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盈科後進/고전향기

지리산의 물고기

도솔산인 2014. 2. 3. 22:47

 

지리산의 물고기


                                                                                                             -이덕무 이야기-
  
 세상 사는 일이 하도 심드렁하다 보니, 옛 사람의 맑은 정신이 뜬금없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 삶의 속도는 나날이 빨라져, 어떤 새것도 나오는 순간 이미 낡은 것이 되어 버린다. 그런데도 내면에는 마치 허기가 든 것처럼 충족되지 않는 허전함이 있다. 정말 마음에 맞는 벗이 하나 있어, 멀리서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훈훈해지는 그런 만남이 문득 문득 그리울 때가 있다.
 
 만약 한 사람의 지기를 얻게된다면 나는 마땅히 10년간 뽕나무를 심고, 1년간 누에를 쳐서 손수 오색실로 물을 들이리라. 열흘에 한 빛깔씩 물들인다면, 50일만에 다섯가지 빛깔을 이루게 될 것이다. 이를 따뜻한 봄볕에 쬐어 말린 뒤, 여린 아내를 시켜 백번 단련한 금침을 가지고서 내 친구의 얼굴을 수놓게하여, 귀한 비단으로 장식하고 고옥(古玉)으로 축을 만들어 아마득히 높은 산과 양양히 흘러가는 강물, 그 사이에다 이를 펼쳐 놓고 서로 마주보며 말없이 있다가 날이 뉘엿해지면 품에 안고서 돌아오리라.
 
 이덕무(李德懋, 1741-1793)의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에 나오는 글이다. 한 사람의 벗을 위해 10년간 뽕나무를 심고, 또 일년을 누에 쳐서 실을 뽑아, 하나 하나 정성 들여 오색 물을 들이겠다. 그것을 다시 봄볕에 말려, 아내에게 시켜 친구의 얼굴을 수놓게 하고는, 저 백아와 종자기가 거문고로 이야기를 주고 받던 고산유수(高山流水)의 가에서 말없이 마주보고 앉았다가 저물녘에야 돌아오겠다고 했다. 아마 그 또한 마음 속에 지녀둘 한 사람의 지기를 얻지 못해 애를 태웠던가 싶다.
 
 이덕무! 그를 생각하면 나는 떠오르는 그림이 있다. 후리후리한 큰 키에 비쩍 마른 몸매. 퀭하니 뚫린 그러나 반짝반짝 빛나는 두 눈. 추운 겨울 찬 구들에서 홑이불만 덮고 잠을 자다가 《논어(論語)》를 병풍 삼고, 《한서(漢書)》를 물고기 비늘처럼 잇대어 덮고서야 겨우 얼어 죽기를 면했던 사람.
 
 목멱산 아래 멍청한 사람이 있는데, 어눌하여 말을 잘하지 못하고 성품은 게으르고 졸렬한데다, 시무(時務)도 알지 못하고 바둑이나 장기는 더더욱  알지 못하였다. 남들이 이를 욕해도 따지지 않았고, 이를 기려도 뽐내지 않으며, 오로지 책 보는 것만 즐거움으로 여겨 춥거나 덥거나 주리거나 병들거나 전연 알지 못하였다.

 어릴 때부터 21세 나도록 손에서 일찍이 하루도 옛 책을 놓은 적이 없었다. 그 방은 몹시 작았지만 동창과 남창과 서창이 있어, 해의 방향에 따라 빛을 받아 글을 읽었다.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책을 보게 되면 문득 기뻐하며 웃었다. 집안 사람들은 그가 웃는 것을 보고 기이한 책을 얻은 줄을 알았다. 

 두보의 오언율시를 더욱 좋아하여, 끙끙 앓는 것처럼 골똘하여 읊조렸다. 그러다 심오한 뜻을 얻으면 너무 기뻐서 일어나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데, 그 소리는 마치 갈가마귀가 깍깍대는 것 같았다. 혹 고요히 소리 없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뚫어지게 바라보기도 하고, 꿈결에서처럼 혼자 중얼거리기도 하였다.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간서치(看書痴)`, 즉 책만 읽는 멍청이라고 해도 또한 기쁘게 이를 받아들였다. 아무도 그의 전기를 짓는 이가 없으므로 이에 붓을 떨쳐 그 일을 써서 〈간서치전(看書痴傳)〉을 지었다. 그 이름과 성은 적지 않는다.
 
 이〈간서치전〉은 이덕무가 젊은 시절의 자기 자신에 대해 적은 실록이다. 아무도 그의 전기를 짓지 않기에 자기가 그 일을 적는다고 했다. 일면의 자조와 일면의 득의가 교차하고 있는 글이다. 그는 풍열로 눈병에 걸려 눈을 뜰 수 없는 중에도 어렵사리 실눈을 뜨고서 책을 읽었던 책벌레였다. 열 손가락이 다 동상에 걸려 손가락 끝이 밤톨만하게 부어 올라 피가 터질 지경 속에서도 책을 빌려달라는 편지를 써보내던 그였다. 그는 마치 기걸이 들린 사람처럼 책을 읽었다. 가난하여 책 살 돈이 없었기에 늘 남에게서 빌려 보았다. 한 권 책을 얻으면 기뻐 이를 읽고, 또 중요한 부분을 베껴 적었다. 이렇게 읽은 책이 수만 권이었고, 파리 대가리만한 작은 글씨로 베낀 책만 수백권이었다.
 
 그는 왜 그토록 책 읽기에 집착했을까? 그는 서얼이었다. 품은 바 포부와는 관계 없이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원천적으로 차단되어 있었다. 책을 많이 읽는다 해서 딱이 써 먹을 데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애초에 자신의 힘이나 능력 밖의 일이거나, 법을 범하고서야 가능한 부정한 것이었기에 그 처절한 가난과 숙명의 굴레를 천명으로 알고 살았다. 견딜 수 없는 고비도 많았다. 
 
 내집에 좋은 물건이라곤 단지 《맹자》 일곱 편 뿐인데, 오랜 굶주림을 견딜 길 없어 2백전에 팔아 밥을 지어 배불리 먹었소. 희희낙낙하며 영재( 齋) 유득공(柳得恭)에게 달려가 크게 뽐내었구려. 영재의 굶주림도 또한 하마 오래였던지라, 내 말을 듣더니 그 자리에서 《좌씨전》을 팔아서는 남은 돈으로 술을 받아 나를 마시게 하지 뭐요. 이 어찌 맹자가 몸소 밥을 지어 나를 먹여주고, 좌씨가 손수 술을 따라 내게 권하는 것과 무에 다르겠소. 이에 맹자와 좌씨를 한없이 찬송하였더라오. 그렇지만 우리들이 만약 해를 마치도록 이 두 책을 읽기만 했더라면 어찌 일찍이 조금의 굶주림인들 구할 수 있었겠소. 그래서 나는 겨우 알았소. 책 읽어 부귀를 구한다는 것은 모두 요행의 꾀일 뿐이니, 곧장 팔아치워 한 번 거나히 취하고 배불리 먹기를 도모하는 것이 박실(樸實)함이 될 뿐 거짓 꾸미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오. 아아! 그대의 생각은 어떻소?
 
 이서구(李書九, 1754-1825) 에게 보낸 편지다. 주림을 견디다 못해 손때에 절은 《맹자》를 잡혀 오랜 만에 온 식구들이 굶주린 배를 채웠다. "여보게! 이 사람. 오늘은 맹자가 내게 밥을 지어 주네 그려." 그 길로 친구 집에 달려가 툭 던지는 말이다. 이미 양식 떨어진지가 여러날 째이던 유득공도 제 아끼던 《좌씨전》을  내다 팔아 쌀 사고 남은 돈으로 막걸리를 받아와 친구에게 따라주는 것이다. 무엇이 그리 좋아 희희낙낙했던가? 무슨 자랑할 일이라고 친구 집으로 달려 갔던가? 또 그 와중에 제 주머니 사정 아랑곳 않고 술을 받아와 벗에게 따라주던 유득공의 그 심사도 도무지 나는 헤아릴 길이 없다.
 
 그렇다! 이 더러운 세상에서 책 읽어 부귀를 꿈꾼다는 것은 애초에 허망한 일이 아니었더냐. 차라리 다 팔아치워 밥술이나 배불리 먹는 것이 더 낫지 않으랴! 때로 이런 자조의 심정인들 왜 없었으랴! 그러나 나는 알 수가 있다. 제 손 때 묻은 《맹자》가 혹 남의 손에 넘어가지나 않을까 싶어 하루가 멀다하고 헌 책방을 기웃거렸을 그의 모습을 말이다.
 
 그의 어머니는 영양실조 끝에 폐병을 얻어 세상을 떴다. 의원의 처방을 받고도 돈을 마련하지 못해 그 약을 못해 드렸다. 어쩌다 어렵게 약을 마련하면 손수 약을 달이며 약탕관에서 부글부글 끓으며 졸아드는 약물 소리를 제 애간장이 녹는 소리로 들었다. 어머니가 그렇게 세상을 뜬 후 그는 무연히 앉아, "지금도 슬픈 생각이 들어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어머니의 기침소리가 은은하게 아직도 귀에 들리는 것만 같다. 황홀하게 사방을 둘러 보아도 기침하시는 어머니의 그림자는 찾을 수가 없다. 이에 눈물이 얼굴을 적신다"고 쓰고 있다.
  
 고생 끝에 하필 가난한 집에 시집간 누이가 역시 영양실조로 폐병이 깊어져 집에 데려와 구완하다가 또 그렇게 세상을 버렸을 때, 그는 피눈물로 누이의 제문을 이렇게 썼다.
 
......6월 3일, 폭우가 쏟아지며 캄캄해 졌다. 전날 저녁부터 아침까지 온 식구가 모두 밥을 굶었다. 네가 이를 알고는 기쁘지 않아 상을 찡그리더니, 이 때문에 병이 더 극심해졌다. 아이를 집에 돌려 보내자 갑자기 네가 숨을 거두었다. 늙은 어버이는 흐느껴 울며 부자와 형제가 이에 세 번 곡하였다. 천하에 지극히 애통한 소리다. 너는 이제 영원히 잠들었으니 이를 듣는가 듣지 못하는가? ......

 평시에는 남들과 말할 적에 형제가 몇이냐고 물으면 아무개와 아무개 넷이 동기(同氣)라고 하였더니, 이제부터는 남들이 물으면 넷이라 할 수가 없겠구나. 몸은 나무토막처럼 뻗뻗하여 육골(肉骨)을 긁어내는 것만 같구나. 형은 아우의 죽음을 슬퍼하고, 아우가 형을 묻는 것을 애통해 하는도다. 이치가 분명하여 차례가 있어 어길 수 없건만, 네가 태어나고 죽는 것을 보게 되니 나는 원통하고 참담할 뿐이로구나. 너는 비록 편하겠으나 내 죽으면 누가 울어주랴! 어두운 흙구덩이에 차마 어찌 옥같은 너를 묻으랴? 아, 슬프도다!
 
 눈물 없이는 차마 읽을 수 없는 제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쯤에서 그의 무기력하기만 한 독서가 슬며시 미워진다. 누구를 위한 독서요, 무엇을 위한 독서였던가? 제 어미의 약조차 마련하지 못하고, 제 누이 마저 영양실조로 떠나 보내는 그런 독서를 무엇에다 쓴단 말이냐? 
 
 정작 그가 벼슬길에 오른 것은 39세 때였다. 정조가 학술 진흥을 내세워 왕권 강화책의 일환으로 세운 규장각(奎章閣)에 초대 검서관(檢書官)으로 임명된 것이다. 여기에는 그의 식견과 사람됨을 아끼던 벗들의 적극적인 추천이 있었다. 검서관의 일이란 규장각의 문서 정리와 자료 조사와 같은 단순 작업이었다. 책을 교정하는 작업도 했다. 하루 오천 자도 넘는 글을 쓰느라 손이 마비될 지경에 이를 만큼 힘든 나날을 보냈다.
 
 그는 유난히 호(號)에 대한 욕심이 많았다. 젊었을 적에는 `영처( 處)`란 호를 썼다. 어린아이와도 같은 거짓 없는 마음을 썼으되 처녀의 수줍음을 지녀 남에게 보이기 부끄러워서라고 했지만, 그처럼 천진하고 진실된 마음이 담긴 것을 은근히 자랑스럽게 여겼다. 또 매미와 귤의 맑고 깨끗함을 사랑하여 `선귤당(蟬橘堂)`이란 당호(堂號)를 썼다. 강호에 살면서 아무 영위함 없이 그저 제 앞을 지나가는 고기만 먹고 사는 신천옹이라고도 불리우는 청장(靑莊)의 삶을 부러워하여 제 집의 이름을 `청장관(靑莊館)`이라고 짓기도 했다.
 
 많은 호 못지 않게 그가 남긴 방대한 저술은 더더욱 사람을 압도한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입으로 말하고 마음으로 생각한 것을 적었다하여 지은 《이목구심서》는 당시 연암 박지원과 초정 박제가 등이 여러번 빌려가 자기 글에 수도 없이 인용한 책이다. 그의 해박한 독서와 지적 편력, 사물에 대한 투철한 관심이 한 눈에 들여다 보인다. 한마디로 경이로움으로 읽는 이를 압도하는 글이다. 또 선비의 바른 몸가짐을 격언투로 적은 《사소절(士小節)》, 고금 명인들의 시화(詩話)를 수록한 《청비록(淸脾錄)》, 역사서인 《기년아람(紀年兒覽)》, 일본 풍토지라 할 《청령국지(  國志)》 등이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 규장각에 있으면서는 《국조보감(國朝寶鑑)》《갱장록(羹墻錄》《문원보불(文苑  )》《대전통편(大典通編)》의 편찬에 참여하여 한 몫을 담당하였다. 이밖에 《어정송사전(御定宋史筌)》과 《여지지(輿地誌)》,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등의 관찬서도 모두 그의 꼼꼼한 필치가 배어있는 책들이다.
 
 정조는 그의 책 읽는 소리를 아껴, 임금 앞이라 자꾸 소리를 낮추는 그에게 자주 음성을 높일 것을 주문하였고, 책 교정 말고 스스로의 저작을 남길 것을 권면하여 그를 감격시켰다. 39세 이후 15년 관직에 있는 동안 정조는 그에게 모두 520여 차례에 걸쳐 하사품을 내렸다. 그가 세상을 뜨자 정조는 국가의 돈으로 그의 문집을 간행케 했다. 그리고 그 아들에게는 아버지의 벼슬을 그대로 내렸다. 그러고 보면 그의 독서가 그렇게 무기력한 것만은 아니었다.
 
 오늘에 그가 나를 압도하는 대목은 결코 그의 호한한 독서와 방대한 저작이 아니다. 그 처절한 가난 속에서도 맑은 삶을 살려 애썼던 그의 올곧은 자세가 나는 무섭다. 내가 부러워 하는 것은 만년의 별 실속 없는 득의거나, 그 많은 임금의 하사품이 아니다.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고, 알아줄 기약도 없는 막막함 속에서도 제 가는 길을 의심치 않았던 그 믿음이 나는 두렵다. 한편으로 그 갈피갈피에 서려있을 피눈물나는 고통과 열 손가락이 퉁퉁 붓는 동상과 굶주림, 영양실조 끝에 폐병으로 어머니와 누이를 떠나보내는 무력감과 자조감이 나는 또 눈물겹다. 그가 지은 《송유민보전(宋遺民補傳)》에는 두준지(杜濬之)란 이의 시가 실려 있다.
   
寧枉百里步  曲木不可息
寧忍三日飢  邪蒿不可食
 
차라리 백리 걸음 힘들더라도  
굽은 나무 아래선 쉴 수가 없고
   
비록애 사흘을 굶을지언정   
기우숙한 쑥은 먹을 수 없네.
 
 
그는 이런 시를 읽으며 마음을 다잡았다고 했다. 나는 그의 이런 무모한 인내와 자기 확신이 겁난다.
 
그의 편지 글에 보면 "옛날에는 문을 닫고 앉아 글을 읽어도 천하의 일을 알 수 있었지요."라고 한 구절이 있다. 정작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오늘의 우리들이다. 인터넷의 시대에 세계의 정보를 책상 위에서 만나보면서도 오늘의 우리는 천하의 일은커녕 제 자신에 대해서조차 알 수가 없다. 정보의 바다는 오히려 우리를 더 혼란 속에서 허우적거리게 할 뿐이다. 왜 그럴까? 거기에는 나는 없고 정보만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내가 소유한 정보의 양이 늘어갈수록 내면의 공허는 커져만 간다. 주체의 확립이 없는 정보는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조그만 시련 앞에서도 쉽게 스스로를 허문다. 이른바 거품 경제 속에서 장미빛 미래를 꿈꾸다 갑자기 닥친 잿빛 현실 속에서 그들의 절망은 너무도 빠르고 신속하다. 실용의 이름으로 대학의 지적 토대는 급격히 무너지고, 문화는 말살되고 있다. 취직과 돈벌이와 영어가 삶의 지상 목표로 변한 사회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젊은이들은 스스로를 `저주받은 세대`라고 되뇌이며 우왕좌왕 하고 있다. 돈을 벌수만 있다면, 출세를 할 수만 있다면 지금까지 소중히 여겨온 가치와 자존(自尊)도 송두리째 던져버릴 태세다. 그렇지만 그런가?
 
 그 처참한 가난과 신분의 질곡 속에서도 신념을 잃지 않았던 옛 사람의 그 맹목적인 자기 확신이 나는 부럽다. 독서가 지적(知的) 편식이나 편집적 욕망에 머물지 않고 천하를 읽는 경륜으로 이어지던 그 지적 토대를 나는 선망한다. 추호의 의심없이 제 생의 전 질량을 바쳐 주인 되는 삶을 살았던 그 선인들의 내면 풍경이 나는 그립다.
 
  가을날 오건(烏巾)을 쓰고 흰 겹옷을 입고 녹침필(綠沈筆)을 흔들면서 해어도(海魚圖)를 평하는데, 문종이를 바른 창이 화안하더니 흰 국화의 기우숙한 그림자를 만들었다. 묽은 먹을 묻혀 기쁘게 모사하자, 한쌍의 큰 나비가 향기를 쫓아 와서는 꽃 가운데 앉는다. 더듬이가 마치 구리줄 같이 또렷하여 헤일 수가 있었으므로, 꽃 그림에 보태어 그렸다. 또 참새 한 마리가 가지를 잡고 매달리니 더욱 기이하였다. 참새가 놀라 날아갈까봐 급히 베끼고는 쟁그렁 붓을 던지며 말하였다. "일을 잘 마쳤다. 나비를 얻었는데 참새를 또 얻었구나!"
 
  이덕무의 《이목구심서》에 실려 있는 글이다. 가을날 투명한 햇살이 흰 문종이 위로 부서진다. 그는 붓을 들고서 바다에서 고기가 뛰노는 그림을 구경하고 있었다. 아연 창에 어리는 국화꽃 그림자, 그 위에 나비 한 쌍이 와서 앉고, 참새 한 마리가 줄기에 매달렸다. 그 짧은 순간에 그린 크로키. 이윽고 나비도 날아가고 그림자도 스러져 버렸지만, 엷은 먹으로 남은 꽃과 나비와 새의 자욱은 지워지지 않고 그와 함께 그 겨울을 났겠구나.
 
 지리산 속에는 연못이 있는데, 그 위에는 소나무가 주욱 늘어서 있어 그 그림자가 언제나 연못에 쌓여 있다. 연못에는 물고기가 있는데 무늬가 몹시 아롱져서 마치 스님의 가사와 같으므로 이름하여 가사어(袈裟魚)라고 한다. 대개 소나무의 그림자가 변화한 것인데, 잡기가 매우 어렵다. 삶아서 먹으면 능히 병없이 오래 살 수 있다고 한다.
 
지리산 깊은 소(湫)에는 물고기가 살고 있다. 못 위로 허구 헌 날 비치는 소나무 그림자를 보다가 제 몸의 무늬마저 그 그림자와 같게 만든 물고기가 살고 있다. 사시장철 푸르른 낙락한 소나무의 기상을 닮아, 삶아 먹으면 병도 없어지고 오래 살 수 있게 해준다는 물고기가 살고 있다. 아! 나도 그 못가에서 살고 싶구나. 그래서 그 무늬를 내 몸에도 지녀두고 싶구나. 날로 가팔라만 져가는 비명같은 삶의 속도 속에서, 나는 한 번쯤 이런 생각을 하며 생활의 숨결을 골라 보았으면 싶은 것이다.
 
 【정민 교수의 한국한문학 홈에서 옮겨 온 글입니다.】

* 출처 다음카페 : 해탈의 향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