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찬(1853.10.12~1908. 1.13)
경북 청송(靑松) 사람이다.
1896년 음(陰) 2월 10일 경북 김천(金泉)에서 허 위(許蔿)·조동석(趙東奭)·강무형(姜懋馨) 등과 함께 거의하여 금릉(金陵)을 점령하고, 포군(砲軍)을 포함한 수백 명의 군사를 모집하여 무장시킨 후 대장(大將)으로 추대되었다.
그리고 조동석을 군문도총(軍門都摠)에, 강무형을 찬획(贊劃)에, 허 위를 참모장(參謀將)에 선임하여 진용을 갖춘 후 대구부(大邱部) 진공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관군이 먼저 출동하여 자신의 의진(義陣)의 하나였던 성주진(星州陣)을 공격하고 또한 적이 연합하여 대 공세를 펴게 되자 그의 진공계획은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며 같은 해 4월 황제의 해병(解兵) 명령이 내리자 해진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註·家狀(필사본, 1931. 6월 이강하 작성)
·지산유고(이기찬, 필사본) 제3권 일기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1권 243·244면
경북 청송(靑松) 사람이다.
1896년 음(陰) 2월 10일 경북 김천(金泉)에서 허 위(許蔿)·조동석(趙東奭)·강무형(姜懋馨) 등과 함께 거의하여 금릉(金陵)을 점령하고, 포군(砲軍)을 포함한 수백 명의 군사를 모집하여 무장시킨 후 대장(大將)으로 추대되었다.
그리고 조동석을 군문도총(軍門都摠)에, 강무형을 찬획(贊劃)에, 허 위를 참모장(參謀將)에 선임하여 진용을 갖춘 후 대구부(大邱部) 진공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관군이 먼저 출동하여 자신의 의진(義陣)의 하나였던 성주진(星州陣)을 공격하고 또한 적이 연합하여 대 공세를 펴게 되자 그의 진공계획은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며 같은 해 4월 황제의 해병(解兵) 명령이 내리자 해진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註·家狀(필사본, 1931. 6월 이강하 작성)
·지산유고(이기찬, 필사본) 제3권 일기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1권 243·24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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