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산행기록

난사(蘭史) 김사문(金思汶)의 「용호구곡 경승안내」를 좇아서

도솔산인 2023. 6. 28. 20:37

 

난사(蘭史) 김사문(金思汶)의 「용호구곡 경승안내」를 좇아서

 

 

▣ 일 시 : 2023년 06월 17일(토)~18일(일)

▣ 코 스 : 1곡 송력동-2곡 옥룡추-3곡 학서암-4곡 서암-5곡 유선대-6곡 지주대-7곡 비폭동-8곡 경천벽-9곡 교룡담-불이대-용호서원-불신당

▣ 인 원 : 5명(답사팀)

▣ 날 씨 : 맑음

 

 

  구곡(九曲)은 산림을 굽이굽이 흐르는 물줄기 가운데 경치가 아름답거나 깊은 뜻이 담긴 아홉 굽이를 의미한다. 주자(朱子)를 존숭한 조선의 유학자들은 주자가 은거해 학문을 닦은 무이구곡(武夷九曲)을 학문적 이상향으로 동경해 왔다. 이러한 조선의 유학자들은 자신이 은거한 산림에도 구곡(九曲)을 경영하기 시작했고, 이후로 구곡 문화는 이 땅에서 더욱 화려하게 꽃을 피웠다. 구곡은 조선의 퇴계와 율곡을 비롯한 여러 성리학자들에게 이어져 널리 향유되었다. 전국에는 150여 개의 구곡이 있다.

 

  지난 2월 황령암지를 시작으로 산서 조경남의 난중잡록을 좇아 정령치를 넘어 파근사지에 닿았다. 파근사지는 김지백이 화개동천 청학동을 유람할 때, 1655년 10월 8일 원천원(元川院)를 출발하여 용추(龍湫)를 거쳐 파근사에서 하룻밤 묵어간 곳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용추(龍湫)는 용호구곡의 옛 이름이다. 이전에는 원천동(元川洞). 용호동(龍湖洞), 용추동(龍湫洞)이라고 하였다. 1752년(영조 28)에 발간된 『용성지』의 「산천조(山川條)」에 용추동(龍湫洞)으로 소개하고 있다. 1879년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의 「두류산기」에도 용호동(龍湖洞)으로 기록하고 있다. 답사팀은 김지백 길을 답사하면서 용호구곡을 찾게 되었고, 용추에서 송림사를 거쳐 파근사로 이어지는 옛길을 확인하였다.

 

  그 과정에서 노국환(盧國煥, 1944년생) 선생이 소장한 김사문(金思汶)의 「용호구곡 경승안내」 필사본을 만났다. 「용호구곡 경승안내」와 불신당의 ‘용호품제(龍湖品題)’ 석각 명문을 통해 용호구곡의 설정 시점과 석각 시기를 추정할 수 있었다. 유람록 답사는 문헌의 기록을 완전히 이해해야 하고 두 발로 답사해야 하는 고단한 작업이다. 지명에 대한 해석은 각기 다른 의견을 낼 수 있다. 그러나 고증되지 않은 지명을 자의적인 해석으로 잘못된 지명의 정보가 타인에게 전달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지명은 땅의 얼굴이고 언어의 화석이기 때문이다. 늦었지만 지리 동북부 점필재길 일부 구간 개방을 앞두고, 독녀암과 미타봉·상내봉(향로봉) 등의 지명이 바로잡히길 바라는 마음이다.

 

 

■ 용호구곡(龍湖九曲)

 

  남원시 주천면에 위치한 용호구곡(龍湖九曲)은 남원 팔경 중 제1경이다. 특히 구룡폭포(九龍瀑布)는 만복대(1,438m)에서 발원해 남원시 주천면으로 흘러드는 원천천 중간에 형성된 구룡계곡 최상류에 위치한 폭포로, 원천천 상류에 있어 원천폭포라고도 불리운다. 용호구곡(龍湖九曲)의 협곡은 감입곡류 하천으로 변성암과 화강암 풍화층이 급류에 깎이면서 곳곳에 소(沼)와 단애(斷崖) 그리고 반석(盤石)이 특징적인 지형 경관을 이루었다. 구룡계곡에는 음력 4월 초파일이면 하늘에서 아홉 용이 내려와 폭포를 하나씩 끼고 놀다 갔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 계곡은 남원시 주천면 호경리에서부터 구룡폭포가 있는 주천면 덕치리까지 약 3.5km에 이르는 심산유곡이다. 웅장하고 수려한 산세와 깎아지른 듯한 기암절벽, 폭포와 소 등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구룡계곡을 용호구곡(龍湖九曲)이라고 부른다. 용호구곡은 용호정사(龍湖精舍)와 용호서원의 경영주체인 원동향약계와 영송(嶺松) 김재홍(金在洪) 선생이 일제 강점기에 설정한 것으로 추정한다. 그 근거로 불신당(佛神堂)의 용호품제(龍湖品題) 석각 명문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사년 봄은 송한(松寒)이 여러 동지(同志)들과 더불어 호상(湖上, 용호구곡)을 유람하고 차례대로 구곡의 지명을 선정하여 평석(넓은 바위)에 새겼다. 나이 8세된 손자 두수가 모시고 왔다. 3월 보름(15일) 기사년은 1929년이다.

 

  용호구곡의 제1곡은 송력동(松瀝洞), 제2곡은 옥룡추(玉龍湫) 일명 용소(龍沼), 또는 불영추(佛影湫), 제3곡은 학서암(鶴捿岩), 제4곡은 서암(瑞岩), 제5곡은 유선대(游仙坮), 제6곡은 지주대(砥柱坮), 제7곡은 비폭동(飛瀑洞)→바위 글씨에는 비포동(飛㳍洞), 제8곡은 경천벽(擎天壁) 일명 석문추(石門湫), 제9곡은 교룡담(交龍潭)으로 구룡폭포(九龍瀑布)이다. 제3곡 학서암(鶴捿岩)을 제외하고 구곡(九曲)을 알리는 석각이 유존한다.

 

 

■ 제1곡(曲) 송력동(松瀝洞)

 

제1곡(曲) 송력동(松瀝洞)
여궁석(女宮石)
송림 축대(松林築坮)

 

  송력동(松瀝洞)이 제1곡(曲)이다. 주변에 송림이 울창하다. 석녀골(송력골) 남쪽 1리에 송림사(松林寺)가 있었다고 전한다. 난사(蘭史) 김사문(金思汶, 1889∼1978)의 「용호구곡경승안내(龍湖九曲景勝案內, 1940)」에 '송림사 폐사지에 무너진 탑(敗塔)이 남아있다.'라고 하였다. 송력동(松瀝洞)의 이름은 송림약천(松林藥泉, 송림약수)에서 유래하였다. 송림약천(松林藥泉)은 여궁석(女宮石)을 가리키는 듯하다. 옥녀봉 아래 여궁석(女宮石)의 강한 음기(陰氣)를 막기 위해 비보 풍수 시설인 돌로 쌓은 축대(築坮)가 있다.

 

  「용호구곡경승안내」에 "송림 축대(松林築坮)를 넘어서 수 보를 나아가면 한 길 높이의 바위 이마에서 청류가 구슬처럼 드리우니 이곳이 소위 송림약천(松林藥泉)이. 봄과 여름이 바뀔 때 머리를 감고 몸을 씻는 사람들(화장한 여자와 시원한 건을 쓴 남자)이 길을 다투어 운집하니 송력동(松瀝洞)의 이름이 이로부터 유래했다." '송림약천(松林藥泉)에서 목욕을 하면 아들을 낳고 병이 낫는다.'라는 속설(俗說)이 있다. 김재홍(金在洪, 1867~1939)은 여궁석(女宮石)을 송력동(松瀝洞)으로, 김사문(金思汶, 1889∼1978)은 송림약천(松林藥泉)으로 에둘러 표현하였다. 봄에 내촌마을 사람들이 이곳에서 화전(花煎)놀이를 했다고 한다. 이곳에서 기(氣)를 받기 위해서 밀가루 음식만 먹었다고 하니, 내촌마을 사람들의 치유 공간이었던 셈이다.

 

 

■ 제2곡(曲) 옥룡추(玉龍湫)

 

제2곡(曲) 옥룡추(玉龍湫)
옥룡추 (玉龍湫)  석각이 있는 지점
옥룡추 (玉龍湫
용호육우(龍湖六愚)

龍湖六愚

小松 鄭宗黙, 黙齋 盧鏞鉉, 小山 金庸鉉, 又松 柳永郁, 素晦 朴善和, 秋園 朴昌圭

甲子 端陽

 

용호구로회(龍湖九老會) 외

 

龍號九老會

盧悳鉉, 李在喜, 盧洙鉉, 許欇, 盧東源, 梁翰英, 盧允源, 盧炯源, 林成澤

甲子三月 日

 

용호구로회 하단

朴濟鉉 甲辰夏, 南久淳, 盧致壽, 鄭亨晩, 鄭大圭, 盧學烈, 盧光三, 鄭熙泰

 

용호구로회 우측 상단

柳奎運, 梁漢謨, 南周獻

 

용호구로회 우측 하단

崔成九, 柳慶龍, 柳學祖

 

注 남주헌(南周獻, 1769~1821) :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문보(文甫), 호는 의재(宜齋), 1798년(정조 22) 사마시에 합격, 세마·호조좌랑·감찰을 거쳐 함양·무주·남원·임천 등의 수령을 역임하며 주로 외직을 맡아 치적을 남겼다. 특히 1808년(순조 8) 함양군수 재직시 암행어사에 의하여 치적이 보고되어 승서(陞敍)되고 이듬해 남원부사가 되어서는 진휼에 힘쓴 공으로 표창을 받았다. 1814년 정시 문과의 병과에 급제한 뒤 사간원·사헌부·홍문관·규장각·세자시강원 등을 거치며 검토관·선교관 등으로도 활약하였고, 1819년 통정대부에 가자(加資)되었다. 그 뒤 형조참의에 임명되고 승지를 거쳐 춘천부사를 끝으로 사직하였다. 문장과 시부(詩賦)에 능하였으며 저서로는 『의재집(宜齋集)』이 있다. 남구순(南久淳, 1794~?) :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경장(景長) 양부 남종헌(南宗獻), 생부 남주헌(南周獻)으로 음보로 판관을 지냄.

 

삼남매동운(三男妹同韵)

三男妹同韵

許炫, 黃海周, 李容默

 

輸情登是臺 : 속을 털어놓고 이대에 올라

喜酌二三盃 : 기쁘게 두세 잔을 마신다.

眞像誰能盡 : 참 모습을 누가 다할 수 있을까

□名刻石來 : 이름을 돌에 새기고 오노라

 

壬寅春日

 

 

  김재홍(金在洪)의 용호구곡10영과 김사문(金思汶)의 「용호구곡 경승안내」에는 제2곡을 옥녀봉(玉女峰)으로 기록하고 있다. 석각은 제2곡이 옥룡추(玉龍湫)이다. 옥녀봉 용호정 아래 흰 바위로 둘러싸인 못을 일명 '용소(龍沼)'라고 하며, 옥룡추(玉龍湫), 또는 불영추(佛影湫)라고 한다. 불신당(佛神堂)에 '용호석문(龍湖石門)'과 '방장제일동천(方丈第一洞天)' 각자 사이에는 석불이 있었는데, 이 석불의 그림자가 소에 비친다고 해서 불영추(佛影湫)라고도 한다. 옥룡추(玉龍湫)는 '용이 사는 옥처럼 푸르고 깊은 소(沼)'를 의미한다. 용호구곡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다. 육모정에서 내려서면 풀숲에 ’불이대(不二坮)‘와 '용호정사동구(湖精舍洞口)'석각이 있고, 풍호대(風乎臺)의 용호육우(龍湖六愚) 등 무수한 인명 석각이 있다. 풍호대(風乎臺)에 함양군수를 역임한 남주헌(南周獻, 1769~1821)과 그의 아들 남구순(南久淳, 1794∼1853)의 인명 석각이 있다. 남주헌은 함양군수를 하다가 1809년 남원 부사로 부임하였다.

 

고암대(皷岩坮)

 

  불이대(不二坮) 석각이 있는 곳이 옛날 용호정 정자 터이다. 정자 아래로 봇도랑 물이 흘렀다고 한다. 현재 용호정은 옥녀봉과 옥룡추 사이에 있다. 넓은 반석과 인명 석각이 있는 일원을 고암대(皷岩坮)와 풍호대(風乎坮), 명암(鳴岩) 또는 북바위라고 부른다. 가뭄이 들어 계곡물이 마를 때에 바위가 울음소리를 낸다고 한다. 지금도 가뭄이 들면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낸다. 폭포 바로 위에 이암(鯉岩)이 있는데 잉어(鯉)가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모양이다. 김사문은 「용호구곡 경승안내」에서 “열 길 높이의 곧추선 파도가 동이를 뒤집은 듯 우레처럼 떨어지니, 사람의 말소리를 지척 간에도 알아듣기 힘들다. 명창 권삼득(權三得)이 노래를 익힌 곳이다. 고암대(皷岩坮) 동서쪽에 반반하게 트여 있는 바위는 넓이가 천 명이 앉을 만하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 제3곡(曲) 학서암(鶴捿岩)

 

학(鶴)이 물고기를 잡아먹는다는 소(沼)
황학산(黃鶴山) 북쪽 암석층

  학서암(鶴捿岩)이 제3곡(曲)이다. 육모정에서 300m 지점에 있는 황학산(黃鶴山) 북쪽에 암석층이 있는데 이 암벽 서쪽에 조대(釣臺)가 있다. 이 조대암 밑에 조그마한 소가 바로 3곡(曲)이다. 학이 날아들어 쉬는 풍경이 아름다워 학서암(鶴捿岩)으로 불렸다는 설과 학들이 물고기를 잡아먹는 바위가 있다고 해서 '학서암(鶴捿岩)'이라고 불렸다는 설이 있다. 학서암 각자는 수해로 유실되어 전해지지 않는다. 학서암에는 남자 성기를 닮은 누워있는 남근석이 있다. 남쪽 송력동의 여궁석과 대조를 이루어 서로 사랑했다는 전설이 전한다. 남근석은 확인하지 못했다.

 

 

■ 제4곡(曲) 서암(瑞岩)

 

제4곡(曲) 서암(瑞岩)
구시소
챙이소
칠성암 터

  제4곡은 서암(瑞岩)이다. 구시소 위쪽 약 50m 지점의 계곡 건너편 바위의 형상이 마치 스님이 무릎을 꿇어앉아 독경하는 형상을 하고 있어 서암(瑞岩)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독경 형상의 바위는 내 눈에 보이지 않았다. 주변에 챙이소와 함께 반석의 아름다움이 뛰어난 풍경을 자랑한다. 조금 진행하면 칠성신암 터가 있다. 「용호구곡경승안내」에 "七星庵으로 名庵함은 七人有志의 共築한바이러라."라는 문구를 볼 때, 건축 당시에는 일곱 명의 선비들이 학문을 논하는 별서나 시사(詩社)의 공간으로 활용한 듯하다.

  서암(瑞岩)은 당(唐)나라 때 승려의 이름이다. 서암(瑞岩)은 매일 스스로 자문자답(自問自答)하기를, “주인옹아! 깨어 있느냐?” “깨어 있노라.” 하였다고 한다. 《心經 卷1》 이 성성법(惺惺法)은 마음을 어둡지 않게 항상 일깨우는 방법을 말한다. 스님이 독경하는 바위의 형상에 서암(瑞巖)이라는 스님의 이름을 붙인 듯하다. 구시소는 계곡 내 소가 '구시'(구유의 경상도 방언)를 닮아 ’구시소‘라고 하고, 곡식의 쭉정이, 티끌 등의 불순물을 걸러내는 데 쓰인 도구인 '챙이'(키의 전라도 방언)를 닮아 ’챙이소‘라고 하였다. 칠성암 뒤 암벽 사이에는 우두산(牛頭山)이 있는데 소가 하품을 하면서 혀를 보이고 있는 듯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제5곡(曲) 유선대(游仙坮)

 

제5곡(曲) 유선대(游仙坮)
선인(仙人)들이 바둑을 두며 즐겼다는 유선대(游仙坮) 바위
선약을 찧는 돌절구(搗藥石臼)
흐릿하게 음각된 윷판

 

  제5곡은 유선대(游仙坮)이다. 계곡 가운데에 높이는 세 길 남짓하고 넓이는 백 개의 바둑판을 수용할 만한 우뚝 솟은 바위가 있었다고 한다. 이곳 반반한 바위에 금이 많이 그어져 있어 선인(仙人)들이 바둑을 두며 즐겼다는 전설에서 유선대(游仙坮)라고 하였다 주변의 절벽은 선인(仙人)들이 인간들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 병풍을 쳐놓은 것 같다고 하여 은선병(隱仙屛)이라고 한다. 바둑판 바위는 1960년 태풍 카르멘(CARMEN)의 수해 때 뒤집어졌다고 한다.(호경리 노국환님, 1944년생) 유선대의 남쪽 등산로에 선약을 찧는 돌절구(搗藥石臼)와 윷판이 있다.

 

  유선대 북쪽 병암(屛岩)에 개미처럼 붙어 정상에 도달하면 산서(山西) 조경남(趙慶男, 1570~1641)이 은거했던 석구지(石臼址)가 있다고 한다. 조경남(趙慶男)은 정유재란 때 활약한 의병장이다. 이곳에 은거할 당시 대양치(大陽峙)를 넘어 구천(臼泉)에서 맑고 시원한 물을 취하였다고 한다. 새로운 옛 지명이 나올 때마다 긴장되고 궁금함이 더해진다. 대양치(大陽峙)와 구천(臼泉)은 어디일까. 조경남의 난중잡록을 좇아 달궁의 향로봉과 황류동에서 정령치를 넘어 상룡추(上龍湫)에 이르러 산서(山西)의 유허지인 석구지(石臼址)가 지척에 있다는 느낌에 감회가 새롭다.

 

 

■ 제6곡(曲) 지주대(砥柱坮)

 

제6곡(曲) 지주대(砥柱坮)

 

  제6곡(曲) 지주대(砥柱坮)이다. 남원시에서 약 8km 지점에 위치한 육모정에서 시작하여 구룡폭포까지 약 4km를 굽이쳐 흐르는 구룡계곡의 9곡 중 6곡이 지주대(砥柱坮)이다. 지주대는 만복대에서 발원한 원천천의 탁한 물과 파근사골에서 내려오는 맑은 청류가 합류하는 지점이다. 6곡 둘레의 기암절벽이 마치 하늘을 떠받치듯 구름다리 앞에 자그마한 봉우리가 솟아있어 지주대(砥柱坮)라고 한다.

 

  지주산(砥柱山)은 '황하 가운데 있는 산으로 격류 속에 있으면서도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다.'라는 뜻에서 온 이름이다. 지주(砥柱)는 지주(厎柱)라고도 쓰는데 산의 이름이다. 황하(황河)의 중류(中流)에 있으며, 사람이 홀로 서서 흔들리지 않는 것을 중류지주(中流砥柱)라 이른다. 지주대(砥柱坮)는 절개를 의미하는데 숨은 뜻이 있는 듯하다. 용호서원에 배향한 우국지사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1836~1905)의 순절을 염두에 두고 지은 이름은 아닐까. 송병선은 을사조약이 맺어지자 고종황제에게 상소를 올리고 자진(自盡)한 인물로 용호서원 원장 영송(嶺松) 김재홍(金在洪)의 스승이다. 안내판의 제6곡(谷)의 한자 곡(谷)은 오자로 보인다.

 

 

■ 제7곡(曲) 비폭동(飛瀑洞)

 

제7곡(曲) 비폭동(飛瀑洞)
반월봉에서 흘러내리는 폭포

 

  제7곡은 비폭동(飛瀑洞)이다. 앞에 보이는 봉우리가 반월봉(半月峰)이다. 반월봉에서 흘러내린 계곡물이 이곳 폭포에 떨어지며 아름다운 물보라가 생기는데 그 모양이 마치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처럼 보인다고 하여 비폭동(飛瀑洞)으로 불리고 있다. 김사문의 「용호구곡 경승안내」와 「용호구곡십영」에는 비폭동(飛瀑洞)이라고 하였으나 석각은 비포동(飛㳍洞)으로 새겼다. 㳍로 새긴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瀑자가 각을 하기에 획이 복잡해서 그런 것은 아닐는지. 재미있는 것은 폭(瀑)을 포(㳍)로 쓰고 폭으로 읽었다는 점이다. 제9곡의 구룡폭포도 구룡포(九龍㳍)로 새겼다.

 

  김사문은 「용호구곡경승안내」에 “골짜기 형태가 깊어 하늘을 우러러보매 단지 한 닢 동전 같은 푸른 하늘이 보이고 상쾌한 기운이 사람에게 엄습해오는 중간이 두 갈래로 나뉘는 은빛 물결이 수직으로 천척(千尺)을 떨어져 흩날리며 부서지니 '은하수가 구만리 장천에서 떨어지는 것인가.'라는 시구로 이백(李白)이 묘사해낼 수 있었던 것이라고 인정하리라.”라고 이백(李白)의 망여산폭포(望廬山瀑布)에서 싯구를 인용하였다. 비가 온 뒤에 이곳에 오면 비폭동을 실감할 듯하다.

 

 

■ 제8곡(曲) 경천벽(擎天壁)

 

제8곡(曲) 경천벽(擎天壁)
석문추(石門秋)

 

  제8곡은 경천벽(擎天壁)이다. 비폭동(飛瀑洞)에서 600m쯤 올라가면 거대한 암석층이 계곡을 가로질러 물 가운데 우뚝 서 있고, 바위 가운데가 대문처럼 뚫려 물이 그곳을 통과한다고 해서 석문추(石門秋)라 하는데, 바로 이곳이 제8곡이다. ’하늘을 떠받드는 절벽‘이라는 의미로 경천벽(擎天壁) 석각이 있다. 괴산 화양구곡에도 경천벽(擎天壁)이 있다. 「용호구곡 경승안내」에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비폭동(飛瀑洞)으로부터 문득 계곡을 따라 거슬러 올라 동쪽으로 나아가던 발걸음을 바꾸어 남쪽으로 꺾어 계곡을 쫓아가면 실낱같은 오솔길이 이끌던 매로(媒路)의 희미한 선이 여기에서 멈춰 길이 다했다고 하였다. <중략>이로부터 곧장 제구곡(第九曲)에 이르고자 하면 거꾸로 선 석벽에 발을 걸고 어지러운 물결에 머리를 감지 아니하고는 붙잡고 오를 방법이 없으니, 만일 용감히 나아가고 돌아보지 않아 목숨 건 자가 아니거든 지팡이를 돌리는 편이 십분 옳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비폭동에서 경천벽을 거쳐 제9곡으로 오르는 길은 계곡으로 오르는 것과 옛날 허리길이 있다. 김사문은 경천벽에서 석문추를 지나 계곡을 통해 구룡폭포로 오른 듯하다. 답사팀은 경천벽 석각을 확인하고 올라왔고, 일행 중 칠성님만이 계곡 아래로 내려가 석문추를 확인하였다. 안내판이 있는 목교 아래로 내려가야 먼발치에서 각자를 확인할 수 있다. 용호구곡 석각 중에 경천벽 석각이 접근이 가장 어렵다. 현재 능선으로 올라가는 길은 계단과 안전시설이 설치되어 있다. 옛 허리길의 흔적도 남아있다.

 

 

■ 제9곡(曲) 교룡담(交龍潭)

 

제9곡(曲) 교룡담(交龍潭)
위에서 교룡담을 감상할 수 있는 구룡대(九龍臺)
아래 하단폭포
구룡폭포 전망대에 있는 방장제일동천(方丈第一洞天)

 

方丈第一洞天

李鍾默, 李鍾學

 

교룡담(交龍潭)
오른쪽이 교룡담(交龍潭) 왼쪽 소가 용화굴(龍化窟)
구룡폭(九龍㳍)

  제9곡은 교룡담(交龍潭)이다. 만복대에서 발원한 원천천(元川川)이 여기에 이르러 가운데 불쑥 튀어나온 바위가 있어 두 갈래 폭포를 이루는데, 그 모습이 마치 두 마리의 용이 어울렸다가 양쪽 못 하나씩을 차지하고 물속에 잠겨 구름이 일면 다시 나타나 꿈틀거릴 듯하므로 그곳을 교룡담(交龍潭)이라 한다. 용호9곡의 최고점을 예로부터 방석동(方石洞)이라고 하였다. 이곳에서 아홉 마리의 용이 살다가 승천했다는 전설이 전하므로 구룡폭포라 불린다. 김사문은 “위 폭포는 백 길을 드리우고 아래 폭포는 백 길을 드날리어 맹렬한 파도가 바위를 찧으니, 바위는 절구(臼)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위아래의 돌절구가 모두 만 섬을 수용할 만큼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다. 두 절구를 중간에서 받들어 한 줄기의 석룡(石龍)이 구부려 누워 머리를 든 채 물결 소리를 들으니, 이것이 곧 유명한 '용화굴(龍化窟)'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위에서 내려보았을 때 폭포 좌측에 있는 소(沼)가 용화굴(龍化窟)인 듯하다.

 

구룡사에는 용왕신을 모신 용왕전(龍王殿) 우물

 

  칠성님은 구룡폭포를 직등하여 구룡대로 올라갔고, 일행들은 목 계단으로 용호정사로 올라가 다시 천룡암에서 내려가 제9곡 교룡담(交龍潭) 석각을 확인하였다. 아침에 천룡암 주지에게 답사 협조를 요청하여 다행히 제지를 받지 않았다. 이번 답사에서 구룡사에 잠시 들렀는데 무속의 성지답게 탑과 제단을 깨끗하게 꾸며 놓았다. 구룡사에는 용왕신을 모신 용왕전(龍王殿)이 있는데, 전각 안에 우물이 있다. 사찰에도 하늘의 신은 칠성각(七星閣), 산신은 산신각(山神閣), 물의 신인 용왕신(龍王神)을 모신 용왕전(龍王殿)이 있다고 한다. 구룡정사에서 칠성님 차로 육모정으로 내려와 하루 일정을 마감하였다.

 

 

■ 용호서원(龍湖書院)

 

용호서원(龍湖書院)
목간당(木澗堂)
수성재(遂成齋)
한말 우국지사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1836~1905)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nbsp; 경양사(景陽祠)
불이대(不二坮)

 

  다음 날 아침 노국환 선생의 안내로 불이대(不二坮)와 고암대를 찾았다. 이동하면서 GMC 모양의 자동차 바위와 송장 바위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송장 바위는 실제로 관광객들이 버스에서 춤을 추다가 브레이크가 풀려 버스가 계곡에 추락하여 6명이나 죽었다고 한다. 이름이 현실이 된 셈이다. 불이대 석각이 있는 곳은 풀숲에 가려져 있어 찾기가 어렵다. 이곳은 옛날에 용호정이 있었다고 한다. 불이대(不二坮)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줄임말로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는 의미로 이해가 된다. 용호서원에서 목간당(木澗堂)과 수성재(遂成齋)를 둘러보았다. 「용호구곡 경승안내」에 “강당(講堂)에서 '목간(木澗)'이라고 편액한 곳은 영송(嶺松) 처사의 집편실(執鞭室)로 ’나무 열매를 먹고 시냇물을 마신다.‘라는 뜻이다. '수성(須成)'으로 편액한 곳은 문생의 독서실이니, ’벗을 기다려 덕을 성취한다.‘라는 뜻이다. 편액 글자는 모두 주자(朱子)의 유묵(遺墨)이다. 집자(集字)해서 사용한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본래 이곳에는 주희(朱熹)와 여대림(呂大臨) 두 선생 영정을 모신 영당이 있었다고 한다. 1868년 서원철폐령에 따라 용호 영당(?)이 철폐되면서 매각되어 주인이 여러 번 바뀌었다. 일제 강점기인 1924년경 영송(嶺松) 김재홍(金在洪, 1867~1939)이 용호정사를 지어 강학의 공간으로 사용하였다. 1927년 원동향약계(源洞鄕約契)와 여기에 소속된 유림의 선비 영송(嶺松) 김재홍(金在洪, 1867~1939) 등이 주축이 되어 건립된 서원이다. 설립 당시에는 송나라의 유학자인 주자(朱子)의 영정을 봉안하고 주자를 배향하였고, 이후 한말 우국지사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1836~1905)을 비롯하여 남원 지역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덕행을 펼쳤던 영송(嶺松) 김재홍(金在洪), 아들 입헌(立軒) 김종가(金種嘉, 1889~1975)를 배향하였다.

 

 

■ 불신당(佛神堂)과 용호품제(龍湖品題) 석각 명문

 

  용호구곡을 조사하면서 가장 궁금했던 것이 용호구곡의 설정 시점과 석각 시기이다. 불신당에 ’용호품제(龍湖品題)‘ 석각이 있는데, 「용호구곡 경승안내」와 더불어 이를 밝히는 가장 중요한 단서이다. 「용호구곡 경승안내」에 따르면 ‘자연이 만든 감실(龕室)에 한 구의 석상을 안치하였다. 먼 옛날 송림사의 유물인데, 지난 갑술(1934)년 여름 운악암(雲岳菴) 중이 몰래 훔쳐 가서 호경리 사람들이 꾸짖고 돌려받았다. 도승(盜僧)이 조심하지 않아 부처의 머리와 얼굴(頭面)이 온전하게 돌아오지 못하였다.’라고 한다.

 

나무아미타불(面南無阿彌陁佛) 노수현(盧洙鉉)의 성묵(誠墨)
용호석문(龍湖石門) 이삼만(李三晩, 1770~1847)의 고필(古筆)

 

  불신당의 감실 벽면에 ‘나무아미타불(面南無阿彌陁佛)’ 석각은 노수현(盧洙鉉)의 성묵(誠墨)이고, ‘용호석문(龍湖石門)’의 사대자(四大字)는 이삼만(李三晩, 1770~1847)의 고필(古筆)이다. 석문(石門)의 서쪽에 ’방장제일동천(方丈第一洞天)‘은 김두수(金斗秀)가 여덟 살에 쓴 글씨이다. ‘자일곡지구곡정사소관(自一曲至九曲精舍㪽管)’[自一曲至九曲精舍㪽管 : 일곡부터 구곡까지 용호정사 소관이다.] 석각 좌측에 ‘용호품제(龍湖品題)’ 석각 명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龍湖品題

 

 龍湖品題

己巳春 松寒(?) 與諸同志 游湖上 選次九曲地名 刻平石 年八斗孫 待行 三月望日

 

  용호구곡에 대해 하나하나 이름을 붙였다.

 

  기사년 봄 松寒(논어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에서 따온 것으로 호인 듯함)이 여러 동지들과 용호구곡을 유람하고 구곡의 지명을 선별해 차례대로 정하고서 평평한 돌에 새겼다. 나이 여덟 살 된 손자 斗秀가 나를 모시고 왔다. 삼월 보름.

 

  1655년 담허재(澹虛齋) 김지백(金之白, 1623~1671) 길 답사에서 만난 김사문의 「용호구곡 경승안내」를 통해 많은 인명 석각과 새로운 지명을 만났으나, 밝힌 것보다 밝히지 못한 것이 더 많다. 수백 년 전 선인들의 유람록 길을 복원하는 일은 어느 한 사람이 짧은 시간에 완성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다. 오랜 시간 한 사람 한 사람의 기록이 켜켜이 쌓이고 많은 자료가 축적되어야 이룰 수 있다. 세상에 자기만 못한 사람이 없으니, 입을 닫고 귀를 열어라. 그러면 비로소 눈이 보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