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盈科後進/고전향기

최연의 안노설(雁奴說)

도솔산인 2013. 7. 9. 19:12

최연의 안노설(雁奴說)

 

- 보초 기러기의 딜레마 -

 

 

전통시대 기러기는 긍정적 이미지이다. 삼각형 모양으로 가지런히 나는 모습을 보고 안행(雁行)이라고 하여 질서를 생각했고, 평생 제짝 이외에는 거들떠보지 않는다는 기러기를 목각으로 만들어 전안(奠雁)이라고 하여 혼례에 예물로 사용했다. 말하자면 부부간의 신뢰의 상징인 셈이다. 이 밖에도 남북을 오가는 철새이다 보니 고향 떠난 이들에게 소식을 전해 주는 새로 생각되었다. 기러기 아빠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 특징을 빗대어 만들어진 명칭이다. 이런 기러기에 대한 우화 한 가지를 소개한다.

기러기란 놈은 해를 따라서 남북을 오가는 철새이다. 십 백여 마리가 한 무리가 되어 한가롭게 날며 조용히 모여서 물가에서 잠을 잔다. 잠을 잘 때는 보초 기러기로 하여금 사방을 살펴 지키게 하고는 그 속에서 대장 기러기들이 잠을 잔다. 사람들이 틈을 엿보아 조금이라도 가까이 가면 즉시 보초 기러기가 알리고 여러 기러기는 깨어 일어나 높이 날아 올라가니 그물도 펼칠 수 없고, 주살도 던지지 못한다. 보초 기러기가 주인을 지키는 공은 그 무엇에도 비할 것이 없다.

사람들은 불을 가지고서 기러기를 잡는다. 어둠이 내리기를 기다렸다가 항아리 속에 촛불을 넣고 불빛이 새지 않도록 감추어서 가지고 간다. 살금살금 다가가서 촛불을 조금만 들어 올린다. 보초 기러기가 놀라 울고 대장 기러기도 잠이 깬다. 그 때 바로 촛불을 다시 감춘다. 조금 후 기러기들이 다시 잠이 들면 또 전처럼 불을 들어 보초 기러기가 울도록 한다. 이렇게 서너 번 하는 동안에 기러기들이 깨어나 보면 아무 일이 없으니 대장 기러기가 도리어 보초 기러기에게 거짓말을 했다고 하여 쪼아 버린다. 그러면 다시 촛불을 들더라도 보초 기러기가 쪼일까 두려워서 울지 못한다. 이때 사람이 덮쳐서 한 마리도 남김없이 모조리 잡아 버린다.

아! 보초 기러기는 참으로 충직하고, 사람들의 꾀는 정말로 교활하며, 대장 기러기의 미혹은 심하기 그지없도다. 그러나 어찌 기러기만 이럴 뿐이겠는가! 사람도 또한 이와 같아서 편안함만 찾으며 고식적으로 대처하여 외적을 돌아보지 않고, 간교한 적의 꾀에 놀아나서 도리어 충성스럽고 어진 신하를 불신하여, 끝내 적의 독수에 당해도 깨닫지를 못한다. 크게는 망국(亡國)하고 작게는 패가(敗家)하니 이 또한 매우 미혹한 것이 아닌가? 슬프다! 무릇 사람이 되어서 그 주군이 위험을 당하는데도 구하지 않는 자들은 이 보초 기러기를 본다면 부끄러움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기러기가 비록 미물이지만 큰 것을 깨우쳐 주니 내가 이에 보초 기러기에 대한 이야기를 짓노라.

 

雁之爲物, 隨陽南北, 無常棲. 十百爲群, 閒飛靜集. 宿沙渚間, 則令雁奴四圍而警捕, 大者居其中. 人若伺, 殆少近, 則奴輒告之亟, 群雁警起, 飛翔高擧. 罿罻不能施; 弋人無所慕, 奴之衛主, 功鮮有儷.

人有以火探捕者, 候陰暗密藏燭於瓦罏中, 持棒者隨之. 潛行將及, 秉燭略擧. 奴卽驚叫, 大者亦寤. 便匿其火, 則須臾復定. 又如前擧燭, 奴又奔告, 如是者數四, 頻驚而無捕. 則大者反以奴爲不直爭啄, 人復擧燭, 則奴懼其啄不復驚. 人遂逼之, 一網打盡, 殆無遺類.

嗚呼! 奴之忠勤矣; 人之計狡矣; 雁之惑甚矣. 豈獨雁然! 人亦有焉. 偸安姑息, 不恤外侮. 受紿於奸狡, 反不信忠賢, 終必爲所中而莫之悟. 大則亡國; 小則敗家, 不亦惑乎? 哀哉! 且夫人之見其主阽危而不救者, 觀雁奴則庶可知愧. 此物雖小, 可以喩大. 吾於是乎作雁奴說.

- 최연(崔演, 1503~1549), 「안노설(雁奴說)」,『간재집(艮齋集)』

 

    

▶ 소상팔경(瀟湘八景) 8폭 중 평사낙안도(平沙落雁圖),

『韓國의 美(11)-산수화(上)』중앙일보사에서 인용

 

 

  이 글의 저자는 이 우화를 통해 두 가지 점을 지적하고 있다. 첫째는 대장 기러기의 안이함과 멍청함이다. 충직한 보초 기러기가 누차 경고했건만 편안함만 찾아서 고식적으로 대처했으며, 적의 꾀에 속아서 충직한 보초를 불신했다는 것이 그것이다. 둘째는 보초 기러기의 충직함이다. 간교한 적의 꾀에 놀아나 비록 빛을 보지는 못했지만, 충직만큼은 인간에게도 귀감이 될 만하다는 것이다. 충신은 곧잘 간신으로 둘러싸인 주군으로부터 버림을 받는다. 그리고 그런 충신의 진정은 죽임을 당한 뒤에야 밝혀진다는 것은 아주 흔한 이야기이다.

 

  이 재미있는 이야기는 서양의 늑대 소년 이야기를 고대로 뒤집어 놓은 듯한 느낌이 있다. 다른 점이라면 늑대 소년은 재미삼아 거짓말을 했고, 보초 기러기는 충직하게 사실대로 경보를 울렸다는 점이다. 정직과 거짓이라는 정반대의 원인행위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는 양떼는 늑대에게 잡아먹혔고, 기러기도 사람들에게 잡혔으니 차이가 없다. 어떻게 정반대의 의도가 동일한 결과를 산출했을까? 그것은 둘 다 신뢰가 깨져버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신뢰가 깨진 책임은 과연 누구에게 있을까? 늑대 소년은 그렇다고 해도 보초 기러기는 억울할 것이다. 딜레마에 빠진 이 가련한 보초 기러기를 누가 탓하겠는가?

 

  신뢰는 사회적 자산이다. 깨졌을 경우 그 사회의 구성원이 지불해야 하는 비용이 매우 크다. 대신할 만한 마땅한 대체재도 없다. 신뢰를 대신하자고 모든 것을 검증한다면 상상 이상의 비용이 들 것이다. 이리 보면 신뢰는 자산이 아니라, 사회가 구성체로 존재하기 위한 필수 조건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 두 개의 우화는 우리에게 신뢰가 깨지는 것은 순간적이며, 또 오랜 시간에 걸쳐 구축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늑대가 나타났다는 것과 같은 중대한 거짓말은 해서는 안 된다는 암묵적 합의가 사회적 신뢰로 작동한 것이고, 충직한 보초 기러기에 대한 오랜 신뢰도 한 번의 기만으로 한순간에 깨지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신뢰 구축”이란 구호 이상이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오히려 사회 구성원 모두가 신뢰가 깨졌을 때 치러야 하는 거대한 비용을 지속적으로 상기하는 것이 그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

 

서정문 글쓴이 : 서정문
  • 한국고전번역원 수석연구위원
  • 주요저역서
      - 조선시대 당쟁사를 공부했고, 논문으로는 「고전번역의 역사적 맥락에서 본 비문 문제」 2009, 「고전번역사업의 새로운 목표설정을 위한 시론」 2010 등이 있으며, 번역으로는 『명재유고』공역, 2011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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