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盈科後進/고전향기

심노숭의 자저실기(自著實紀)

도솔산인 2014. 2. 8. 17:45

 

 

심노숭의 자저실기(自著實紀)

 

심노숭 지음, 안대회·김보성 외 옮김

 

‘자저실기(自著實紀)’는 조선후기 정조와 순조년 간을 살았던 심노숭(沈魯崇·1762∼1837)의 자기 기록이다. 자신의 외모, 기질, 나쁜 습관은 물론이고, 정치계의 숨은 사실, 유명 인사의 사생활, 그 시절 벌어진 웃기고 섬뜩한 에피소드들이 노골적으로 기록돼 있다.

  

책의 첫 면을 펼쳐보는 순간, 심노숭이 200년 전 인물이며 갓을 쓴 조선선비의 모습이었다는 사실을 잊고 말 것이다. 그의 글에는 요즘의 블로그보다 농밀한 자기애의 치기가 담겨 있다. “나는 어려서부터 화가만 만나면 내 모습을 그려 달라고 졸랐다. 몇 명의 화가를 거쳐 수십 장을 바꾸어 그렸는데 하나도 닮은 것이 없어 제 풀에 포기”했으니, 차라리 글로 써서 자신의 존재를 사실대로 알리겠다는 것이 책의 프롤로그다. 글쓰기에 대한 자부가 뚜렷하다.

 

그의 글은 자기소개로 시작한다. 우선 얼굴 묘사다. 둥글넓적한 두상, 흰자위가 많은 눈, 매부리코에 두툼한 콧방울, 작은 입, 코와 볼의 마마 자국이 몇 개인지 묘사가 세밀하다. 그다음은 신체 묘사다. 깡마른 체격, 작은 키에 볼록한 복부도 가리지 않았다. 그의 성격 묘사로 진행된다. 결벽증, 급한 성격, 부족한 담력, 기억력 부족, 장부의 숫자를 보면 미칠 것 같아서 서명만 한다는 고백, 그가 혐오하는 인물형 등을 나열했다. 성격 묘사는 구체적인 습관으로 이어지고 자신의 치부도 숨김없이 드러낸다. 정욕이 지나쳐 패가망신할 뻔한 소싯적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털어놓고, 기생집 출입을 자주 했다는 대목에 이르면 독자의 어안이 벙벙해진다. “정욕이 남보다 지나친 면이 있었다.” “기생들과 놀 때는 좁은 골목이나 개구멍도 가리지 않았다.” 영락없이 현대의 오렌지족이나 ‘좀 놀아본 오빠’다.

 

심노숭은 효종 때 영의정을 지낸 심지원(沈之源)의 7대 종손이며, 아버지는 문과 장원급제 출신으로 영·정조 시대 노론(老論) 시파(時派)의 핵심 인물인 심낙수(沈樂洙·1739∼1799)다. 다만 심노숭 자신은 진사에 급제한 뒤 대과를 통과하지 못한 채, 김조순의 배려로 의금부도사를 거쳐 논산현감, 광주판관 등 주로 지방을 돌며 관직생활을 했다. 심노숭은 그 시절 문인들 사이에 새롭게 유행한 ‘소품(小品)’ 스타일의 참신함에 매료됐다. 소품은 고전적 문체와 주제에서 벗어나 자신의 신변잡기와 주변의 풍속을 돌아보며 정감 있고 산뜻하게 글을 엮는 수필식 글쓰기다. 이 책은 그 표본이라 할 수 있다.

 

심노숭의 시절 정치판은 분쟁이 격화됐다. 편을 갈라 사생결단하는 싸움판이었다.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 홍봉한(洪鳳漢)과 정순왕후의 오라버니 김귀주(金龜柱)가 남당과 북당으로 편을 갈라 싸우다가 다시 시파와 벽파로 나뉘어져 정치대립을 하고 있었다. 그 속에서 심노숭의 부친 심낙수는 시파로서, 김귀주와 그에 붙은 홍국영(洪國榮), 심환지(沈煥之), 김종수(金鍾秀) 등을 격렬하게 공격했다. 벽파(僻派)의 편이라면 처남과도 의절했다. 시파와 벽파가 한 회의실에 들어갔을 때 상대파의 꼴이 보기 싫어 중간에 병풍을 치고 앉았던 일은 당시 당파싸움이 얼마나 극심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심노숭은 시파의 렌즈로 카메라를 들이댔다. 이 책 속에서 벽파 정치인들이 처절하게 폭로됐다. 김귀주의 비굴한 미인계에 대한 고발이 한 예다. 정조의 측근이었던 홍국영은 키가 작은 비만형에 눈빛이 매서워 사람들을 두렵게 만드는 인상이라 했다. 홍국영이 인사권을 쥐고 흔들 때 기생을 끼고 질펀하게 노는 순간, 방에 들어온 이조참판에게 벌건 얼굴로 “개자식”이라 거듭 욕했다는 현장을 드라마처럼 묘사했다. 심환지의 사촌 심형지가 광증으로 딸을 찔러 죽이고 “죽인 것은 여우”라며 웃었다는 끔찍한 사회면성 보도가 눈에 띈다. 김종수의 형 김종후에 대한 비판도 신랄하다. 그는 입에서 악취가 심하고 이중인격의 위선자며, 심노숭이 담배를 피우자 창문을 열고 보란 듯 연기를 내몰 정도로 편협한 성품의 소유자였다는 것. 심노숭의 기록 속에 당시 상류층의 일그러진 자화상이 여과없이 드러났다. 심노숭의 역사 판단은 서늘하다. 이황의 시절에 당파의 싹이 텄고, 북벌론은 허상이었으며, 당파는 결국 헛된 명성에만 힘쓰고 있다고 지적한다.

 

심노숭이 후손에게 들려주고 싶은 선배들의 이야기를 기록할 땐 신이 났다. 중국 명나라 이여송(李如松)이 조선땅에 머물 때 문장가를 찾았다. 차천로(車天輅)가 한석봉을 데리고 나가 즉석에서 시를 지어 부르고 한석봉은 척척 명필로 받아 적어 이여송의 눈을 동그랗게 했다는 장면은, 조선시대 문예의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듯하다. 그런 한편 사회학적으로 숙고해볼 사건들도 수두룩하다. 한 원님이 돌봐준 스님에게 여자관계를 말해 달라고 농담 삼아 조르자 스님이 하는 수 없이 50년 전 기억을 말한다. 그 다음 날 원님은 스님을 사형에 처했다. 스님의 사연은 민가에 들어 한 여인의 가슴을 만지자 여인이 밖에 나가 스스로 자결했다는 내용이었다. 당시의 사회현실과 미담이 이모저모로 소개된다. 시아버지 정태화가 며느리 숙정공주로부터 머릿니를 잡아주는 서비스를 받았다는 믿지 못할 이야기, 사랑한 남성에 대한 의리를 지킨 여러 기생들의 용감하고 애련한 사연들이 실려 있다.

 

심노숭의 방대한 실기기록은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그는 스스로를 사랑했고 조롱했다. ‘요절할 관상’으로 태어나서, ‘한평생 온갖 좋지 못한 꼴만 당했다’고 술회하면서 그가 아는 사실을 기록하려는 의지에는 날카로움을 더해갔다. 그의 글쓰기에 대한 집착은 광증에 가까웠던 것 같다. 그의 저술은 평탄치 않았다. 심노숭이 이 책을 집필하던 중 유배를 가게 됐다. 그를 아끼는 사람들은 그의 손을 붙들고 타일렀고 멀리 있는 벗은 편지를 보내어 권했다. 이 재앙의 사단은 문자의 탓이니 저술을 그만두라고. 그러나 심노숭은 붓을 놓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나를 돌아보지 않고 한결같은 뜻으로 이어 나가 완성했다. 바닷가의 풍토병과 당뇨병을 앓는 와중이었지만 붓 하나 손에 잡고 종일토록 부지런히 써서 흉악한 무고가 몸에 닥치고 고질병이 뼛속까지 파고드는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글을 읽는 사람들은 잘 알리라. 이제 죽을 날이 머지않았으니, 지하의 아우에게 질정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필기본으로 전하며 세상에서 별로 언급되지 않던 ‘자저실기’를 완역해낸 일도 결코 만만한 작업은 아니었다. 762면의 두툼한 번역본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안대회(한문학) 성균관대 교수의 주도 아래 13명의 박사급이 매달렸다. 원문은 타이핑해 책의 부록으로 깔끔하게 실었다.

 

문화일보 북리뷰[문화] 2014.02.07(금) 예진수 기자 jinye@munhwa.com

 

 

 글쓰기 병에 걸린 어느 선비의 일상 『자저실기』. 지적 열기가 충만했던 조선 후기를 온몸으로 살아간 학자이자 문인인 심노숭이 자신의 삶과 격동기의 정치적·사회적·문화적 실상을 상세히 기록한 자서전이다. 저자의 일상생활 속에서의 치부와 감정까지 꾸밈없이 담고 있으며, 심지어 정적에 대한 노골적인 비난도 서슴지 않는가 하면 일그러진 지배계층의 문화를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한다.

 

 심노숭(沈魯崇, 1762~1837)은 정조·순조 연간의 학자이자 문인이다. 자는 태등(泰登), 호는 몽산거사(夢山居士) 또는 효전(孝田)이다. 정조 때에 강경한 정치적 입장을 견지했던 심낙수(沈樂洙, 1739~1799)가 부친이다. 심노숭은 1790년 진사가 되었으나 1801년부터 6년간 경상남도 기장에 유배되는 등 정치적 격랑 속에 불우한 장년기를 보냈다. 그는 젊은 시절 친구인 김조순·김려 등과 함께 명말청초의 패관 소품에 매료되어 창작에 열중했다. 그의 소품문은 신변잡사를 기록하고 풍속을 묘사하면서 자신의 감정을 풍부하게 드러내는 것이 특징이다. 그의 문집 [효전산고(孝田散稿)]는 방대한 분량으로 38책에 달하며, 정치를 논한 편저로 [정변록(定辨錄)]을, 역대 야사를 필사한 총서 [대동패림(大東稗林)]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