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崇祖惇宗/독립운동

군문도총 조동석

도솔산인 2006. 8. 22. 20:58
 

조동석(1845~1896. 6.17)

 

경북 상주(尙州) 사람이다.
의병으로 경북일대에서 활약하였다. 일제는 1894년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거하고 1895년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만행을 저지른 후 친일정권을 사주하여 단발령과 복제개혁을 추진하는 등 조선의 국권을 탈취하려는 침략정책 수행을 가속화하였다. 조동석은 국권상실의 위기를 절감하고 무장투쟁을 통해 국권을 회복하고자 1896년 2월 이기찬(李起燦)·허위(許蔿)·강무형(姜懋馨) 등과 함께 경북 김산(金山)에서 거의하였다. 의진의 대장(大將)으로 이기찬을 추대하고 조동석은 도총(都摠)의 직책을 맡아 경북 성주(星州)·김천(金泉)·금릉(金陵) 등지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하다가 전사,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註·止山遺稿(李起燦, 毛筆草本) 권 3
·甲午·丙申日記(呂中龍)
·旺山許蔿先生全集(1972) 第2卷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1卷 234·244面
·金山義陣考(권대웅, 윤병석교수화갑기념 한국근대사논총), 219∼225面
·大邱慶北抗日獨立運動史(광복회) 27面
·金泉市史(김천시) 上卷 240·243面

 

* 지산유고의 기록

 

▶丙申年(1896년) 二月 二十七日
 二十七日 開坐於鐘閣 以梁濟安爲中軍 趙東奭爲都摠 姜懋馨爲贊劃 許蔿爲參謀 李時佐·呂永昭爲書記 尹鴻采以先鋒兼組練將 編伍儒兵三十餘 火 兵五十餘.
 運粮官朴鳳汝 私囑守門官文在善 以二百金納交於中營  中營笞而却之 其廉如此


 이월 이십칠일 鐘閣(종각)에 앉아 대회를 열고 梁濟安(양제안)을 中軍(중군)으로 삼고, 趙東奭(조동석)을 軍門都摠(군문도총)으로 삼고, 姜懋馨(강무형)을 贊劃(찬획)으로 삼고, 許蔿를 參謀(참모)로 삼고, 李時佐(이시좌) 呂永昭(여영소)를 書記(서기)로 삼고, 윤홍채를 先鋒(선봉)겸 組練將(조련장)으로 삼아 隊伍(대오)를 儒兵(유병) 삼십여 명 火 兵(화포병) 오십여 명으로 편성하였다.
 運粮官(운량관) 朴鳳汝(박봉여)가 守門官(수문관) 文在善(문재선)에게 私的(사적)으로 부탁하여 二百金(이백금)을 中營(중영)에서 주고받으니, 中營(중영)에서 볼기를 쳐서 물러나게 하였다. 그 청렴함을 이와 같이 하였다.

 

▶丙申年(1896년) 四月 初三日
 初三日午刻 聯投三單于本陣 則士卒有呼泣者 軍官有等訴者 豈可以呼訴爲哉 傳任于趙進士東奭 退宿于大院庵 時有康模·康羲二侄來侍


 사월 초사흘 오시 연이어 세 개의 單子(단자)를 本陣(본진)에 보냈다. 곧 사졸 중에 큰소리로 울부짖으며 우는 사람이 있었다. 군관 중에 같이 호소하는 자가 있으나 어찌 호소하여 될만한 일인가? 大將職(대장직)을 進士(진사) 趙東奭(조동석)에게 傳任(전임)하고 물러나 大院庵(대원암)에서 묵었다. 때에 康模(당질) 康羲(강희) 두 조카가 와서 모셨다.

 

·康模(1862∼?) : 止山(지산)의 堂姪(당질)이며 德庵公(덕암공)의 長孫(장손) 당시 35세로 止山(지산)과는 9세 年下(연하)로 止山(지산)의 학문과 사상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을 것으로 추정됨.
·康羲(강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