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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식의 삼국사기에 나오는 마천성과 군자사

도솔산인 2022. 9. 1. 12:34

부식의 삼국사기에 나오는 마천성과 군자사

 

 

  마천면에 ‘馬’ 자가 들어가는 지명이 많다. 마천성(馬川城), 마천소(馬淺所, 馬川所), 마천(馬川), 금마대(金馬臺, 금대), 외마(外馬), 내마(內馬), 도마(都馬, 桃馬), 마이봉(馬耳峰), 마암(馬巖), 말봉 등이 그렇다. 마천의 유래는 이렇다. ‘① 임천(瀶川)이 말처럼 뛰면서 빠르게 흘러내려 마천이라고 하였다. ② 금대산(금마대)이 갈마음수(渴馬飮水)의 형국이라 마천이라고 하였다.’ 실제로 마적동과 송대에서 금대산을 바라보면 말안장의 형상이다. 두 가지 설이 다 말과 관련이 있는 공통점이 있다. 

 

 

금대산(금마대)

 

  《신동국여지승람(1530)》 卷 三十一 慶尙道 形勝條에 ‘임천(瀶川) 마천소(馬淺所)에 있다. 지리산 북쪽 골물이 합쳐서 임천(瀶川)이 되었다. [瀶川 在馬淺所 智異山北面澗谷之水合爲瀶川]’에서 마천(馬淺)이라는 지명을 볼 수 있다. 또「古跡條」에 ‘마천(馬淺)은 마천(馬川)의 옛 이름이다.’라고 하였다. 마천(馬川)의 지명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김부식의 《삼국사기(1145)》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미루어 마천(馬川)에서 마천(馬淺). 다시 마천(馬川)으로 부른듯싶다.

 

 

■ 《삼국사기(김부식, 1145)》 卷 第二十七 의 「백제본기(百濟本紀) 第五」

 

  무왕 33년(632) 춘 정월 맏아들 의자를 책봉하여 태자로 삼았다. 2월 마천성을 개축하였다. 추 7월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정벌하였으나 이롭지 못하였다. 왕이 생초의 벌판에서 사냥을 하였다. 12월 사신을 보내 당에 들어가 조공을 하였다. [武王三十三年 春正月 封元子義慈爲太子 二月 改築馬川城 秋七月 發兵伐新羅 王田于生草之原 冬十二月 遣使入唐朝貢]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보자. 신라 제26대 진평왕(567~632)은 진흥왕(540~576)의 태자 동륜(銅輪)의 아들이고 진흥왕의 장손자이다. 576년 진흥왕이 서거하자 차자(次子) 진지왕이 즉위한다. 동륜(銅輪) 태자의 아들인 진평왕은 경주를 떠나 함양 마천 영정사로 피신한다. 이때 진평왕의 나이가 10살이다. 579년 진지왕이 폐위되고 화백회의를 비롯한 조정의 추대로 왕위에 오른다. 진평왕이 이곳에서 왕자를 낳아서 579년 잠저시 별궁(영정사)을 군자사(君子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다고 한다.

 

  진평왕이 군자사에 와 있던 기간은 약 3년(576년~579년)이다. 신라의 왕자가 백제와 국경을 접한 영정사(靈井寺)에 와 있었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납득(納得)이 가지 않는다. 영정사 주변이 마천성은 아니었을까. 다시 군자사 인근의 지명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마천소(馬淺所, 馬川所), 마천(馬川), 금마(金馬), 도마(都馬, 桃馬), 외마(外馬), 내마(內馬)...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나오는 마천성(馬川城)과 연관은 없을까.

 

 

진평왕 왕자 태실지 석각
古諺傳 眞平王入此山時 騰封次占此 而其后居人 皆以噤地云

 

옛날이야기에 전하기를 “신라 진평왕이 이 산에 들어올 적에 언덕에 올라 머물다가 이곳을 점유하여 그 후 주민들이 모두 이 땅에 대하여 감히 입을 열지 못하였다.”라고 한다.

 

소재지 : 함양군 마천면 가흥리 391번지

행적자 : 진평왕    연대 : 조선 후기    석각시기 : 미상

 

[개요] : 진평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군자사에 와 있을 때 태자를 낳아 태를 묻었다는 태실지에 있는 금표 석각이다. 태실지로 추정되는 곳에 지금은 진주강씨 무덤이 있는데, 무덤을 쓸 때 태실지에서 금동불상이 나왔다고 전한다. 금대산 아래 가흥리 당벌 마을 위에 있다. 예전에는 마을이 있었으나 봄에 화전놀이를 할 때 마을 사람 사이에 폭력 사고가 많이 나서 마을을 아래로 옮겼다고 한다. 직접 본 내용이 아니고 선대로부터 전해오는 이야기이다. 태실지 인근에 우물과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있다.[당흥마을 김수태(1929~ ) 어르신의 傳言]

 

 

 

▶ 참고자료 : 군자사 관련 옛 문헌의 기록

 

1. 군자사 관련 진평왕의 기록

 

가. 1530년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1권 경상도(慶尙道)

 

군자사(君子寺) 지리산에 있다. 전설에, “신라 진평왕(眞平王)이 왕위를 피해서 여기에 살다가, 태자를 낳아서 나라에 돌아가고, 집은 희사하여 절로 만들었다.” 한다.

 

나. 함양군수(1601-1604) 고상안(高尙顔, 1553-1623) 태촌 집(泰村集)

 

군자사(君子寺)는 함성(含城) 치소 남쪽에 있다. 곧 두류산 서북쪽의 기슭이다. 절 아래 우물이 있고 우물가에 미나리밭이 있다. 옛날부터 개구리가 없다. 어떤 이는 우물의 발원처에 웅황(雄黃:광물, 살충제)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였다. 옳은지 여부는 모르겠다. 대체로 사물의 이치는 깨달을 수 없는 것이 많다. 이를테면 영가(永嘉:안동) 성안에 모기가 없는 것이나 상주(尙州) 사불산(四佛山)에 칡이 없는 것과 같은 것이 그것이다. 《泰村集 제5권》 함양군수(1601-1604) 고상안(高尙顔, 1553-1623) 지음

 

※ 군자사는 신라 진평왕이 숙부 진지왕이 서기 576년 즉위함으로 인하여 도성을 떠나 이곳에 피신, 은거한 별궁이다. 579년 진지왕이 폐위된 뒤 도성에 돌아가 즉위하고 이곳에서 아들을 낳은 것을 기념하여 이곳에 군자사를 창건하였다. 그러나 진평왕은 딸만 성장하여 선덕여왕이 되었다.

 

다. 1656년 정수민(鄭秀民)이 사찬한 天嶺誌

 

지리산에 있다. 세속에 전하는 말에 '신라 진평왕이 지위를 피하여 이곳에 살다가 태자를 낳아 국도로 돌아간 뒤 집을 희사하여 절을 만들었다고 한다. 지금은 없다. [在智異山 俗傳新羅眞平王 避位居此 生太子還國 捨家爲寺 今無)

 

注 1888년 후손 정환주(鄭煥周)가 간행함.

 

라. 연대 미상의 마천 당흥 부락 마애석각 명문

 

옛날이야기에 전하기를 “신라 진평왕이 이 산에 들어올 적에 언덕에 올라 머물다가 이곳을 점유하여 그 후 주민들이 모두 이 땅에 대하여 감히 입을 열지 못하였다.”라고 한다. [古諺傳 眞平王入此山時 騰封次占此 而其后居人 皆以噤地云]

 

注 噤 : 不敢開口的樣子 噤 寒而閉口 口閉 地 語助詞

 

마. 삼송(三松) 임응택(林應澤, 1879~1951) 선생의 와유강산에 나오는 도마사.

 

도마사(都馬寺)에 관한 기록은 마천 의중마을에 살았던 삼송(三松) 임응택(林應澤, 1879~1951) 선생의 와유강산이 유일하다. '운학정을 잠깐 지나 도마사와 군자사의 옛터를 찾아드니 세월이 흘러 매우 오래된 옛 절터가 속가의 마을이 되었다. '亭子(雲鶴亭)를 暫間지나 都馬寺와 君子寺에 옛터를 찾아드니, 年久歲深 古寺터가 俗家成村 되었으니...'라는 내용이다.

 

2. 선인들의 유람록 군자사 관련 진평왕의 기록

 

가. 1610년 박여량의 두류산일록

 

군자사는 옛 이름이 영정사(靈淨寺)이다. 신라 진평왕이 즉위하기 전에 어지러운 조정을 피해 이 절에 와 거처하였다. 그때 아들을 낳게 되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고 한다. 안국사(安國寺)도 이때에 그 이름을 얻은 듯하다. 전란을 겪은 뒤에 중창한 것은 법당∙선당(禪堂)∙남쪽 누각뿐이다. [君子者 古之靈凈寺也 新羅眞平王避亂居此寺生子 因改以今名 其曰安國寺者 亦因其時而得此稱歟 戰兵火之後 所重刱者 法堂禪堂南樓而已]

 

나. 1611년 유몽인의 유두류산록

 

저물녘에 군자사(君子寺)로 들어가 잤다. 이 절은 들판에 있는 사찰이어서 흙먼지가 마루에 가득하였고 선방(禪房) 앞에 모란꽃이 한창 탐스럽게 피어 있어 구경할 만하였다. 절 앞에 옛날 영정(靈井)이 있어 영정사(靈井寺)라 불렀다. 지금은 이름을 바꿔 군자사라고 하는데, 가져온 뜻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暮投君子寺 寺野刹也 埃氛滿堂 獨牧丹對禪房方敷榮 可賞 寺前舊有靈井 號靈井寺 今改以君子 未知取何義也]

 

다. 1643년 박장원의 유두류산기

 

○ 8월 22일, 저녁때 군자사에 이르렀다. 이 절의 본래 이름은 영정사(靈井寺)였는데 진평왕이 이곳에서 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고 한다. 절의 법당과 건물들이 모두 웅장하고 화려하였다. 절의 서쪽 구석에 화려한 단청 칠을 한 새로 지은 별전이 있는데 삼영당(三影堂)이라고 했다. 삼영당 안에는 청허(淸虛), 사명(四溟), 청매(靑梅) 세 대사의 초상화가 있었다.

 

라. 1680년 송광연의 두류록

 

○ 8월 26일, 다시 20리를 가서 군자사에 이르렀다. 함양군수 윤천(尹○)이 두 명의 악공 및 안주와 술을 보내왔다. 절 앞에는 옛날 영정(靈井 : 신령스러운 우물) 영정사(靈井寺)라 불렀는데 뒤에 군자사로 개칭하였다. 무엇을 근거해서 군자사로 이름을 바꾸었는지는 모르겠다.

 

마. 1783년 이덕무 청장관전서 군자사 사적(君子寺事蹟)

 

계묘년(1783) 6월 23일에 나는 아들 광류(光霤)와 함께 두류산(頭流山) 구경을 가서 군자사(君子寺)에서 묵었다. 이 절의 사적(事蹟)을 적은 현판이 걸려 있기에 이를 줄여서 적는다.

 

천령의 남쪽 50리쯤에 지리산이 있고, 지리산의 동쪽 기슭 아래 큰 시냇가에 군자사가 있다. 진 대건(태건) 11년(579 무술(578) 신라 진평왕(579~632 재위) 이 잠저 시절 왕위를 피하여 여기에 살다가 태자를 낳고서 서울로 돌아갔다. 드디어 그 집을 희사하여 절로 만들고 이것으로 이름 지었다. 그 뒤로 여러 번 병화를 만나 흥폐를 거듭하였다. [天嶺之南五十許里 有智異山 智異之東麓下大溪邊 有君子寺 陳大建十一年戊戌 新羅眞平王潛邸 避位居此 因生太子而還國 遂捨家爲寺 以是名焉 自爾厥后 荐遭兵燹 或興或廢] 동사(東史)를 상고하건대, 진평왕(眞平王)은 후사가 없는데, 지금 '이곳에서 태자를 낳고 인하여 군자사라고 명명하였다.' 하였으니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 청장관전서 69권에 나오는 이덕무의 글은 사근역 찰방으로 있을 때에 군자사에 와서 사적기 현판의 내용을 옮긴 것이다. 현판 사적기 말미에 '강희 23년(갑자, 1684)에 방장산 승려 형곡 복환이 쓰다.'라는 기록이 있다.

 

바. 기타

 

군자사에 대한 기록은 1472년 김종직, 1571년 양경우, 1586년 양대박, 1651년 오두인, 1767년 홍씨, 1780년 이동항, 1807년 남주헌과 하익범의 유람록 등에 나오는데 진평왕에 대한 내용이 없어서 참고 자료에서 제외했다. 군자사는 1807년 남주헌과 하익범의 유람록을 끝으로 보이지 않는다. 지금은 옛 군자사 터에 군자마을이 있다. 행정구역명은 ‘함양군 마천면 군자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