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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의 향기 237]우리나라 최초의 중화민국(中華民國) 여행기

도솔산인 2012. 11. 7. 11:36

 

[고전의 향기 237]우리나라 최초의 중화민국(中華民國) 여행기

 

 

 

우리나라는 중국과 인접해 있기에 중국 여행기가 많다. 원나라 여행을 기록한 고려시대 여행기를 꼽으라면 이제현의 『서정록』이 있다. 명나라 여행을 기록한 조선시대 여행기를 꼽으라면 현전하는 조천록(朝天錄) 등과 더불어 최부의 『표해록』도 있다. 청나라 여행을 기록한 조선시대 여행기를 꼽으라면 우선 조선 삼대 연행록으로 꼽힌다는 김창업의 『노가재연행일기』, 홍대용의 『을병연행록』, 박지원의 『열하일기』부터 시작하고 싶다. 그러면 이와 같은 문학 전통에 비추어 볼 때 중화민국 여행을 기록한 우리나라의 여행기로는 무엇이 있을까? 아래에 우리나라 최초의 중화민국 여행기로 손색이 없는 이병헌(李炳憲)의 『중화유기(中華遊記)』를 소개한다.

 

7일. 밤에 기도를 고하는 글 한 편을 쥐고 공자의 신위(神位) 앞에서 읽었다.

“(…) 아, 소자가 천지의 마음을 받고 부모의 형체를 전해 받아 세상에 태어난 지가 마흔 하고 일곱 해입니다. 명색이 사람이니 천지에 효도하고 부모를 본받는 일을 잠시라도 그만둘 수 없습니다. 참으로 천지와 부모의 정에 순종하여 사람의 본분을 다하려 한다면 우리 부자(夫子)의 도가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때문에 스스로 사람의 일을 조금 알고부터 부자의 도를 배우고 싶었지만 그 문장(門墻) 밖을 엿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천지간에 하루라도 없을 수가 없는 것이 부자의 도임을 알고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이천 수백 년 사이에 이것이 동아(東亞) 여러 나라에 보급되어 시대에 치란(治亂)이 있기도 하였고 교화에도 성쇠가 있기도 하였지만 우리 부자 지선(至善)의 목표에 귀일하기를 힘썼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아, 원통합니다. 동방과 서방이 개통하고 유럽과 아시아가 이어져 예양(禮讓)은 경쟁(競爭)으로 변하고 제기(祭器)는 포화(砲火)로 변하였습니다. 우내(宇內)의 사람들이 날로 진화론의 공례(公例)를 향하자 우매하고 약소한 자가 점점 도태되고 있습니다. 불행히 우리 조선(朝鮮)은 유교국(儒敎國)으로 유명한데 이미 다른 종족에게 침몰되었고 중화(中華)도 유교국으로 저명하지만 또 강한 이웃 나라가 잠식해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평론하는 사람들이 마침내 유교로는 나라를 다스릴 수 없다고 말하게 되었습니다.

아, 애석합니다. 조선이 망하고 중국이 약해진 것은 유교를 잘하지 못해 변통하는 권도(權道)에 어두웠기 때문입니다. 종교로 나라를 구원할 생각은 하지 않고 종교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고 하니 또한 유독 무슨 마음입니까. 병헌(炳憲)은 창해(蒼海)의 조그마한 나라에서 태어나 종교가 밝아지지 못해 나라가 망하였음을 스스로 슬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라는 곧 자신의 천지요 부모입니다. 따라서 천지가 비록 넓어도 나라를 버리면 갈 수 있는 곳이 없고, 부모가 비록 계시지 않아도 차마 부모를 생각하는 마음까지 사라지게 할 수는 없습니다.

 

날마다 생각하건대 우리 동문(同文) 동교(同敎)의 중화 대국이 우뚝 떨쳐 일어난다면 지리 관계나 민족 역사로 보아 서로 연결이 되니 조선도 마비가 풀어져 깨어나서 혼을 부를 희망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위로는 지사(志士)의 당견(黨見)이 더욱 깊어지고 아래로는 국민(國民)의 공덕(公德)이 부진하여 조국(祖國) 이천사백 년 성인의 가르침에 대하여 신중히 보수할 줄 몰라 점점 조선이 이미 거친 증세와 거의 닮아가지 않을까 염려되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그러나 부자의 도는 천지에 세우고 귀신에 질정해도 어긋남이 없으며 의심이 없을지니 마땅히 4억 인심을 붙들어서 중국이 결코 석가모니가 열반한 석란(錫蘭)과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난 유태(猶太)가 되지 않게 해야 할 것입니다.

비록 어리석고 불초하지만 병헌은 부자의 도를 배워 동방으로 돌아가 유교를 배워 묵수하는 사람들을 구원하여 다시 천지 중에 온전한 사람이 되고 부모에게 순종하는 자식이 되어 조국의 혼을 부르기를 다시 구합니다. 삼가 생각건대 성령께서는 묵묵히 도와주소서.”

 

[七日夜操禱告文一篇 讀于孔子神位前, 曰云云 嗚呼 小子受天地之中 傳父母之形 以生于世者 爾來爲四十有七年矣 旣名爲人 則孝天地而體父母 不可須臾廢者也 苟順天地父母之情而盡人之分 則舍吾夫子之道末由也 故自稍知人事以來 欲學夫子之道 而不得窺其門墻之外 然知夫天地之間 不可一日無者 夫子之道也 竊念二千數百年之間 普及乎亞東諸國 時或有治亂 敎亦有隆替 而務囿乎吾夫子至善之鵠 則不可誣矣 嗚呼痛哉 東西開通 歐亞接踵 禮讓變作競爭 俎豆化爲砲火 宇內之圓顱方趾者 日趨天演之例 而昧弱者漸就淘汰之科 不幸而吾朝鮮以儒敎國稱 而已淪于他族 中華以儒敎國著 而又啓强隣之蠶食 以致世之論者 遂謂儒敎不可以爲國 嗚呼惜哉 朝鮮之亡 中國之弱 以不善儒敎之故 而昧乎通變之權也 不念敎之可救國 而謂由敎而亡 抑獨何心哉 炳憲以滄海鯫生 竊自悲國之亡由敎之未明 而國者乃自身之天地也父母也 故天地雖廣 舍國而無可往之處 父母雖亡 尤不忍有死其親之念 日盻吾同文同敎之中華大國勃然振興 則於地理之關係 民族之歷史 互有聯絡 庶幾有摩擦痿痺醒呼皐復之望矣 奈之何上焉而志士之黨見愈深 下焉而國民之公德不振 於祖國二千四百年聖訓 猶不知愼重而保守之 則駸駸然懼夫與朝鮮已經之崇殆同症也 然夫子之道 建天地質鬼神而不悖不疑 則當維持四萬萬人心 而中國決不爲釋迦牟尼之錫蘭 耶蘇基督之猶太矣 雖愚騃不肖如炳憲焉 願學夫子之道 歸諸東方 以救學儒而守株者 更求爲天地之全人父母之順子 以招祖國之魂 伏惟聖靈之黙佑焉]

 

- 이병헌(李炳憲 1870~1940), 「중화재유기(中華再遊記)」 『중화유기(中華遊記)』 권2

 

 

 

 

▶ 공자의 위패를 모신 중국 산동성 곡부(曲阜)에 있는 대성전(大成典)

 

 1916년 8월 7일 한밤중 중국 산동성(山東省) 공묘(孔廟)에서 조선 선비 이병헌은 기도문을 읽었다. 시절은 팔월이라 한가위 다가오고 한밤중 사당 위엔 반달이 희미했을 그 때 공자에게 드리는 그의 기도는 비장했다. 아, 부자(夫子)이시여! 여섯 해 전 조선은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겼고 지금은 중국마저 일본에게 국토를 잠식당하고 있습니다. 조선과 중국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유교가 잘못입니까? 유교 때문에 망국이 들이닥친 것입니까? 하지만 나라를 구원하는 것이 유교 아니겠습니까? 조국의 혼을 부르는 것이 유교 아니겠습니까? 아, 부자(夫子)이시여! 소자 고국에 돌아가면 꼭 나라 구원하고 국혼 부르는 새 유교를 일으키리이다. 성령께서는 묵묵히 도와주소서.

 

 엄혹하고 혼란스런 현실이었다. 1910년 대한(大韓)이 동양평화의 이름으로 일본에게 강제 병합 당하였다. 1912년 청나라 마지막 황제 선통제가 퇴위하고 중국의 수천 년 왕정이 사라졌다. 1915년 중국 정부가 일본에게 굴욕적으로 21개조 요구를 수용하여 마침내 일본 세력이 산동성까지 잠식해 들어왔다. 역사의 거대한 파도는 조선을 쓰러뜨린 데 이어 다시 중국을 쓰러뜨릴 듯한 찰나였고, 조선과 중국의 공통된 유교문명은 마치 노쇠한 문명의 유아적 죽음을 맞이하는 듯이 보였다.

 

 하지만 그랬기에 간절한 기도가 나왔다. 바로 이 무렵 중국 상해에서 출간된 박은식의 『한국통사』는 한국의 ‘통사(痛史)’와 중국의 ‘통사(痛史)’를 함께 비통해한 한중(韓中)의 근대사이자 한국의 국혼을 절규한 간절한 기도문이었다. 마찬가지로 이듬해 이병헌이 산동성 공묘(孔廟)에 와서 한밤중에 공자를 향해 간절한 기도를 올렸을 때 그것은 중국에까지 임박한 한중 양국의 공통된 슬픈 운명을 극복하고자 발산된 국혼의 외침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 외침 소리가 울려 퍼진 중국 곡부의 공묘는 한국 근대 유학사의 어떤 새로운 출발점이 되는 곳이었다고 하겠다.

 

 먼 길을 왔다. 이병헌은 이곳에 오기까지 중국의 많은 곳을 거쳤다. 사실 그의 공묘 방문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의 첫 중국 여행은 두 해 전 1914년에 시작되었다. 유교를 종교로서 새롭게 정립하는 방안에 대한 고민을 안고 경성(京城)에서 기차를 타고 압록강을 건너 안동(安東), 심양(瀋陽), 북경(北京), 곡부(曲阜), 상해(上海), 항주(杭州), 향항(香巷) 등지를 다녔다. 강유위(康有爲)를 만나 공교(孔敎)에 관해 상의하려는 일념에서였다. 그 과정에서 그는 중국에서 펼쳐진 전통과 근대를 동시에 체험할 수 있었다. 상하이와 홍콩에서 1910년대의 근대 문물을 직접 경험하였다면 중국 강남에서는 고전 속의 역사와 문학을 향유하였다. 박은식과 동행하여 홍콩에서 강유위를 만난 이병헌은 환대와 격려를 받았고 강유위로부터 연재(淵齋) 윤종의(尹宗儀)의 『벽위신편(闢衛新編)』을 처음 알게 되어 이를 차람(借覽)하기도 하였다. 그로서는 중국에서 발견한 조선의 학술이었다.

 

 두 해 후, 이병헌은 다시 중국으로 떠났다. 박은식과 함께 다시 강유위를 만난 그는 곡부와 태산(泰山)에 오래 머무르며 최대한 공자에게 집중하였고 공자에게 본심을 기도하였다. 두 번째 여행의 마지막 종착지는 김택영(金澤榮)이 살고 있는 남통(南通)이었다. 남통은 두 번째 여행의 종착지인 동시에 두 차례 중국 여행의 총결산이었다. 김택영의 도움으로 그 곳 한묵림서국(翰墨林書局)에서 그의 여행은 『중화유기(中華遊記)』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다. 중화민국을 체험한 조선 유학자의 여행으로 말한다면 이병헌에 앞서 이상룡(李相龍), 장석영(張錫英), 이승희(李承熙) 등의 여행도 있었고 관련 작품도 현전하고 있지만, 최초의 출판물로 말한다면 『중화유기』가 단연코 선하(先河)의 위치에 있다. 『중화유기』를 필두로 우리나라의 중화민국 여행 문헌이 체계적으로 연구되어 근대적인 지(知)의 동아시아적인 복합성이 규명되기를 바란다.

 

 

노관범

글쓴이 : 노관범

  •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박사
  • 한국고전번역원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