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산행기록

고매(古梅)의 향기를 찾아서(120309~11)

도솔산인 2012. 3. 12. 08:09

 

고매古梅의 향기를 찾아서(120309~11)

 

▣ 일     시 : 2012년 03월 09일(금)~11일(일)

▣ 산 행 지 : 지리산

▣ 코     스 : 지리동부

▣ 인     원 : 4명[<신승균>, <강현석>, <임순만>님, 余]

 

 

지난 2월 13일 山天齋에 잠시 들러 南冥梅를 본 후 山淸三梅(*)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마침 블록友 <月派월파>님의 고매古梅에 관한 글을 읽고 이번 산행을 계획하게 되었고,

'梅花는 桃李杏花(*)와 봄을 다투지 않는다.’ 는 수우당守愚堂(*)을 만나는 목적도 있습니다.

 

* 山淸 三梅(산청삼매) : 남명매南冥梅(덕산 산천재), 원정매元正梅(단성 남사 예담촌), 정당매政堂梅(단성 단속사지), 桃李杏花 : 복사꽃, 오얏꽃, 살구꽃 

 

남명매(120213)

 

 

 

[<月派>님의 블로그 글에서 발췌함]

 

 매화를 기다리며

 엄동설한嚴冬雪寒에 피는 꽃이 매화梅花의 참모습이지요. 봄날의 도리행화桃李杏花와 어울려 피면 매화라 할 수 있겠는지요? 옛 선비는 동지冬至에 구구소한도九九消寒圖를 그리며 봄을 기다렸다지요. 도리행화桃李杏花와 어울려 봄날에 늦게 핀 매화나무를 도끼로 찍어버렸다던 조선 선비 최영경崔永慶(1529~1590)의 일화(*)가 생각나는 때입니다.

 

 

古梅(고매)

 

(*)수우당守愚堂 최영경崔永慶선생과 한강寒岡 정구鄭逑(*)선생의 일화 

 丁亥年(1587년)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이 함안 군수로 있으면서 먼저 수우당守愚堂 최영경崔永慶선생을 내방하였고 이듬해 2월 최영경崔永慶 선생이 한강寒岡선생을 답방하였다. 한강寒岡 선생은 그때 백매원百梅園에 있었다. 매화가 한창 꽃망울을 터뜨려 온 좌중이 감탄하며 감상하고 있었다. 최영경崔永慶선생은 동자를 불러 도끼를 가져와 찍어버리게 했는데 좌우에서 온통 만류하여 그만두었다.

 

 선생은 이에 매화에게 경계의 말씀을 하셨다."너를 귀히 여기는 까닭은 단지 백설白雪의 바위 골짜기에서 그 절조를 아낄 만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복사꽃, 오얏꽃, 살구꽃과 봄을 다투고 있으니, 네 죄가 베어 마땅하다. 말리기에 그만두지만 이후로는 마땅히 경계할 줄 알아야 하리라." <최영경崔永慶(1929~1590)행록 수우당 실기>

[출처 : <月派>의 물처럼 바람처럼, 글쓴이 : <月派 달무리>님]

 

 

어둠이 내린 德山의 山天齋를 지나며 守愚堂 崔永慶을 만나고 싶은 조바심을 누르고 새재 마을로 향합니다.

새재산장에 전화를 하여 '늦게 도착하니 내다보지 말라.'고 부탁드렸는데 사장님이 나오셔서 인사를 합니다.

 

늦은 시간에 지리에 드는데...

누가 '왜 산에 가느냐?'고 물으면 막상 답변할 말이 마땅ㅎ지 않습니다.

 

山水癖산수벽일 수도 있으나 나에게 산은 자연의 벗 그 이상 이하도 아닙니다.

혹한의 동계에 산에서 먹고, 자고, 걷는 것, 어느 하나도 수월한 것이 없습니다.

 

아직도 산에 왜 가는지 나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만

그래도 이번 산행은 南冥梅守愚堂을 만나는 목적이 있습니다.

 

역사의 철저한 비주류로 국난에 위국헌신爲國獻身하였던 수많은 선비들이 민족의 역사에서 대접받지 못하고

종국에는 반역죄로 형장 이슬로 사라진 조선의 선비들 이름이 빼곡히 적힌 <남명학맥도>를 보기 위함입니다.

 

머리 속에는 온통 남명매南冥梅와 수우당守愚堂 최영경崔永慶 선생의 생각 뿐,

한강寒岡 정구鄭逑선생과 교유하였던 선비 崔永慶은 누구인지 무척 궁금합니다.

 

 

 

 

 

 

 

 

 

 

 

 

 

 

 

 

 

 

 

 

 

 

영랑재에 먼저 온 <임순만>대장

 

국내외를 두루 섭렵한 전천후 트래커 히말라야님!

해외 원정 산행만 무려 40여회라니 국제 한량입니다.

 

지리 설악에서 아무리 밥 해먹고 산중노숙을 한들 우물안에 개구리지요.

 

 

 

永郞岾(영랑재)

 

 

 

 

 

 

 

 

 

 

 

 

 

 

밤새 동부능선에는 파도소리가 들렸습니다.

영랑재의 밤은 산山과 물水과 눈雪과 달月과 바람風과 꽃花이 모두 있었습니다.

자연에서 여섯 벗(六友堂)을 다 만났으니 무엇이 부럽겠습니까?

 

* 六友堂 : 영랑재(山), 바람소리(風)=파도소리(水), 사진의 속의 달(月), 새벽에 내린 눈(雪) ,설화(花)

 

 

젤트zelt「廣居亭(광거정)」

 

 

 

 

 

 

 

 

 

 

 

 

 

 

 

 

눈은 크러스트 되어 있습니다.

 

 

 

 

산행을 마치고 다음 목적지 산천재山天齋로 향합니다.

 

山天齋에서 바라본 天王峯

 

남명매南冥梅

 

開花개화가 임박한 남명매는 선생을 아는 듯 수우송守愚松 앞에서 지조를 뽑냅니다.

 

 

제가 2년 전 오자誤字가 있어서 기념관 측에 이야기를 했는데

칼로 오려냈지만 오자誤字보다는 훨씬 낫습니다[諍에서爭으로]

 

 

題德山溪亭柱

(덕산 시냇가 정자 기둥에 쓰다)

 

                           南冥 曺植

 

請看千石鐘(청간천석종) : 청컨대 천 섬 들이의 큰 종을 보게나.

非大扣無聲(비대구무성) : 큰 것이 아니면 두드려도 소리가 없다네.

爭似頭流山(쟁사두류산) : 어찌하면 두류산처럼

天鳴猶不鳴(천명유불명) : 하늘이 울어도 오히려 울지 않을까?

 

☞ 石 : 섬석. 千石鐘 : 천석들이의 종(천왕봉을 가리킴) 扣 : 두드릴구, 爭 : 어찌쟁, 似 : 같을사, 猶 : 오히려유

 

지리산을 닯고자 하셨던 남명선생이 예순 한 살 때 덕산으로 옮겨와 산천재를 짓고 시냇가 정자에 써 붙인 시.

 

 

 

 

드디어 남명기념관 남명학맥도에서 수우당守愚堂 최영경崔永慶선생을 대하니

今方금방이라도 '매화가 어찌 뭇 꽃들과 봄을 다투는가?' 라는 선생의 질타叱咤가 들리는 듯합니다.

 

 

수우당守愚堂은 60세(1588)에 10월 정여립鄭汝立의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이사건에 연루되어 길삼봉吉三峯이라는 누명을 쓰고 옥에 갖히는 몸이 되었는데

평소 그를 미워한던 정철鄭澈과 성혼成渾이 위관으로 있으면서 심한 매질을 가하여 옥중에서 죽었다.

 

그후 1594년 김우옹金宇顒(1540~1603)과 그 친구들의 끈질긴 상소로 무죄가 밝혀져

대사헌大司憲에 추증되고, 특별히 선조가 예관을 보내 제문을 내려 충절을 기렸다.[펌]

 

(*)최영경(崔永慶, 1529∼1590) 약전(略傳)은 아래에 있습니다.

 

[출처] 남명학 연구원(南冥學硏究院)

http://nammyung.org/2007/gnuboard4/bbs/board.php?bo_table=man&wr_id=2

 

 

*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년7월9일~1620년1월5일)

 조선 중기의 문신, 유학자, 철학자, 역사학자이자 임진왜란기의 의병장. 선조, 광해군 때의 성리학자, 작가, 서예가이고 의학자. 자(字)는 도가(道可), 가보(可父)이고 호는 한강(寒岡)·회연야인(檜淵野人), 본관은 청주(淸州). 시호는 문목(文穆). 오건, 대곡 성운, 남명 조식(曺植)·퇴계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수학함.

 

 성리학과 경학에 조예가 있었고, 훈고학과 경서 해석, 산수, 풍수지리학, 노장사상과 고전에 두루 정통하였고 예학에 밝았으며 당대의 명문장가로서 글씨도 뛰어남. 남인 예학과 북인 예학의 시조이며, 사후 증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가 다시 증 의정부영의정에 가증됨. 한훤당 김굉필(金宏弼)의 외고손이며, 여헌 장현광, 문위, 한준겸, 윤효전, 미수 허목이 그의 제자임. 그의 학맥은 허목, 윤휴, 윤선도 등을 통해 조선후기 남인실학자들에게로 이어짐.[워키백과]

 

 

PS : 경인지역 분들의 지리 入德門 <원지>에서 어탕국수로 하산주 한 잔 나누고

<임대장>을 배웅하고 돌아오면서 그 느낌은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묘妙합니다.

 

혹 내가 도리행화桃李杏花는 아닌지 갑자기 정신이 몽롱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