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 307] 반갑지 않은 손님
2014년이 한 달 가까이 지났다. 새해가 되면 늘 그랬듯이 올해도 한두 가지 다짐을 하며 한 해를 시작했다. 그런데 벌써 한 달이 지나고 우리 고유의 명절인 설날이 눈앞에 다가와 있다. 들뜨고 부산한 설 분위기에 휩쓸려서 며칠을 보내고 나면 어느새 2월, 멀리 남쪽 지방에선 옅은 봄기운이 감지될 때이다. 그러면 계절의 변화에 놀라 연초에 애써 다잡았던 마음을 상기시켜 보겠지만, 무덤덤한 일상으로 돌아가 있는 내 모습에 울적해지는 건 아닐지 모르겠다.
그런 생각 때문일까. 설을 앞둔 마음은 설레고 즐겁기보다는 아쉬움과 허전함이 앞선다. 옛사람들이 섣달 그믐날 밤 감상에 젖어 시를 읊으며 저무는 한 해를 아쉬워했던 것도 그래서였던 모양이다. 이맘때면 생각나는 글이 하나 있다.
갈수록 새해가 다가와도 즐거운 줄을 모르는 것은 나이를 먹는다는 사실 때문이다. 매년 11월, 12월이 되면 기분이 울적해져서 새해라는 두 글자를 거론조차 하기 싫어진다. 날짜가 점점 다가오면 평소 서먹서먹해서 만나고 싶지 않은 손[客]이 언제 내 집에 오겠다고 미리 알려온 것과 같아서, 아주 싫은 건 아니지만 관심은 거의 없다. 이윽고 초하루가 되면 그 손이 온 것 같아서 내쫓거나 피할 수는 없어도 조금도 반갑지가 않다.
섣달 그믐날에는 한없이 아쉬운 기분이 든다. 마치 정든 친구가 멀리 떠나게 되면 헤어지기가 어려워서 이별할 때 그의 수염ㆍ눈썹ㆍ정신ㆍ노랫소리ㆍ웃고 욕하는 모습ㆍ옷차림ㆍ걸음걸이 등을 자세히 살피는 것 같으니, 이후로 혹 다시 만나지 못하게 되면 모습이 어느새 잊혀지기 때문이다. 또 관례(冠禮)를 목전에 둔 동자(童子)가 ‘관례를 하고 나면 동자 시절과는 영영 이별이겠구나’라는 생각에 땋은 머리를 자주 만져보는 것과 같으니, 인정이란 것이 항상 그러하다. 저녁 무렵 해가 지려 하면 아쉬움을 금치 못해 석양을 찬찬히 바라보는데, 이는 그해의 햇빛이 다해 가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잠시 후 해가 지면 슬픈 마음을 감당하기 어려워진다. 밤이 되면 반드시 한층 더 애틋한 마음으로 고요히 북두성을 바라보면서 ‘금년 밤이 이젠 정말 얼마 남지 않았구나’라고 생각하는데, 문득 새벽닭이 울면 어찌할 수가 없다.
일단 설날로 접어들면 오각계(烏脚溪)1)에 한 번 빠진 사람이 온몸이 까매져서 곤륜노(崑崙奴)2)가 되어 버리듯이 금년의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마치 내일 병술년에는 천지 만물이 자연히 병술년의 빛깔을 나타내지 않을 수 없는 것과도 같다. 또 처녀가 납채(納采)를 하고 나면 다른 집안의 신부가 되므로 처녀라는 이름을 다시 얻고자 해도 될 수 없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군왕의 위엄으로도 어떻게 할 수 없고 부모의 사랑으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다. 또 애산(厓山) 앞바다에서 처절하게 항전하던 남송(南宋)의 배가 침몰한 것3)과 같으니, 송(宋)나라 백성이 원(元) 나라 사람이 되지 않고자 하여도 정삭(正朔)이 반포되고 천하가 통일된 다음에는 내키지 않더라도 원 나라 사람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1)오각계(烏脚溪) : 중국 장주(漳州) 근처에 있었다는 수명(水名)으로, 물이 워낙 더러워서 이곳을 건너면 발이 온통 새까맣게 변했다는 데서 나온 이름이다.
2)곤륜노(崑崙奴) : 당(唐) ․ 송(宋) 시대 부호의 집에서 부리던 남지나해(南支那海) 지역 출신의 노예를 가리킨다.
3)애산(厓山)……것 : 남송(南宋) 말에 원나라에 밀려 남쪽으로 쫓겨 내려간 송나라 군신(君臣)이 애산 앞바다에서 힘겹게 싸우다가 한순간 배가 침몰되어 10여 만 명이 몰살하고 나라가 멸망하였던 사건을 가리킨다.
近日漸覺新年之來則沒無好趣, 以其添齒故也. 每年値十一月十二月, 則意思不快活, 不欲提起新年二字. 日子漸迫, 則正如平生情契冷淡, 不欲見之客子, 先言某日將到吾家, 雖不大憎恨, 然意中八九分淡薄. 俄然之間, 元日當著, 則如厥客來到, 雖不可逐避, 情地則無一毫滋味矣.
除日有無限戀惜意, 正如遠別情朋, 愛而難離. 當別期, 則細審其人之鬚眉精神歌音笑罵裝束步趨, 以其或此後不逢, 則樣子居然忘了故也. 又如童子將冠, 吉日旣逼, 心中以爲“冠一加則童則別矣”, 必頻頻手撫編髮, 人情之恒然也. 除日夕陽將落, 則情又不忍, 必細玩夕陽, 今年之日色只有此故也. 須臾日落, 則其悵然難堪矣. 夜必加意靜觀星斗曰: “今年之夜, 隔如薄紙耳.” 忽五更雞鳴, 則無可奈何矣.
旣逢著元日, 則如一墜烏脚溪, 遍體黎黑, 成崑崙奴, 不可洗沐耳, 不可不爲今年人. 如來日丙戌年, 天地萬物, 莫不自然騰出丙戌年光色耳. 又如旣納采之處女, 已爲他家之新婦, 雖欲更得處女之名, 無如之何, 君王之威, 不可爲也; 父母之愛, 不可謀也. 又如厓海舟溺宋民, 不欲爲元人, 然正朔旣班, 區宇旣一, 則雖沒無況趣, 其爲元人, 不可逃耳.
- 이덕무(李德懋, 1741~1793),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정조대 규장각 검서관이자 실학자로 이름을 떨쳤던 이덕무의 글이다. 이덕무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무관(懋官)이며, 형암(炯庵) ․ 아정(雅亭) · 청장관(靑莊館) · 영처(嬰處) 등 여러 호를 사용하였다.
그는 부친이 서출(庶出)인데다 집안이 가난하여 이렇다 할 교육을 받지 못했으나, 규장각 검서관으로 발탁되어 많은 서적을 정리ㆍ교감하였고, 고증학을 바탕으로 한 수많은 저서를 남겼으며, 청나라 학자들과 교류하며 중국에까지 문명을 떨쳤던 인물이다. 병약한 몸으로 2만여 권의 책을 읽고 직접 수백 권을 베껴 가며 학문에 정진했던 그는 자신을 ‘책만 보는 바보[看書痴]’라고 지칭할 정도로 책 읽기를 좋아했던 사람이다.
이덕무는 섣달그믐이면 곧잘 자신의 감회를 기록하곤 하였는데, 윗글은 1765년 섣달 그믐날에 쓴 것이다. 이덕무는 당시, 밤이 지나면 26세가 되는 한창의 젊은이였다. 그런 그가 한 해를 보내는 감회를 이렇게 묘사하였으니, 그 섬세한 감성과 표현력이 감탄스럽기까지 하다. 정든 친구와 마지막이 될지 모를 작별을 할 때의 슬픔, 관례를 앞두고 다시 오지 않을 동자 시절을 아쉬워하거나 혼인이 정해진 뒤 처녀 때로 돌아갈 수 없음을 서글퍼하는 마음, 심지어 원 나라에 쫓겨 바다로 들어간 남송(南宋)의 군대가 참패하여 나라는 망하고 유민들은 적국의 백성이 되고 마는 순간을 들어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심경’을 비유하였다.
이렇게 해가 바뀌는 즈음에 느끼는 감회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남녀노소, 과거와 현재가 다르지 않을 듯하다. 자연의 질서대로 시간이 흘러 해가 또 바뀌는데 지난 1년을 돌아보면 만족스러운 일은 적고 후회되는 일은 많다. 예로부터 성현들이 자신을 성찰하며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라고 가르쳤던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조선후기의 문인 이용휴(李用休, 1708~1782)는 「당일헌기(當日軒記)」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어제는 이미 지나갔고 내일은 아직 오지 않았으니, 무엇인가를 하려면 당일(當日)이 있을 뿐이다. 지나간 날은 다시 돌이킬 방법이 없고, 아직 오지 않은 날은 비록 3만 6천 날이 이어서 오더라도 그날은 그날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있어서 그 이튿날 일에까지 미칠 여력이 없다. (중략)
하루가 모여 열흘이 되고, 달이 되고, 계절이 되고, 해가 된다. 사람도 날로 수양을 해 나가면 선한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성인의 경지에 도달할 수도 있다. 지금 그대가 힘쓰려는 공부는 오직 당일에 달린 것이다. 그러니 내일은 말하지 말라. 아! 힘쓰지 않는 날은 아직 생겨나지 않은 날과 같으니, 이는 바로 공일(空日)이다. 그대는 모쪼록 눈앞에 환히 빛나는 하루를 공일로 만들지 말고 당일로 만들라.
昨日已過, 明日未來, 欲有所爲, 只在當日. 已過者, 無術復之, 未來者, 雖三萬六千日相續而來, 其日各有其日當爲者, 實無餘力可及翌日也. (中略) 夫日積爲旬而月而時而歲成, 人亦日修之, 從可欲至大而化矣. 今申君欲修者, 其工夫惟在當日, 來日則不言. 噫! 不修之日, 乃與未生同, 卽空日也. 君須以眼前之昭昭者, 不爲空日而爲當日也.
‘나이 들수록 시간이 빠르게 느껴진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이 말은 나이를 먹어갈수록 세월을 더 많이 의식한다는 뜻도 될 것이다. 싫어도 세월은 흘러가게 마련이고 이덕무가 말한 ‘반갑지 않은 손님’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따뜻하고 활기찬 봄도 그리 멀지 않았다. 어쩌면 지난 시간에 연연하고 있을 만큼 여유롭지 않은 것이 우리네 삶인지도 모르겠다. 이번 설에는 이런저런 감상 대신 연초에 세웠던 계획을 점검하는 시간을 가져 봐야겠다. 2014년이 이제 한 달 지났다. 올해 내게 주어질 당일(當日)이 아직 330여 일이나 남았다. 공일(空日)로만 만들지 않는다면!
글쓴이 : 조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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