음양동정지설을 논한 것이다. ○ 유거서를 지었다.
○ 光武十年丙午。先生五十四歲。華東史源序成。友蓮李公炳勖。所撰詩史。自中華及我東。先生書之
○ [1906년] 광무10년 광무 10년 선생 54세, 화동사원서를 지었다. 우연 이병욱공이 중국과 아국의 시사를 편찬항 것이다.
○ 光武十一年丁未。先生五十五歲。風火作祟。晩年長在病床。弟子常以刀圭위사。猶以學問講論不怠。
○ [1907년] 광무11년, 선생 55세, 風氣와 火氣가 빌미가 되어 만년에 오래 병상에 있었다. 제자들이 도규술을 가지고 섬겼으나 오히려 학문과 강론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 隆熙元年戊申。時以丁未爲純宗元年。非紀年之大經也。故移于此。先生五十六歲。正月十三日己亥辰時。考終于後谷里第正寢。晨起若無病坐誦易繫辭一二章。及原始反終句後。呼門生之在近者。各以其事勉之。遂命正席以終。訃聞遠近莫不傷。歎曰賢人亡矣。知友驚哲人萎矣。至如婦人輿臺皆言。某老爺云。亡巷里如空。遂撤業停務者。數日門人加麻如禮。李炳國等。以喪服終制者幾人。同年四月葬于後谷炭峴。酉坐之原。士林會葬者。四百餘人 。執輓誄文來奠者。百餘人。
○ [1908년] 융희원년 당시 정미년을 순종 원년으로 삼았다. 紀年의 大經이 아니므로 이곳에 옮겼다. 선생56세 정월13일 기해일 진시 후곡리 집 정침(주로 사용하는 방)에서 운명하셨다. 새벽에 일어나 병이 없는 것 같이 앉아서 주역계사 1~2장을 외우다가 원시반종구에 이른 후, 문생들 중 가까이 있는 사람을 불러 각각 그 일에 힘쓰도록 당부하고, 마침내 바르게 앉게 하고 운명하였다. 부음을 듣고 원근각지에서 슬퍼하지 않는 사랍이 없었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현인이 죽었구나! 지우들이 철인이 떠난 것을 놀라워하는구나! 至如婦人輿臺皆言。某老爺云。亡巷里如空。드디어 일을 그만하고 업무를 멈춘 사람들이 數日門人加麻如禮。이병국 등 상복의 복상을 끝낸 사람이 몇 사람이었다. 동년 사월 후곡 숯고개 유좌지원에 장사지냈다. 사림에서 장례에 모인 사람들이 400여인이고, 挽誄文을 가지고 와서 바친 사람이 百餘人이었다.
☞ 考終 : 목숨을 마침. 죽음. 正寢 : 주로 일을 보는 곳으로 쓰는 몸채의 방, 挽誄 : 만사(輓 詞)와 제문(祭 文). 죽은 사람을 위하여 지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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