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동부 심설산행(120211~13)
▣ 일 시 : 2012년 02월 11일(토)~13일(월)
▣ 산 행 지 : 지리산
▣ 코 스 : 대전(10일)-진주* * 사-삼천포-소공원(박)-새재-청이당-하봉옛길-영랑재(박)-하봉헬기장-치밭(박)-새재-산천재-겁외사-대전▣ 인 원 : 7명(미산님+이장님부부+33산우회)
▣ 시 간 : 1일차 09:30(새재) 18:30(영랑재) 2일차 09:30(영랑재) 11:00(헬기장) 15:00(치밭대피소)
♣ 과거의 인연
한가닥 실같은 인연을 좇아 진주로 향합니다.
10여년 전 홀연히 사라진 벗의 근황을 알게되었지만
그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친구는 진주 근교 작은 사찰의 주지 스님이 되어 있었고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었지만 옛날과 변한 것이 없었습니다.
사찰에서 멀리 삼천포로 이동하여 스님이 사주는 식사를 하고
근처 소공원에서 젤트를 치고 조용히 호연재의 야음을 읊어줍니다.
夜 吟
浩然齋
달빛 잠기어 온 산이 고요한데
샘에 비친 별 빛 맑은 밤
안개 바람은 댓잎을 스치고
비 이슬 매화에 엉긴다.
삶이란 석자의 시린 칼인 것을
내 마음 한 점 등불이어라.
서러워라! 한 해가 또 저물거늘
흰머리에 나이만 더하는구나.
'어찌 석자의 시린 칼로 인연을 끊었는가?'물어보니
이사람 지긋이 눈을 감고 웃을 뿐 대답하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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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 만남
다음날 아침 출발하였는데 오량이 꾸물거려
아침도 못 먹고 시간도 지키지 못했습니다..
블로그에서 뵌 분들이라 어색함이 전혀 없었고
부부가 산행하는 모습은 참으로 타의모범입니다.
산행 파트너가 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지켜야할 기본 상대에 대한 배려도 있어야 하고
산에 다니는 분들은 대개 성격이 외골수입니다.
알량한 자존심에 세상 어느것도 부러워하지 않는데
천생 배필의 산행 파트너를 뵈니 이장님이 정말 부럽습니다.
청이당 초입 적설량은 스틱이 다 들어가는 곳이 많았습니다.
김종직선생이 쉬어갔을 청이당 계류 반석에 점심 상을 폈는데
낚지볶음이 눈으로 보아도 족히 2kg 양에서 놀라고 맛에서 놀랍니다.
청이당
식사 후 계곡은 바람에 실려온 눈이 허리 깊이라
마암에서 뻗어온 좌측 능선으로 직접 진입합니다.
청이당 계곡에서 올라오는 길을 지나고
마암 삼거리까지는 여러 군데 네발로 기는 것도 모자라
스틱을 부여잡고 머리를 쳐박고 오체투지 끝에 능선에 겨우 도달하였는데
국골 좌골에서 올라오는 급사면에 흰색 시그널 하나가 파르르 떱니다.
독립꾼이 따라가면 저 세상으로 가는 죽음의 시그널입니다.
마등령에서 곰골 방향이 생각납니다.
<이장>님은 낙조를 잡으러 능선으로 가고 먼저 목적지에 도착
광거정과 아래채도 두어동을 세우고 산 이야기를 풀어나갑니다.
오늘의 화두는 동계 등산화
잠발란은 가라! 마인들도 안된다! 한바그도 안돼!
<미산>님과 호흡이 척척 맞아
결국 <이장>님이 산파트너<사평역>님에게
라스포티바 네팔에보를 사드리기로 약속을 합니다.
차후 라스포티바 명품 산행까지 약속하였으니
자! 보시죠. 이놈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니 붉은 빛이 숲으로 들어오는데
협의하에 <이장>님을 대표로 보내고 사진은 공유하기로 했으니
이렇게 편할 수가 없습니다. 암튼 술과 국, 한솥밥 먹었으니 공동작품이지요.
아침을 먹고 출발하는데 등로를 보세요.
탐침봉으로 눈 상태를 점검하니 손잡이까지 들어갑니다.
I. 영랑재의 지명에 대하여
自此至永郞岾. 道極懸危. 正如封禪儀記 所謂後人見前人履底. 前人見後人頂. 攀挽樹根. 始能下上. 日已過午。始登岾 自咸陽望。此峯最爲峻絶。到此 則更仰視天王峯也。永郞者。新羅花郞之魁。領三千徒。遨遊山水。嘗登此峯。故以名焉。少年臺。在峯側。蒼壁萬尋。所謂少年。豈永郞之徒歟。
여기에서(청이당) 영랑재까지 길이 지극히 위태롭게 매달려 바로 [봉선의기]에서와 같이 이른바 뒷사람은 앞 사람의 발 밑만 보이고 앞 사람은 뒷사람의 이마만 보면서 나무뿌리를 더위잡고서야 오르내릴 수가 있었다. 해가 이미 오시가 지나서야 비로소 재(영랑재)에 올라갔다. 함양(咸陽)에서 바라보면 이 봉우리가 가장 높게(험준하게) 보이게 되니, 여기에 이르면 다시 천왕봉(天王峯)이 우러러 보인다. 영랑은 신라(新羅) 때 화랑(花郞)의 우두머리였는데, 3천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산수(山水)에서 노닐다가 일찍이 이 봉우리(영랑재)에 올랐었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소년대(少年臺)는 봉우리(영랑재) 곁에 있어 푸른 절벽이 만 길이나 되었는데, 이른바 소년이란 아마 영랑의 무리였을 것이다.[출처:조선시대 유산기 펌]
* 自~至 : ~에서~까지, 正 : 바로, * 豈~歟 아마 ~일 것이다. 履 : 신발리, 底 : 밑저 攀 : 더위잡을반, 매달릴반, 挽 : 당길만, 끌어당길만, 尋 : 발심(두 팔을 벌린 길이) 其 : 豈: 어조사기, 歟 : ~인가?(의문), ~인저(감탄), ~일 것이다(추측)
김종직의 유두류록에 나오는 永郞岾(영랑재)의 岾는 國字(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한자)로
유두류록에 나오고 금강산 楡岾寺(유점사)에서 보이기는 하지만 용례가 아주 드문 漢字로
선조들이 한자어(인명)와 고유어를 결합하여 만든 신조어 지명에 쓰인 한자로 짐작됩니다.
* 注 岾 : 재재, 절점(동아출판사 자전)
유두류록 원문에 岾재를 峰으로 여러 차례 설명하고 있어 永郞峰도 무방하나
사림 종조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기록을 따라 영랑재라고 해야하지 않을까요?
대臺나 참站이라는 한자를 몰라 중국에도 없는 영랑재(岾)라고 쓴 것은 아닐터
다만 유몽인의 후손은 영랑대(臺)라고 해도 되겠지요. 의미는 큰 차이가 없지요.
영랑점이라고 하면 절이 됩니다. 여기서 재岾는 고유어 고개의 의미가 아닙니다.
참站도 그 뜻은 봉峰과 유사합니다. 양대박장군 후손은 그렇게 부르소서.
소년대는 영랑재보다는 낮고 정상은 좁은 곳으로 집작됩니다.
영랑의 부하가 올랐던 곳이니 사진 찍은 곳 어디쯤..
어른이 논란의 여지를 남겨 놓았습니다.
내 어린 생각으로 臺는 문자학적으로 高(획줄임)+至+士가 결합한 한자로 사방을 바라보기 위해
흙으로 높이 쌓아 병사(士)가 와서 머무는(至) 본래 인위적인 시설(군사 시설)의 의미가 들어있고,
산 봉우리를 여러 곳에서 臺라고 쓴 것으로 보아 여러 사람이 올라설 수 있는 峰으로 생각됩니다.
II. 숙고열암에 대하여
1472년 점필재가 이곳으로 올라오면서 고열암에서 숙고열암이라는 시를 남겼는데
'소나무 물결소리가 달빛 아래 들끓는다.'는 구를 보고 가객님처럼 순간 숨이 멎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원문 따로 풀이 따로이니
그래서 지리99에 올린 일이 있습니다.
제 해석은 약간 다릅니다.
수연도 작자 의중과 맞지 같습니다.
'병든몸'으로는 산행이 불가능하거니와
그래서'지친몸'으로 보아야 하고...
미연 '산신령의 비록'은 유가에서 금기시하는 내용이고,
당대 최고 석학이 비록를 얻고자함은 아닌 것 같습니다.
4구 '구곡 선경에서 노니는듯 착각하였네'의 구절에는
중앙에서 훈구파의 득세로 자청하여 함양군수로 내려와
산속 초야에 은거하고 싶은 선생의 심경이 들어있습니다.
宿古涅庵
佔畢齋
病骨欲支撑 暫借蒲團宿
松濤沸明月 誤擬遊句曲
浮雲復何意 夜半閉巖谷
唯將正直心 倘得山靈錄
지친 몸 지탱하려고
잠시 포단 빌려 잠을 자는데
소나무 물결(소리) 달빛 아래 들끓으니
국곡선경에 노니는듯 착각하였네
뜬 구름은 또한 무슨 뜻인가?
한밤중 바위 골짜기 닫혀있구나.
오직 올곧은 마음을 가진다면
산신령의 살핌을 얻으려나.
病骨(병골) : 지친 몸, 蒲團(포단) : 부들로 만든 둥근 방석, 浮雲(부운) : 간신. 인생의 덧없음. 不義로 富貴榮達을 누림.
句曲(구곡) : 강소성(江蘇省)에 있는 己山 또는茅山(모산)이라고 함. 巖谷(암곡) : 고열암, 將 : 持也(가질장), 錄 : 省(살핌)也
* 당시 오자 : 拂은 沸로, 閑는 閉로, 尙은 倘(혹시당)으로...
III. 遊頭流錄 '徑由直旨而下'의 國譯에 대하여
徑由直旨而下
곧바로 지름길을 따라서 내려왔다.
注 * 徑 : 곧바로, * 由 : ~을 따라서, ~을 통하여 * 直旨 : 直指 빠르게 감(동아)-빠르게 가는 길(지름길), 똑바로 향함. 곧장 나아감. * 指를 써야하는데 旨로 빌려 씀{捨대신 舍를 쓰듯...舍其路而不由[맹자]} * 而 : ~하여(그래서) * 直旨 : 왕이 직접 내린 명령이라는 뜻이 있는데 문맥과 전혀 연결이 되지 않고, 旨를 語尾나 句末에 어조를 고르게 하기 위해 쓰이는 어조사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음.
직지봉은 없으니 아닌 듯하고 있다면 그 해석이 맞습니다.
점필재선생도 '여기에서 천왕봉이 우러러보인다.'라고 하셨는데,
그래서인지 우리는 모두 한동안 영랑재에서 떠날 줄을 모릅니다.
제 블로그 스킨 타이틀 겨울 풍경입니다
<이장>님 작품은 다릅니다.
이분들 누구죠?
이 사진을 찍기 위해 <이장>님 부부는 하봉으로 부역을 나가고...
그림이 너무 멋지죠?
젠장 이럴수가 내 솜씨를 보세요. 너무합니다.
사태지역을 지나면서 자연에 대한 두려움을 또 한 번 느낍니다.
헬기장에서 치밭목 오는 길도 난관의 연속입니다.
치밭목 이정표 삼거리에서 발자국을 좇아갔는데
조개골로 빠져 다시 올라오느라 애를 먹었습니다.
치밭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네 분은 내려가시고 우리 셋은 남기로 합니다.
남명매南冥梅
다음날 아직 꽃은 피우지 못했지만
덕산德山에서 잠시 山天齋에 들러 남명매도 보고
매화를 愛好하였던 남명 조식선생의 숨결을 느껴봅니다.
산천재(山天齋)의 남명매
선생은 산천재를 짓고는 그 뜰에 매화나무를 손수 심었다. 그리고 해마다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이 매화나무를 몹시 사랑했다. 산천재의 뜰에 있는 이 남명매는 산천재를 건립할 당시에 심었다면 이제 440 여년의 연륜을 헤아린다. 밑에서부터 크게 세 갈래로 갈라진 줄기는 뒤틀려서 위로 뻗어 올랐다.[펌]
성철 큰스님
단성으로 나와 성철스님 생가에 세워진 겁외사劫外寺
지리산이 낳은 큰 인물들의 발자취를 돌아보았습니다.
좋은사진<이장>님/나쁜사진<도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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