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산행기록

삼도봉에서 아미월을 만나다(091121~22)

도솔산인 2009. 11. 23. 09:34

 

민주지산 삼도봉의 아미월(091121~22)

 

▣ 일     시 : 2009년 11월 21일(토) ~ 22일(일)

▣ 산 행 지 : 민주지산

▣ 인     원 : 10명(미산님, 공교수님, 솔향님, 소혼님, 산노을님, 선권님, 행인님, 승균, 호야, 余)

▣ 코     스 : 주차장 - 물한계곡 - 활룡사 - 미나미골 - 삼마골재 - 삼도봉 - 석기봉 - 삼두마애불 - 민주지산 - 각호산 - 각호골 - 사방댐 - 주차장

 

 * 민주지산 :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백운산"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일제 강점기에 "민주지산(1,241.7m)"으로 산명이 변경된 산으로 충북, 전북, 경북 삼도에 걸쳐 있으며 동쪽으로 석기봉(1,200m)과 삼도봉(1,176m), 북쪽으로 각호산(1,178m)이 좌우로 날개처럼 우뚝 솟아 웅장한 기상을 펼치며 백두대간을 굽어보고 있다. 민주지산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은 1998년4월1일 400km 야간 천리행군 중 폭설과 강풍으로 조난을 당한 공수부대 요원들이 저체온증으로 순직한 산악사고의 현장이기도 하다.

 

 처음 민주지산을 찾은 것이 10년이 넘은 것 같다. 98년 공수부대원의 산악사고가 있던 해 늦가을로 당시에는 진입로가 비포장 도로였고, 마을 노인회에서 입장료를 받고 마을 부녀회에서 국수를 삶아 팔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을 실감할 정도로 도로포장은 물론 넓은 주차장과 팬션까지 개발이 진행 중이다. 

 

 첫날의 목적지는 물한계곡으로 올라 삼마골재를 지나 삼도봉 헬기장까지 4.6km...

삼마골재 아래 500m에서 취수를 하고 삼도봉에 오르니 해는 이미 지고 노을의 흔적이 조금 남아 있었다. 헬기장에 내려와 눈밭에 젤트를 설치하는데 덕유산 향적봉 위로 짙은 청자빛 하늘에서 고즈녁한 초나흘 아미월이 우리를 맞이한다. 아미월을 보니 생각나는 사람이 있으니, 오늘 밤도 찬이슬에 옷깃을 적시려나... 

 

* 1일차(21일) 

 

 

 

 

 

 날이 어두어지자 아미월 달빛이 그 밝기를 차츰 더하였다. 밤사이 몇 번이나 젤트에서 나와 비단에 수를 놓은 듯한 하늘을 보았다. 마치 보름달이 뜬 것과 같이 사위의 사물이 분명하게 보이다니 별빛이 이렇게 밝을 줄이야...

 

* 2일차(22일) 

부항령에서 우두령 구간을 간다는 백두대간팀  

 

대야동&해인동

 

대야동과 해인동이 내려다 보였다. 어렴풋이 해인동과 대야동의 사이에 홍심동이 보인다. 선대의 <지산유고 창의일기>를 좇아 홍심동을 찾은 일이 있다.(070226) 

 

▶丙申年(1896년) 三月 初五日 初五日 入三道峰下紅心洞 卽李台容直山庄也 有積百苞租 自願付義 亦過手也

 삼월 초닷세 三道峰(삼도봉)아래 紅心洞(홍심동)으로 들어가 李容直(이용직) 公의 山莊(산장)에 나아갔다. 온갖 돌 콩과 쌀이 쌓여 있는 것을 자원하여 義陣에 주었는데 또한 지나칠 정도의 큰손이었다.<지산유고 창의일기에서>

 

  홍심동(紅心洞)

 홍심은 대야리 남쪽 골짜기에 몇집 있었던 마을이다. 구한말 이곳에 살던 이용강 (李龍岡. 경상도관찰사를 파직당하고 이곳에 은거)이 주택을 짓고 살면서 부녀자를 농락하는 등 횡포를 부렸는데, 항일독립군 김산장의군(金山杖義軍)에게는 군량미 80석을 순순히 내놓았다 한다.

 -김천의문화 -지명유래 및 설화에서-

 

 이용직(李容直)[1824(순조 24)∼?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수경(受卿, 授卿). 병구(秉九)의 아들이다. 1850년(철종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용강현령·홍문관교리를 거쳤고 실록청기주관을 겸하였다. 이후 사간원헌납을 거쳐 사헌부집의·장악원정·동부승지·공조참의 등을 역임하였고, 1864년(고종 1) 성균관대사성, 1865년 이조참의가 되었다. 1866년 병인양요 때에는 여주목사로서 호남소모사(湖南召募使)가 되어 장정을 모집하였다. 이후 한성부 좌윤·우윤, 병조·이조·예조의 참판을 역임하였고, 1882년 대사헌이 되었다. 공조판서·의정부좌참찬을 지냈고,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경연관(經筵官)을 겸하였으며, 1893년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관제개혁 후 1902년 궁내부특진관을 역임하였다.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펌)

 

 이용강과 이용직은 같은 인물인 듯하다. 왕의 지친으로 홍심동으로 귀양살이를 와서 근동의 백성들에게 온갖 못된 짓을 저질렀다는 이야기며, 여기에 있던  재실의 목재를 헐어서 대아 1리 금령김씨의 葛山齋를 지었고, 옛날 고택은 영동 어딘가로 실려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07.02.26) 패악무도한 자가 의진에게 80석의 군량미를 내 놓은 것은 본인의 본심이었는지 살기위해 마지못해 한 일인지 짐작이 되지 않는다. 현재 이용직의 산장 자리에는 천마농장이 들어서 있다.  

 

허접한 일출

 

백두대간중인 산객 

삼두마애불 

민주지산에서 바라 본 석기봉 

 

각호산에서 바라 본 민주지산

 

 삼도봉에서 각호산까지는 해발 1,000m대의 고도차이가 별로 없는 8km의 능선길이다. 안내산악회의 무리에서 벗어나 조용한 각호산 정상에서 머물다가 도마령과 삼거리에서 각호지맥 쪽으로 방향을 잡아 아주 가파른 각호골로 내려섰다.ㅠㅠ

각호산 정상 

각호산

 

각호골 사방댐 

 하산 길은 군데 군데 산사태로 무너져 있고 각호골 초입은 사방댐이 새로이 들어서 있다. 뒤에서 내려오시는 멋진<미산>선생님을 카메라에 담고 산행을 마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