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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의 향기 227]520년 전 조선 선비의 중국 표류기 - 최부의 표해록(漂海錄)

도솔산인 2012. 7. 16. 11:13

 

520년 전 조선 선비의 중국 표류기 - 최부의 표해록(漂海錄)

 

 최부(崔溥:1454~1504)의 저술 『표해록』을 아십니까?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나 하멜의 『하멜표류기』는 한번쯤 제목이라도 들어 보았고, 마르코 폴로가 이탈리아 사람, 하멜이 네덜란드에서 온 사람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는 사람도 최부라는 인물이 어느 시대에 살았는지 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다. 『표해록』은 성종대의 학자 최부가 1488년 1월 제주도에서 풍랑을 만나 중국의 강남 지방에 표착(漂着)한 후에 북경까지 갔다가 조선으로 돌아온 6개월간의 과정을 생생하게 정리한 중국 기행문이다. 제목은 『표해록』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 내용은 표류 기록 보다는 표류 이후에 중국을 견문한 내용이 주가 되고 있다. 특히 당시에는 미지의 공간이었던 중국의 강남지방을 생생하게 기록한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항주에서 운하를 따라 북경에 도착한 최부는 북경에서 황제를 알현하고 요동반도를 거쳐, 압록강을 건너 1488년 6월 18일 한양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성종의 명에 따라 표류할 때부터 귀국할 때까지 견문한 사실을 써서 바쳤다. 『표해록』은 최부의 문집인 『금남집(錦南集)』에도 수록되어 있는데, 첫 부분에는 『표해록』을 올리게 된 과정과 제주도에 경차관으로 파견나간 상황부터 기록하고 있다.

 

 상주(喪主)가 된 신(臣) 최부는 제주에서부터 표류하게 되어 구동(甌東:절강성)에 정박했다가 옛 월나라 땅 남쪽을 지나 연경의 북쪽을 거쳐 이해 6월 14일에 청파역(靑坡驛)에 도착한 후 삼가 전지를 받들어 일행의 일록(日錄)을 찬집하여 올립니다.

성화 23년(정미년(1487, 성종18)) 9월 17일에 신은 제주 삼읍의 추쇄 경차관(推刷敬差官)1)으로서 하직 인사를 올리고 길을 떠났습니다. 전라도에 이르러 감사(監司)가 사목에 의거하여 뽑은 광주목리(光州牧吏) 정보(程普), 화순현리(和順縣吏) 김중(金重), 승사랑(承仕郞) 이정(李楨), 나주에서 수행한 배리(陪吏) 손효자(孫孝子), 청암역리(靑巖驛吏) 최거이산(崔巨伊山), 호노(戶奴:사노) 만산(萬山) 등 6명 및 사복시의 안기(安驥)ㆍ최근(崔根) 등을 거느리고 해남현에 도착하여 순풍을 기다렸습니다. 11월 11일 아침, 제주에 새로 부임해 온 목사 허희(許煕)와 관두량(館頭梁)에서 함께 배를 타고 12일 저녁에 제주의 조천관(朝天館)에 도착하여 정박하였습니다.

 

[喪人臣崔溥自濟州漂流。泊甌東。過越南。經燕北。以今六月十四日。到靑坡驛。敬奉傳旨。一行日錄。撰集以進。成化二十三年 丁未 秋九月十七日。臣以濟州三邑推刷敬差官。陛辭而行。至全羅道。率監司依事目所差 光州牧吏程普,和順縣吏金重及承仕郞李楨,羅州隨陪吏孫孝子,靑巖驛吏崔巨伊山,戶奴萬山等六人 及司僕寺安驥,崔根等。歸海南縣候風。十一月十一日朝。與濟州新牧使許煕。同乘舟于館頭梁。十二日夕。到泊濟州朝天館。]

1) 추쇄 경차관(推刷敬差官) : 부역이나 병역 기피자, 도망간 노비를 잡아오는 임무를 띤 관리를 말한다.

 

 

 

 

 

▶ 『금남선생집(錦南先生集)』 에 실린 표해록

 

 

 

 520여 년 전인 1487년 11월 전라도 나주 출신의 선비 최부는 추쇄 경차관으로서 제주도에 파견되었다. 최부는 김종직의 문인으로 성종대 『동국통감』과 『동국여지승람』 편찬에도 참여한 바 있는 사림파의 엘리트 관료이다. 그런데 최부는 제주도에서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장례를 치르기 위해 배를 마련하여 일행 42명과 함께 고향인 나주로 향했다. 곧 폭풍이 불 것이라며 만류하는 사람이 많았으나 최부는 한시바삐 상주의 예를 행해야 한다며 출항을 강행하였다. 그러나 바다에 나갔을 때 큰 풍랑을 만났고, 목숨을 건 13일간의 표류 끝에 최부 일행이 도착한 곳은 목적지 나주가 아닌 낯선 중국 대륙이었다. 최부 일행은 이곳에서 해적 떼를 만나는 위기를 겪은 후 3일간의 표류 끝에 다시 육지에 이르렀다. 기아와 탈진 속에서 옷을 적신 빗물로 겨우 연명하면서 사선을 넘나들다가 겨우 찾게 된 한 줄기 빛이었다. 표류 중에도 여러 분야에 걸친 최부의 지식은 표해록 곳곳에 보인다. 일행 중 한 명이 “우리 모두 짠 바닷물을 마시고 죽는 것보다는 활시위로 스스로 목을 매어 목숨을 끊는 것이 낫다.[吾與其飮鹹水而死。莫如自絶。以弓絃自縊]”라고 할 정도의 극한 상황 속에서도 최부는 해박한 지식으로 일행을 안심시켜 나갔다.

 

 너희들은 키를 잡아 배를 바로 해야 하며 방향을 잘 알아야 한다. 내가 일찍이 지도를 보니 우리나라 흑산도로부터 동북쪽으로 향하여 가면 충청도와 황해도의 경계이며, 정북쪽은 평안도와 요동 등지에 이른다. 서북쪽은 옛날 우공(禹貢)의 청주(靑州)와 연주(兗州)의 경계이며 정서쪽은 서주(徐州)와 양주(楊州)의 지역이다. 송나라 때 고려와 교통할 때 명주로부터 바다를 건넜으니 명주는 대강(大江:양자강) 이남의 땅이고, 그 서남쪽은 옛 민(閩) 지역으로 지금의 복건로이며, 서남쪽을 향하여 조금 남쪽으로 가다가 서쪽으로 가면 섬라(暹羅:타이), 점성(占城:베트남 중심부), 만랄가(滿剌加:말라카) 등에 이른다.

 

[汝等執舵正船。向方不可不知。我嘗閱地圖。自我國黑山島。向東北行。卽我忠淸,黃海道界也。正北卽平安,遼東等處也。西北卽古禹貢靑州,兗州之境也。正西卽徐州,楊州之域。宋時交通高麗。自明州浮海。明州卽大江以南之地也。西南卽古閩地。今之福建路也。向西南稍南而西。卽暹羅,占城,滿剌加等國也。]

 

 위의 기록에서는 최부가 평소에 조선을 둘러싼 주변의 지리적 정세에 밝았음을 보여준다. 드디어 육지에 표착한 일행은 최부에게 상복을 벗을 것을 권유했지만 최부는 ‘예를 버릴 수 없다’며 완강하게 버티었다. 일행 중 정보(程普)가 “잠시 권도(權道:임시방편)를 택하여 살 길을 취하신 후에 예로써 상을 치르시더라도 의(義)를 해치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했지만 최부는 거절했다. 융통성이라고는 없는 고집 센 선비로 밖에 보이지 않지만 자신이 배운 학문과 이념을 실천하는 것을 목숨보다 중히 여겼던 시절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해가 가는 부분이다. 최부 일행이 죽을 고비를 수차례 넘기고 최종적으로 표착한 강남의 절강성 태주부(台州府)는 최부 일행이 처음 표류를 당했던 추자도 앞바다에서 무려 수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이었다.

처음에, 중국 관리들은 최부 일행을 왜인으로 오해하였다. 2월 4일 소흥부에 도착하자 중국 관리는 “처음에 그대들을 왜선(倭船)으로 간주해 위협하고 겁탈하여 사로잡아 죽이려 했다. 그대가 만약 조선인이라면 그대 나라의 역대 연혁과 도읍, 산천, 인물, 풍속, 제사의식, 상제, 호구, 병제, 전부(田賦)와 의관 제도를 자세히 써 오라. 그것을 여러 기관에서 대질하여 시비를 따질 것이다.[初以汝類爲倭船劫掠。將加捕戮。汝若是朝鮮人。汝國歷代沿革都邑山川人物俗尙祀典喪制戶口兵制田賦冠裳之制。仔細寫來。質之諸史。以考是非。]”라고 하였고, 이에 대해 최부는 정확하게 우리나라의 역사와 지리, 인물에 대해 설명하였다.

 

 신이 말하기를, “연혁과 도읍은 단군에서 시작하는데 당요(唐堯)의 시대와 같다. 국호는 조선이며 도읍은 평양으로, 대대로 천여년 동안을 누렸다. 주나라 무왕이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한 뒤 평양에 도읍을 정하고 팔조(八條)로써 백성을 가르쳤다. 지금 나라 사람들이 예의로써 풍속을 이룬 것은 이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후 연나라 사람 위만(衛滿)이 망명하여 조선에 들어와 기자의 후예인 기준(箕準)을 축출하니 기준이 마한으로 달아나 도읍을 삼았다. 그 사이에 혹은 구한(九韓)이 되었고, 혹은 이부(二府)가 되었고, 혹은 사군(四郡)이 되었고, 혹은 삼한(三韓)이 되었는데, 연대가 오래되고 멀어 다 서술할 수가 없다. … 산천은 장백산이 동북에 있는데 일명 백두산이다. 횡으로 천여 리 뻗쳐있고, 높이는 이백여 리이다. 그 산정에는 못이 있는데 둘레가 80여 리이다. 동쪽으로 흘러 두만강이 되고, 남쪽으로 흘러 압록강이 된다. 동북쪽으로 흘러 속평강(速平江)이 되고 서북쪽으로 흘러 송화강(松花江)이 되는데, 송화강의 하류는 혼동강(混同江)이다. … 인물은 신라의 김유신(金庾信)ㆍ김양(金陽)ㆍ최치원(崔致遠)ㆍ설총(薛聰), 백제의 계백(階伯), 고구려의 을지문덕(乙支文德), 고려의 최충(崔沖)ㆍ강감찬(姜邯贊)ㆍ조충(趙沖)ㆍ김취려(金就礪)ㆍ우탁(禹倬)ㆍ정몽주(鄭夢周)가 있으며, 우리 조선의 인물은 가히 다 열거할 수가 없다. 세속에서는 예의를 숭상하고, 오륜을 밝히며 유술을 존중한다. 매년 봄과 가을에 양로연(養老宴), 향사례(鄕射禮),향음주례(鄕飮酒禮)를 행하며, 제사 의식은 사직과 종묘, 석전과 여러 산천에 지내는 것이 있다. 형벌 제도는 대명률을 따르고 상제는 주자가례를 따른다. 의관은 중국의 제도를 준수하고, 호구와 병제, 전부(田賦)는 내가 유신(儒臣)이어서 그 상세함을 알지 못한다.” 하였습니다.

 

[臣曰。沿革都邑。則初檀君。與唐堯竝立。國號朝鮮。都平壤。歷世千有餘年。周武王封箕子于朝鮮。都平壤。以八條敎民。今國人以禮義成俗始此。厥後燕人衛滿。亡命入朝鮮。逐箕子之後箕準。準奔馬韓以都焉。其間或爲九韓。或爲二府。或爲四郡。或爲三韓。年代久遠。不能盡述。… 山川則長白山在東北。一名白頭山。橫亘千餘里。高二百餘里。其巓有潭。周八十餘里。東流爲豆滿江。南流爲鴨綠江。東北流爲速平江。西北流爲松花江。松花下流。卽混同江也。… 人物則新羅金庾信,金陽,崔致遠,薛聰。百濟階伯。高句麗乙支文德。高麗崔沖,姜邯贊,趙沖,金就礪,禹倬,鄭夢周。我朝鮮不可歷數。俗尙則尙禮義。明五倫。重儒術。每春秋。行養老宴,鄕射禮,鄕飮酒禮。祀典則社稷宗廟釋奠諸山川。刑制從大明律。喪制從朱子家禮。冠裳遵華制。戶口兵制田賊。我以儒臣。未知其詳。]

 

 위의 기록에서 보듯이 최부는 우리나라의 역사와 지리, 인물에 대해 해박하였고, 이러한 박학은 최부 일행이 왜인이라는 오해를 쉽게 풀 수 있게 하였다. 또한 위 기록을 통해 조선전기 지식인들의 역사인식과 인물에 대한 선호도도 알아 볼 수가 있다.

최부는 천자를 만나기 위해 북경으로 가는 도중에 중국의 주요 지역에 대한 묘사도 하였다. 2월 6일 항주에 도착해서는 육화탑(六和塔)에 대해 “전당강(錢塘江)에 이르러 배를 타고 강안을 따라 걸으면서 서쪽을 바라보니, 육화탑이 강가를 굽어보고 있었다.”고 하여 500여년 전에도 전당강에 우뚝 솟아있었던 육화탑을 묘사하였다. ‘물의 도시’로 각광받고 있는 소주에 대해서는 “소주의 강 양쪽에는 상점이 맞대어 있고 선박이 운집해 있어 참으로 동방 제일의 도시라 할 수 있었다. 또한 부상 대고(富商大賈)들이 모두 모여 있는 지방으로 옛적부터 천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 하였다.”면서, 소주의 번성을 기록하였다. 중국의 옛 사적들을 두루 돌아보며 그 지역의 특징과 옛 고사들을 생각하며 발걸음을 재촉하던 최부는 북경에 이르는 동안 수백 개소의 역참을 지났고, 『표해록』에는 이들 지명을 빠짐없이 기록하고 있다. 놀라운 기억력과 예리한 관찰력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최부는 북경에 도착하여 황제를 알현할 기회를 맞았다. 이곳에서도 최부는 상중이기 때문에 비록 황제 앞이라 해도 화려한 옷을 입을 수 없다고 버티었다. 신하된 도리로 당연히 예복을 입어야 한다는 중국 관리의 논리에 대해서는 군신의 예 이전에 부자간의 의리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결국 최부는 중국 관리들의 강권으로 예복으로 갈아입고 입궐한 뒤, 황제를 알현하였다.

 

 황제를 알현한 지 이틀 후 최부는 병중이었으나 수레에 몸을 싣고 길을 떠난다. 이제 조선으로 돌아가는 길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4월 24일 북경을 떠나 산해관과 요동을 지나 압록강에 도착한 것이 6월 4일, 죽을 고비를 수차례 넘기고 만 5개월 만에 밟아보는 고국의 땅이었다. 최부는 요동지역을 지나면서 이 지역은 고구려의 고도(古都)로서 당에게 멸망한 후 발해가 들어섰다가 다시 요(遼), 금(金)에 병탄된 사실을 안타까워하였다. 최부 일행은 6월 14일 마침내 청파역에 도착하였다. 한양에 도착한 최부는, 표류하고 중국을 견문한 시말을 적은 기록을 바치라는 성종의 명을 받았다. 중국에서 돌아온 지 8일 만인 6월 22일, 한국판 『동방견문록』이라 할 수 있는 5만 자 분량의 『표해록』은 이렇게 완성되었다. 최근 최부가 걸었던 여정을 그대로 답사한 기록을 담은 저술(서인범, 『명대의 운하 길을 걷다』, 한길사, 2012)이 나왔다. 이 책을 참고삼아 최부의 길을 따라 중국 여행을 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

 

신병주 글쓴이 : 신병주
  • 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 주요저서
      - 하룻밤에 읽는 조선사, 램덤하우스, 2003
      - 조선 최고의 명저들, 휴머니스트, 2006
      - 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 책과 함께, 2007
      - 이지함 평전, 글항아리, 2008
      - 조선을 움직인 사건들, 새문사, 2009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