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周而不比/도솔잡기

망백(望百)의 어머님과 시간 여행(150828~30)

도솔산인 2015. 8. 29. 00:29

 

망백(望百)의 어머님과 시간 여행(150828~30)

 

 

▣ 일  시 : 2015년 08월 28일 - 30일(2박 3일)

▣ 장  소 : 안면도 리솜 리조트 캐슬

▣ 인  원 : 4명(어머니, 둘렵이, 승학이) + 둘째누님 부부, 여동생 부부

 

 

1. 2015년 8월 28일(금)

 

  망백(望百, 91세)의 어머니를 모시고 안면도(安眠島)에 가는데, 함께 동행한 것은 둘째 둘렵이와 셋째 승학이, 흑염소는 일이 있다고해서 동행하지 않았다. 금요일 퇴근하고 부랴부랴 준비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흑염소에게 준비를 정중히 부탁했는데, 양파 4개, 마늘다짐 약간, 된장, 파 약간, 겉절이와 묵은 김치, 예상대로 아이스박스에는 귀차니즘이 그대로 담겨있었다.

 

  나는 신속하게  마늘 썰고, 양념장 담고, 텃밭에서 청량고추를 따서 썰고 나머지는 넣고, 가지 6개 추가, 멸치, 쌀, 식용유, 들기름, 진간장, 국간장, 쓰다 남은 개스 4통, 커피, 슈가, 압력밥솥에 후라이팬, 버너 2개를 챙기고, 등산용 D팩에 양념 일체, 천도 복숭아, 황도, 이웃집에서 호박잎 따고 애호박 하나 얻고, 고기집으로 달려가서 삼겹살 두 근, 목살 한 근, 수육 거리 두 근, 번개불에 콩 튀기듯 각자도생(各者圖生)의 정신으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며 동선(動線)을 최소화했다. 그리고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출발했다.

 

 

연소재 텃밭의 수세미

 

 

2. 8월 29일(토)

 

  지난 밤 저녁 늦게(21:00) 도착해서 삼겹살 구워드리고 저녁을 먹었다. 잠을 자야하는데 한숨도 주무시지 않고 '여기가 어디여? 여기가 누구 집여?'라고 하시며 불을 켜고 나를 깨워 자는 둥 마는 둥 아침을 맞았다. 고기를 구워드리고 나서 '고기 드신 것 기억해요?'라고 물으면 '언제 먹었냐?'라고 자꾸 되물으시고 기억장애가 더 심해진 것 같았다. 하는 수 없이 열쇠 카드를 빼서 불이 켜지지 않게 하고, 잠시 눈을 붙이고 일어나니 날이 샜다. 어머니께서는 이 세상에서 가장 만만한 사람은 아들이니 감정의 기복을 그대로 표출하신다. 홀로 아침 산책을 가고 싶지만 여의치 않아 어머니에게 바람을 쏘이러 가지고 말씀드리고 모시고 나오니, 숙소에서 꽃지해수욕장까지 상당한 거리라 차를 끌고 꽃지 주차장으로 가서 방포항 방파제까지 산책을 했다. 살아오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셨고 아버님께서 성품이 유하셔서 늘 마음에 차지 않았는데, '늦게 둔 아들이 키우면서 대가 너무 쎄서 걱정을 했지만, 사리가 있으며 경우에 빠지는 일을 하지 않아 마음속으로 흡족했다.'라는 말씀을 하셨다. 어머니보다 나를 더 아는 사람이 세상에 있을까?

 

  내가 '어머니의 바람대로 교직에 들어갔고, 28년 동안 맞지 않는 옷을 입고 훈장질을 했다.'라고 하니 어머니曰 '본래 큰일을 할 놈인데 작은 일을 하니 얼마나 꼼꼼히 잘하겠느냐?' '내가 처음으로 입 밖에 내는 이야기인데, 항상 문중의 대소사를 주관하여 집안을 이끌고 어떤 어려운 일도 거뜬히 해내니 든든하고 자랑스럽다.'라고 하셔서 처음 듣는 칭찬이라 어머니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구순(九旬)의 노모와 손을 잡고 바닷가를 걸었다. 아마 이것도 돌아올 수 없는 시간 여행일 것이다. 이순(耳順)이 가까운 아들은 어머니의 잡은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문중의 일은 족보와 조상 산소의 면례, 그리고 사초와 석물을 주관했다. 어려운 일은 83년 연소재를 직접 지었고, 85년 서울에 가서 둘째 누님의 집을 지어드린 일이며, 95년 소엽어린이집 신축, 2010년 유성구 봉명동에 어린이집을 신축했고, 아버지께서 물려주신 시장의 점포 증개축을 여러 번하였으니, 노가다 8단을 두고 하신 말씀 같았다.  

 

 

일출

 

 

 

 

 

꽃지해수욕장 방향

 

 

꽃지해수욕장의 명물 할매바위 할배바위

 

 

 

 

水落石出이라더니 물이 빠진 후 갯벌이 바닥을 드러내니 세속의 일이나 자연의 이치나 다른 것이 없다.

 

 

꽃지橋

 

 

왼쪽으로 리솜리조트 캐슬

 

 

  꽃지해수욕장 주차장에 다시 돌아와 백사장 해수욕장까지 아침 드라이브를 하였다. 백사장 해수욕장 안면도 수협 공판장에 가서 장을 보았다. 리조트에서 제공하는 아침을 뷔페에서 함께 먹고 커피를 타서 드리고 다시 해변으로 나와 소나무 숲 데크에서 여유있게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리조트 프론트에 가서 해변가 방으로 교체해줄 것을 요청하고 올라가 둘렵이와 승학이에게 아침을 먹였다. 우럭구이를 했는데 여름 염장 건조식품이라 승학이는 짜다고 투정하였고 둘렵이는 말 없이 맛있게 먹더라.

 

 

 

 

 

 

 

어머니께서는 아득한 수평선이 30리쯤 되냐고 물으셨고 나는 백리가 넘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우럭구이

 

 

수협공판장에서 구입한 반건조 생선

 

 

 

 

 

 

 

  아침을 먹고 해변이 보이는 방으로 옮겼다. 둘째 누님과 막내 여동생이 온다고 하여 점심을 준비했다. '동기지친(同氣之親)은 여족여수(如足如手)라.'라고 했던가? 어릴 때 한 이불 덮고 한솥밥 먹으며 같은 집에서 함께 자라고, 성장하여 성가를 이루어 독립한 뒤, 1년이면 서너 번 만나 어린 시절을 회고하면서 우애를 지키는 것이 인간의 도리이다. 어려움이 생기면 서로 돕고, 좋은 일을 함께 기뻐하며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는 것이 우애라고 생각한다. 우리 형제 남매처럼 우애가 있는 집은 드물다. 자수성가한 둘째 누님은 사업가로 성공하셨고, 막내 동생은 공사에 다니는 성실한 남편을 만나 행복하게 살고 있다. 각자무치(角者無齒)라는 말이 있듯, 돈이 많이 있다고 해서 행복한 것은 아니다. 물질적인 풍요보다 자기가 추구하는 삶의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 참된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둘째누님 부부가 오셔서 점심을 해드리고 함께 꽃지까지 산책을 했다. 82년 차이 손자는 할머니의 손을 잡고 앞서가고 나는 뒤를 따랐다. 아직 사리를 분간하지 못하는 저 녀석도 우리 집에서 서열 1위는 할머니로 알고 있다. 마흔아홉에 얻은 막내는 내가 우리 어머니에게 드린 최고의 선물이다. 치매가 있어도 승학이에게 집중하시는 어머니에게는 삶의 원동력이고 활력소가 된다. 자식이 무엇인지 몰라도 사랑과 집착을 혼동해서는 안 되지만, 어머니의 손자 사랑은 예외라고 할 수 있다.

 

 

 

 

 

 

 

 

 

 

 

일몰

 

 

 

 

  오후에 막내 부부가 광주에서 문어를 사가지고 왔다. 바지락과 문어 그리고 반건조 생선이 술을 돕고 나는 이번에도 셰프로서 역할에 충실했다. '누님! 승학이 에미가 요리 잘하는 놈보다 부드러운 놈이 좋다고 하네요. 글쎄 최원장의 어린이집이 공공형 어린이집으로 선정되었어요.' 누님과 여동생은 자기 일처럼 기뻐하였고 자형과 매제도 훈수를 두었다. 술이 부족해서 매제가 마트에 내려가 술을 사 나르고 나는 문어를 삶고 여동기와 남매지간, 처남과 매부는 돈독한 우애를 나누었다. 술자리가 파하고 아이들과 어머니를 모시고 해변 백사장에서 불꽃놀이를 하였다.

 

 

 

 

 

 

 

 

  쉰동이 막내

 

 

 

 

안면도 자연휴양림의 봉우리 이름은 참으로 요상타.

 

 

 

 

 

 

 

 

 

 

 

 

 

 

 

 

 

 

 

 

 

 

 

 

 

  일본이 조선을 사랑한 징표인 이 하트 문양은 전국 소나무가 있는 곳이면 어느 곳이든 없는 곳이 없다. 속에서 불끈 화가 치밀어 올랐다. 고종과 민비가 군수와 현감자리까지 팔아먹었으니, 신하가 나라를 팔아먹은들 누구를 탓하겠는가? 국운이 쇠해도 자기 배만 채우기 급급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했다. 우리가 학교에서 일본에 대해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가도 돌아볼 일이다. 일본을 증오의 대상이 아닌 냉정하고 면밀하게 분석·평가하여 아이들을 수백 년 훈육한 뒤에라야 일본을 겨우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한다.

 

 

 

 

 

 

 

3. 8월 30일(일)

 

  여행 3일째 아침 누님과 여동생은 어머니를 모시고 사우나를 다녀오고 나는 아침준비를 했다. 서둘렀지만 오전 10시가 다되어 리조트를 나왔다. 돌아오는 길에 안면도 휴양림을 둘러보고 누님 부부와 작별하고 대전을 향했다. 홍성 갈산(葛山) 터널을 지나며 오두리라는 지명이 눈에 들어왔다. 홍성군 갈산면 오두리는 조선 중기 사대부 여류시인 호연재 안동김씨의 출생지이고 친정집이 있던 곳이다. 곧 이어서 나타나는 '백야(白冶) 김좌진 장군의 생가'의 이정표를 보고 나도 모르게 핸들을 그쪽 방향으로 돌렸다. 白冶의 생가는 4차선 국도에서 바로 지척(只尺)에 있다. 문화 해설사 시영배님과 백야가 문충공 김상용선생의 11대 후손인가를 묻고 약간의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 분도  대강만 알고 있었고 자세한 내용은 모르는 것 같았다. 문화해설사의 방에는 백야(白冶)의 사진과 해방정국의 협객 김두한 의원의 사진이 나란히 걸려있었다. 내친 김에 만해(卍海) 한용운 선생의 생가가 인근에 있어 그곳에도 잠시 들렀다. 만해(卍海)와 백야(白冶)는 10년 차이로 윤봉길의사와 더불어 일제시대 내포(內浦)가 낳은 최고의 독립운동가다. 김호연재가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화약고에 불을 지르고 순절한 문충공 김상용 선생의 고손녀이고, 백야(白冶)가 문충공(文忠公)의 11대 후손이니 하늘은 속일 수 있어도 피는 속일 수 없다.

 

 

 

                                    斷腸之痛

 

                                                        김좌진(1889~1930)

 

                               적막한 달밤에 칼머리 바람은 세찬데

                               칼끝에 찬서리가 고국생각을 돋는구나

                               삼천리 금수강산에 왜놈이 웬 말인

                               단장의 아픈 마음 쓰러버릴 길 없구나

 

 

 

 

 

 

백야의 생가

 

白冶는 홍주 의병장 지산(志山) 김복한(金福漢)선생의 종숙(1860 ~1924)으로 촌수는 백야가 한 항렬 높지만 지산(志山)의 영향을 받았다.  

 

 

  金福漢(1860 ~1924) : 본관 안동(安東) 호 지산(志山), 자 원오(元五) 적극적인 실천유학의 자세를 취했고, 한말 의병의 최초 기의자(起義者)이다. 1892(고종 29) 별시문과에 급제한 뒤, 홍문관교리·사서·대사성·승지 등을 역임했다. 18946월에 갑오개혁이 시작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갔다. 이듬해 8월에 민비가 일제에 의해 학살되고, 11월 단발령이 내리자 이설(李偰, 1850~1906안병찬(安炳讚, 1854~1929) 등과 함께 홍주목사 이승우(李勝宇)를 권유하여 의병을 일으켰으나, 이승우가 일제와 내통함으로써 일본군에 잡혀 투옥되었다. 고종의 특지로 석방된 뒤, 성균관장·중추원의관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후진양성에 힘썼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설과 함께 이완용 등 을사오적의 참수(斬首)를 청하는 소를 올려 투옥되었다. 1906년에도 민종식(閔宗植)과 홍주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우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07년 의병 은닉과 민심선동 혐의로 체포되어 공주로 압송되는 도중에 일본순검에게 무수히 구타당해 그 후유증으로 평생 동안 식사와 용변을 다른 사람의 힘에 의지해야 했다. 그 뒤 일제의 감시 속에 두문불출하다가 19193·1운동 뒤 영남의 곽종석(郭鍾錫)과 함께 호서(湖西)의 유림을 대표하여 전국 유림 137명의 서명을 받아 파리 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인 파리장서(巴里長書)를 보냈다. 이 일로 체포되었으나, 90여 일 만에 중병으로 석방되었다. 1921년부터는 인지사(仁智社)를 세워 후진양성에 힘썼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펌]

 

 

 

 

 

 

                                   尋牛莊

 

                                            한용운(1879~1944)

 

                               잃은소 없건만은

                               찾을손 우습도다

                               만일 잃을씨 분명타 하면

                               찾은들 지닐소냐

                               차라리 찾지말면

                               또 잃지나 않으리라

 

 

 

 

 

 

 

 

 

만해의 생가

 

 

 

 

 

 

 

  집에 들어오니 흑염소는 생선을 꺼내 광주리에 널었고, 나는 2층 서재 테라스에 갖다 놓았다. 당주(堂主) 曰 '가족을 위해 사온 것이 아니고 등산 가려고 사왔네요?' 나는 묵묵부담(默默不答)하고, 가지고 온 수육거리를 삶아 장인 장모님 드시라고 처가에 갖다드렸고, 승학이는 고모들에게 타온 용돈으로 온 가족들에게 통닭을 쏘았다. 어머니는 시간 여행의 여독이 풀리지 않았는지 깊은 잠에 빠지셨다. 나는 멍하니 2층 연소재에서 아무 생각없이 앉아있다. 생선이 가까이 있으니 비린내가 진동했다.

 

 

♣ 어머님의 어록 : 휴양림에서 둘렵이와 손잡고 가는데 뒤에서 '둘렵이가 외삼촌과 키가 비슷하네.'  어찌할꼬. 아들(나)을 둘렵이 외삼촌으로 착각하셨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