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盈科後進/고전향기

[한시감상 096] 술은 나의 벗

도솔산인 2014. 10. 2. 14:07

 

[한시감상 096] 술은 나의 벗

 

 

[對酒拈白集韻] : 술잔을 마주하고 백거이 시집의 운자를 뽑다

 

頭白窮山裏 : 흰 머리로 깊은 산속 들어앉아

婆娑獨自娛 : 한가롭게 홀로이 즐거워한다.

淸幽大抵有 : 이곳은 맑고도 그윽한 곳이라

喧閙一齊無 : 세상 시끄러움 전혀 없다네

得酒花相勸 : 술 대하니 꽃이 마시라 권하고

吟詩鳥共呼 : 시 읊으니 새가 함께 지저귀누나

尤欣北窓下 : 더욱 흐뭇한 일은 북창 아래서

日暮枕空壺 : 저물녘에 빈 술병 베는 거라오

 

- 이진망(李眞望, 1672~1737)

「술잔을 마주하고 백거이 시집의 운자를 뽑다[對酒拈白集韻]

『도운유집(陶雲遺集)』 책(冊)1

 

궁벽한 산속에 사는 백발의 노인이 있다. 한가로이 산수(山水) 속에 소요(逍遙)하면서 조용하고 담박한 삶을 즐긴다. 맑고도 그윽한 풍광은 황혼에 접어든 인생에 어울리는 옷과 같고 시끄러운 세상일은 하얗게 세어 버린 머리카락처럼 빛깔을 잃었다. 찾아오는 벗이 없어 술상 마주할 이 없는데 곁에서 웃고 있는 꽃들이 술 마시라 권하고, 외로이 앉아 시를 읊조리노라면 나뭇가지에 앉은 새들이 정겹게 지저귀며 시심(詩心)을 돕는다. 잔을 들고 시를 읊는 사이 어느덧 뉘엿뉘엿 저무는 석양이 하늘을 물들이면 시는 쌓이고 몸은 거나해져 뿌듯한 마음으로 다 마셔버린 술병을 베고 깊은 잠이 든다.

 

이 시를 지은 이진망은 영의정과 대제학을 지낸 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의 증손이다. 그 역시 대제학을 지내고 예조 판서까지 올랐는데, 술을 유독 좋아하였던 모양이다. 문집에 수록된 시 가운데 술을 읊은 시가 적지 않은 양을 차지하고 있는 데다 그 내용 역시 애주가(愛酒家)로서의 다양한 면모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식사하면서 반주를 마시다 갑자기 흥이 일어 한 잔이 다음 잔을 부르는데 결국에는 생선회까지 곁들이고 입이 원하는 대로 거푸 술잔을 비우며 과음(過飮)도 꺼리지 않고(「대주(對酒)」), 예순 나이에 마음은 텅 비어 어떤 일에도 관심이 없는데 술잔만 보면 군침이 돌면서 마음이 들뜨기도 하고(「야리대주(夜裏對酒)」), 취해 쓰러져 자다가 술이 모자랐는지 일어나서는 술병에 술이 남은 것을 기뻐하며 마저 비우기도 하고(「야중취기(夜中醉起)」), 닭 우는 소리에 문득 깨어 일어나니 산은 온통 새하얗게 눈으로 덮여 있고 새벽 한기가 몸을 오그라들게 하는 때 무료한 마음 달랠 길 없어 화로(火爐)를 끼고 술잔을 데우기도 한다(「효기음주(曉起飮酒)」).

 

그는 시에서 호젓하게 혼자 앉아 술을 먹는 정경을 자주 묘사하곤 하는데 술을 좋아하는 마음의 솔직한 고백이기에 읽는 이를 미소 짓게 하지만 자못 정도에 지나친 측면이 엿보이기도 한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고 하지 않던가. 북송(北宋)의 유학자 소옹(邵雍)은 항아리로 창을 낸 누추한 집을 지은 뒤 안락와(安樂窩)라 명명하고, 그 안에 들어앉아 새벽에는 향을 피우며 고요히 정좌(靜坐)하고, 하루의 대부분은 책을 읽으며 한가로이 지내다가 저물녘이 되면 술 서너 잔을 마시되 몸이 살짝 따뜻해질 정도로만 마시는 것으로 하루를 마쳤다고 한다. 이진망처럼 술을 즐기는 것이 운치가 있기도 하겠지만 소옹처럼 학문에 매진하는 삶 속에서 술을 벗하는 것도 나름대로 멋이 있는 일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 이진망이 차운한 백거이(白居易, 772~846)의 원시는 「유몽득이 와병한다기에 술을 들고 찾아갈 적에 먼저 이 시를 부치다[夢得臥病 攜酒相尋 先以此寄]」이다. 유몽득(劉夢得)은 당(唐)나라 때 시인 유우석(劉禹錫, 772~842)으로, 몽득은 그의 자(字)이다. 백거이와 벗하며 많은 시들을 주고받아, 후대에 유백(劉白)으로 병칭되기도 한다. 참고로 원시를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병들어 찾아오는 손님 적을 터, 누군가 함께 즐거워할 이 있는가. 시간이 늦었는데 문은 열어 놓았는가, 가을 날씨 쌀쌀한데 술은 남아 있는가. 본래 그대 위문하는 것이 마땅하거니, 어찌 꼭 그대가 부르기를 기다리겠나. 가벼운 병에야 음주가 무방하리니, 다시 술 한 병 가지고 가야 하리.[病來知少客, 誰可以爲娛. 日晏開門未, 秋寒有酒無. 自宜相慰問, 何必待招呼. 小疾無妨飮, 還須挈一壺.]”

 

글쓴이 : 변구일(한국고전번역원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