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산행정보

세석평 소지와 청학연(靑鶴淵)·학연(鶴淵)에 대한 선인들의 기록

도솔산인 2022. 8. 16. 08:01

세석평 소지와 청학연(靑鶴淵)·학연(鶴淵)에 대한 선인들의 기록

 

 

  세석의 청학연못설'은 논리적으로 설득력이 부족하다. 호사가들이 청학연못에 대한 논리를 펼칠 때마다 그 근거로 겸암(謙菴) 류운룡(柳雲龍, 1539~1601)의 겸암일기를 앞세운다. 겸암일기에 나오는 돌샘(石泉)과 이 연못을 연결시킨다. 촛대봉에 있는 고려낙운거사이청련서(高麗樂雲居士李靑蓮書) 석각도 등장한다. 미수 이인로와 고려낙운거사 이청련을 동일 인물이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세석평전의 인공 연못(細石坪小池)은 어느 날 청학연못으로 둔갑(遁甲)하였다. 이름이야 어찌되었든, 세석 고원의 신비한 이 인공연못은 이제 세석의 명소로 확실하게 자리를 잡았다.

 

注 세석평 소지(細石坪小池) : 1879년 송병선 두류산기(頭流山記)에 처음 보임.

 

 

세석연못
세석연못(200101)

 

 

▶ 細石坪小池에 대한 선인들 유산기의 기록

 

  15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자. 류겸암일기(柳謙菴日記)의 어느 곳에도 청학연못에 관한 내용은 없다. 청학연(靑鶴淵) 대한 기록은 1487년 추강 남효온의 지리산일과(智異山日課) 유일하게 보인다. 청학연(靑鶴淵)은 불일폭포 아래에 있다. 청학봉(향로봉)청학폭포(불일폭포)청학연은 한 세트이다. 류운룡은 겸암일기에서 청학동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화개천, 석문, 등촌재, 천석(千石)지기의 논을 만들 수 있고 되()의 씨를 뿌리면 석()을 수확할 수 있는 비옥한 땅임좌병향의 백운산 세 봉우리가 바로 안산, 땅은 높으나 서리가 늦게 내림'을 다시 새겨볼 필요가 있다. '돌우물(石井) 하나가 있는데 돌 위에 큰 글씨로 고려 낙운거사 이청련(高麗樂雲居士李靑蓮)“ 이라 쓰여 있네.'라는 문구와 청학연못을 억지로 연결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류겸암일기 내용은 세석 평전과는 무관하다.

 

 

겸암 유운룡의 동선 추정(1917년 조선의 지형도)
류운용의 겸암기[서울대학교 규장각(奎章閣)에 소장된 『정감비록(鄭勘秘錄)』의 「청학동기(靑鶴洞記)」와 「조선비결전집」]

 

注 橙村齋를 燈村齋, 靑鶴洞을 靑嶌洞으로 씀.

 

 

1. 1570년대 류운룡의 '겸암기(謙菴記)'

 

나는 본래 산과 물을 좋아하는 버릇이 있어 동서남북(東西南北)의 자연을 두루 유람하다가 진주(晋州서두리(西杜里, 두방재)에 이르러 몇 번 청학동을 보려 했으나 아직 가지 못했다어느 날 늙은 중이 찾아와 만나보니 자못 사물을 식별하고 관찰하는 능력이 있고, 아름다운 산과 고운 물에 대해 말하다 청학동에 미쳤다. 내가 말하기를 그대는 비기(秘記)를 얻었는가?”스님이 대답하기를 자세히 압니다.”

 

余 素有山水之癖 周覽四方山川至晋州西杜里 幾見靑鶴洞 而未果矣 一日老僧來訪 頗有識見 語佳山麗水而語及此洞 余曰 汝能得記否 僧詳知矣

다음 날 스님과 더불어 같이 길을 떠난 지 11일에 하동(河東화개천(花開川) 위의 주막에서 유숙(留宿)하고 다음 날 길을 떠나 하나의 바위굴을 얻어 유숙하고 등촌재(橙村齋)에서 점심을 먹었다. 3 양초(糧草: 식량과 꼴)를 갖고 가다가 들에서 잠을 자고 3일째 되는 날 석문에 이르렀는데 겨우 한 사람 정도 다닐 수 있었다. 석문에 새겨진 한 구절을 읊으니, 바위 아래 나무에서 새가 울어 사람을 놀라게 하고, 골짜기 가운데 하늘에 복숭아꽃이 물에 흘러가더라.

翌日 偕僧 發行十一到河東花開川上店留宿 又行得一巖穴留宿 午飯于橙村齋 三日糧艸行露宿 第三日到石門 僅容一人而行 入石門 吟一句 啼鳥驚人巖下樹 桃花流水谷中天

 

걷고 걸어 조금씩 나아가니 40여 리를 돌아올 정도의 평탄한 들판이 크게 열렸다. 가히 천석(千石)지기의 논을 만들 수 있고 되()의 씨를 뿌리면 석()을 수확할 수 있는 땅이라. 가히 천여 채의 집이 살아갈 수 있겠다. 여기는 마땅히 임좌병향의 백운산 세 봉우리가 바로 안산이라. 인하여 한 구절을 읊으니, '많은 꽉 들어찬 대나무 속에 복숭아 꽃이 있고 가을의 석 달 단풍잎은 소나무 가의 산골 물에 있도다.'


步步漸進 抱回四十里 大開平坦 可作畓千餘石 而升種石出之地 可居數千戶 至于當穴 壬坐丙向 白雲山 三峯爲正案 因吟一句 '萬樹桃花疎竹界 三秋楓葉澗松邊'

돌우물 하나가 있는데 돌 위에 큰 글씨로 고려 낙운거사 이청련(高麗樂雲居士李靑蓮)“ 이라 쓰여 있네. 20년을 살면 인간 세상과 통하지 않고 30년에 이르면 우레가 돌문을 깨뜨려 네 마리의 말이 달릴 수 있는 길이 생기며 40년을 살면 이름난 정승과 판서(높은 벼슬)와 어진 선비와 영걸한 재목이 무리로 나오는 곳으로 남쪽 지방에선 가장 좋은 명승지이다. 땅은 높으나 서리가 늦게 내리며 흉년이 들지 않고 병화가 이르지 않는다. (), (), (), (), (), ()씨들이 가장 번성하고 여섯 성씨가 갖추어 발복(發福)하는 땅이다. () 가운데 푸른 두루미가 많이 있어 청학동이란 이름을 붙였다혹은 학판(鶴板: 두루미 판), 적야(磧野: 돌무더기 들)라고도 했다.(누락부분)

 

有一石井 而石面大書 高麗樂雲居士 李靑蓮 居二十年 不通人世 居三十年 雷破石門 可容駟馬 居四十年 名公居卿 賢士英才輩出之地 最爲南州名勝 地高霜晩 凶年不入 兵火不至 盧李鄭柳張姜 最蕃而六姓俱發之地 洞中多有靑鶴 故云靑鶴洞 故有是名 而或云鶴板 一云磧野矣(누락부분)

 

※ 류운용의 여정 : 晋州 西杜里-화개천 주막[1]-바위굴(巖穴) 노숙[2]-등촌재(橙村齋)-들판 노숙[3]-석문-청학동

 

1. 들판(둘레가 40)

2. 임좌병향(壬坐丙向, 남동향)에 백운산 3봉이 案山

3. 화개천  주막에서 등촌재(현 지도에 등촌리)로 넘어감.

4. 남쪽 지방에선 가장 좋은 명승지 땅은 높으나 서리가 늦게 내림.

5. 돌우물 하나가 있는데 돌 위에 큰 글씨로 고려 낙운거사 이청련(高麗樂雲居士李靑蓮)" 석각

6. 천석(千石)지기의 논 만들 수 있고 ()의 씨를 뿌리면 섬()을 수확할 수 있는 비옥한 땅.

 

 류운룡(柳雲龍, 1539~1601) 본관 풍산(豊山). 자 응현(應見). 호 겸암(謙菴). 시호 문경(文敬).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의 형이며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2. 1851 하달홍의 두류기(頭流記

 

무자일(8 5) 거림촌에서 미금동(美禽洞)으로 갔는데, ()에서 말하기를 두류산 남쪽 산기슭에 푸른 학이 날아와서 둥지를 틀었는데, ()의 이름이 이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닌가?’라고 하였다. 옷을 벗고 관을 벗고 몸을 굽혀 20 를 가서 중봉(中峰)[촛대봉]에 이르렀다. 꼭대기에 있는 석각(石刻)은 고려(高麗)의 낙운거사(落雲居士) 이청련서(李靑蓮書)라고 열 글자를 쓴 것인데, 필력이 고풍스러우면서도 건장하다.

 

注 미금동(美禽洞) : 거림에서 도장골 초입을 가리킴. 주민들은 '밀금동'이라고 함.

 

왼쪽에 도장동(道藏洞), 오른쪽에 적석평(石坪)[*세석]을 두고 동북 쪽 사이로 우뚝 선 것이 천왕봉이다. 남쪽으로 뭇 산들을 바라보니 언덕 같고 말()을 엎어놓은 것 같다. 여러 산 밖에는 하나의 큰 바다가 있는데 하늘과 물이 서로 맞닿아 다만 하나로 파랗게 보일 뿐이다. 남쪽으로 내려와 몇 리를 가서 만경대(萬景臺)[연못의 바위]]에 이르렀는데, 이는 세상에서 말하는 적석동이다이곳의 나무들은 노송나무(편백나무)가 많고, 잣나무가 많고, 푸른 명아주가 많으며, 반은 상수리나무이다. 이곳의 풀은 청옥, 당귀, 작약, 사삼 같은 부류로 다 적을 수가 없다.

 

돌에 학동[鶴洞]’ 두 글자를 새겼고, 그 아래 또 []자를 새겼는데, 같이 간 사람 가운데 권씨 성을 가진 이는 바로 산 아래 사는 사람이지만 오늘에야 처음 보았다면서, ‘옛부터 전해오기를 청학동은 동해 신선들이 사는 곳이라 하여, 이인로 이후 숨어사는 이들을 몰래 찾던 사람들을 헤아려보자면 어찌 끝이 있겠는가마는 끝내 찾지 못하였으니 이곳이 도원경이라는 설은 황당한 이야기에 가까운 듯하다고 말하였다. 작은 개울을 건너 외적평()[*음양수 부근]에 이르자 해는 지고 비가 내렸는데, 겨우 낡은 초가집을 하나 얻어 머무르며 아궁이에서 옷을 말리고 솥을 괴어 밥을 지어 먹었다서로 돌아가며 자지 않고 지키면서 소나무를 태우며 밤을 보냈다. 아침에 일어나서 보니 구름은 흩어지고 하늘은 맑게 개었는데, 모든 골짜기가 마치 씻어낸 듯하였다. 골짜기를 나와 10리 남짓 가니 石門이 길을 막고 있는데, 아래로는 수레나 말이 지나갈 만하고 위로는 바람이나 비를 막을 만하였다. 길이가 수십 걸음으로 극히 웅장하고 우뚝하였다. 그 남쪽으로는 다섯 개의 봉우리가 늘어섰는데 맨 밑에서 꼭대기까지 모두 돌이며, 칼을 뽑고 창을 세워 놓은 듯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두려움을 느끼게 하였다. 산에서 내려올 무렵에는 이미 날이 저물었다.

 

경인일(8 7)에 갈현(葛峴)[*갈치재]에 올라 다시 두류산을 바라보며 수많은 봉우리를 손으로 짚어보았는데, 어제 묵었던 곳은 마치 하늘 위인 것처럼 아득하였다. 저녁때가 되어 집에 돌아왔다. 이때는 신해년(1851) 중추로서 같이 간 사람은 류흥기(柳興朞)[() 사윤(士潤)], 최호(崔浩)[자 기연(氣然)] 최탁(崔倬)[자 윤렬(潤冽)]이다. 출처 : 지리99

 

* 하달홍(1809~1877) : 자는 윤여(潤汝)이고, 호는 월촌이다. 남명학을 계승한 옥종 선비로서 순조 기사(己巳),  1809년 진주 서쪽 옥종면 종화리(宗化里) 월봉고택(月峯故宅)에서 석흥(錫興)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1877 6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양정공(襄靖公) 하경복(河敬復)의 후손이며, 풍채와 태도가 엄정하여 천박하지 않고 문사(文詞)도 넉넉하고 넓으며 행의(行誼)가 순박하고 독실하였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물재(勿齋) 노광리(盧光履), 남파(南坡) 이위석(李偉錫)과 도의지교를 맺었고, 그의 저술에 태극도주해(太極圖註解), 진학설(進學說), 균부설(均賦說), 동해송변(東海頌辨)이 있는데, 모두 인구(人口)에 회자되었으며 문집이 있다. 한편 지리산에 관해서는 頭流記 외에도 무주암대원암 등을 찾고서 남긴 기행문과 수 십 편의 시들이 문집에 있다.

 

 

3. 1879년 송병선 두류산기(頭流山記)

 

누대를 오르니 왼편에는 누운 바위가 벼랑을 이루고 있고 정면에는 학동임(鶴洞壬)’ 세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아마도 근래에 기궤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한 짓인 듯하였다. 아래에는 작은 못을 만들었고, 또 그 몇 보 아래에는 우물이 있었는데 연수정(延壽井)’이라 하였다. 누대의 뒤에는 촛불 같은 촉봉(촛대봉)이 우뚝 솟아나 있었다. 촉봉 바위에는 다음과 같은 율시 한 편이 새겨져 있었다.

 

上臺左有臥巖作崖. 面刻鶴洞壬三字. 此似近世好詭者之事矣. 底築小池. 又下幾步有井曰延壽. 臺後燭峯聳出. 巖面刻一律詩曰.

 

頭流山逈暮雲低 : 두류산 저 멀리 저녁 구름이 낮게 드리워져 있으니

萬壑千巖似會稽 : 만개의 골짝과 천개의 바위가 회계산(會稽山) 같구나.

杖策浴尋靑鶴洞 : 지팡이를 짚고 청학동을 찾아가려 하는데

隔林空聽白猿啼 : 숲 너머로 부질없이 흰 원숭이의 울음소리만 들리네.

樓臺縹緲三山近 : 누대에선 아득히 삼신산이 가깝고

苔蘚依俙四字題 : 이끼 낀 바위에는 어렴풋한 네 글자가 새겨져 있네.

試問仙源何處是 : 시험 삼아 선원이 어디냐고 물어보노니

落花流水使人迷 : 떨어진 꽃 흐르는 물이 사람을 미혹케 하네.

 

 

그 옆에는 낙운거사(樂雲居士) 이청련(李靑蓮)이 쓴 여덟 글자가 있었는데, 사람들 말로는 미수(眉叟) 이인로(李仁老)의 고적(古迹)이며, 대개 이 산에 청학동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탁영 김일손의 유기에서는, 쌍계의 동쪽으로 몇 리를 가서 한 동네를 발견했는데, 넓고 평평하여 농사를 지을만하였는데, 세상에서는 청학동이라 한다.” 라고 하였고, 남명(南冥) 조식(曺植)도 또한 이와 같이 말했다. 내가 여러 산의 백성들에게 물어보니 이곳은 불일암에서 가까운 곳인 듯하나 바위가 많은 골짜기로 험준하고 깊어서 사람이 살기에는 어려운 곳이라 하였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세석평을 청학동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산 정상에 있으면서 만약 산성이 되지 않는다면 또한 절하나 세우기에 적합한 정도였다. 일찍이 듣기에 악양(岳陽)은 토양이 기름지고 평평하고 넓어서 이 산에서 살기에 가장 좋은 곳이라고 한다. 지금 세석평 보니 정기가 모여 남쪽으로 내달아 백리 가까이 가서 악양에 이르러 멈추었다. 빙 둘러 안아 터를 이루었으며 백운산을 마주하고 섬진강을 끼고 있으니, 미수 이인로가 칭한 것이 여기에 있지 않다는 것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돌 비탈길을 따라 등반하여 바로 수십 리를 내려가니 자못 호리병을 세워놓은 것 같았다. 깊은 수풀에 큰 나무들이 빽빽하게 서서 그늘을 드리워 틈을 막고 있어서, 반나절을 가도 하늘의 해가 보이지 않았다. 거림(巨林)에 도착하니 일행이 한출리(閒出里)에서 머물러 기다린다는 소리를 듣고 가서 만났다. 비가 와서 지체되어 숙소에 묵었다.

 

傍有樂雲居士 李靑蓮書八字 人言李眉叟仁老古迹也 蓋此山有靑鶴洞云 二濯纓遊記曰 雙溪東數里 得一洞府寬平可耕 世以爲靑鶴洞 南冥稱之亦如此 余問諸山下人 此似佛日近地 而巖谷峻㴱難爲人居 且或以細石坪靑鶴洞 然在山絶頂 若非爲山城 亦可合一緇場也 曾聞岳陽土厚平廣 最爲玆山內 可居之地也 今見細石一支會精聚 氣南馳近百里至岳陽而止 環抱成局 對白雲山襟蟾津江 李眉叟所稱者安知不在此歟 攀緣石磴直下數十里 殆如建瓴水穹 林大木森蔭蔽虧 半日行不見天 日到巨林 聞一行畱待於聞出里往會 滯雨信宿

 

注 建瓴水 : (병의 물이 쏟아지듯)높은 데에서 쏟아져 흐르는 물을 이르는 말. 穹 : 하늘궁. 滯雨 : 비에 막혀서 체류(滯留)함. 信宿 : 이틀 밤을 머무름.

 

 

  세석 인공연못의 경우만 하더라도 아무런 관계도 없는 선인들의 유람록을 끌어다 붙여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진 지 십 수년이 되었다. 이제 일반 등산객들도 대부분 청학연못으로 알고 있다. 심지어 국회도서관에 영구 보존된 지리산 관련 박사학위 논문(조선시대 유람록에 나타난 지리산 경관자원의 명승적 가치/이창훈/박사 학위 논문 상명대학교 대학원, 환경자원학과 환경조경전공, 2014.2. 지도교수: 이재근)에도 버젓이 청학연못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제 누구나 거리낌 없이 청학연못이라고 불러도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없다. 2006년 1월경 고 성락건 선생이 처음 공개한 이 연못은 몇몇 호사가들에 의해 청학연못으로 새롭게 탄생하였고, 이제 본래의 이름을 되찾기는 어렵게 되었다.

 

  세석의 '청학연못'에 대한 이야기는 고인이 된 성락건 선생께 누가 되는 것 같아서 더 이상 論하지 않겠지만, 선인들의 유람록에 따르면  세석평(磧石洞 : 석동) 소지(小池)이고그냥 쉽게 부르면 세석연못이다. 선인들의 유람록에도 오류가 있을 수 있고, 유람록을 잘못 국역할 수도 있다. 선인들의 유람록을 답사하면서 지명을 잘못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정작 본인들의 오류를 알면서도 고치지 않는 것은, 기러기발을 아교로 붙이고 거문고를 연주하는 것과 같다. 끝.

 

 

불일폭포
靑鶴淵 또는 鶴淵 I
靑鶴淵 또는 鶴淵 II

注 불일폭포는 2 1폭으로 물이 직접 떨어지는 첫 번째가 못이 학담(鶴潭)이고, 석문 아래로 6~7개의 학연(鶴淵)이 존재한다.

 

 

 

▶ 선인들의 유산기에 나오는 청학연(靑鶴淵)에 대한 기록

 

1. 1463 <이륙>선생의 [유지리산록] 용추/학연

불일암도 아래로 백여 길이나 되는 절벽에 맞닿아 있다.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두 개의 연못(二池)이 있는데 하나는 용추(龍湫)라고 하고 다른 하나는 학연(鶴淵)이라고 한다.

 

菴又臨懸崖. 下可百餘丈. 有二池深不測. 一曰龍湫. 一曰鶴淵.

 

2. 1487 <남효온>선생의 [지리산 일과]

이 암자는 혜소가 도를 닦던 곳으로 암자 앞에는 청학연(靑鶴淵) 있는데, 고운이 일찍이 그 위를 유람하였다.

 

庵乃慧昭鍊道之所. 庵前有靑鶴淵. 孤雲嘗遊其上.

 

3. 1489 <김일손>선생의 [속두류록]

동쪽과 서쪽으로 향로봉이 있는데, 좌우로 마주 대하고 있었고 아래(불일암)에는 용추(龍湫) 학연(鶴淵)이 있는데 깊이를 헤아릴 수 없었다.

 

東西有香爐峯. 左右相對. 下有龍湫鶴淵. 深不可測.

 

4. 1558 <조식>선생의 [유두류록]

동쪽으로 높고 가파르게 솟아 조금도 양보하지 않는 것은 향로봉(香爐峯)이고, 서쪽으로 푸른 벼랑을 깎아내어 만 길 절벽으로 우뚝 솟은 것은 비로봉(毘盧峯)으로 청학 두세 마리가 그 바위틈에 깃들여 살면서 때때로 날아올라 빙빙 돌기도 하고 하늘로 솟구쳤다가 내려오기도 한다. 아래에는 학연(鶴淵)이 있는데 밑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까마득하였다.

 

東有崒嵂撑突. 略不相讓者曰香爐峯. 西有蒼崖削出. 壁立萬仞者曰毗盧峯. 靑鶴兩三. 棲其岩隙. 有時飛出盤回. 上天而下. 下有鶴淵. 黝暗無底.

 

동쪽으로 있는 폭포는 나는 듯 백 길 낭떠러지로 쏟아져 학담(鶴潭)을 이루고 있었다.

 

東面瀑下. 飛出百仞. 注爲鶴潭.

 

5. 1618 <양경우> [역진연해군현잉입두류록]

 

폭포가 향로봉의 오른쪽 중턱에서 쏟아져 내려 대의 아래에 이르러 웅덩이를 이룬다.

 

6. 1651 <오두인>의 두류산기(頭流山記) 

폭포가 흘러가는 곳에서 시작하여 양봉(兩峯) 남쪽이 학연(鶴淵)이며, 바로 그곳이 쌍계 좌측 물줄기의 근원이다.

 

7. 1655 <김지백> [유두류산기]

천신(天紳)수백 길이 향로봉(香爐峰)에서 흘러내리는 것을 바라보노라니, 그 형세가 마치 무지개가 일어나고 번개 치는 듯하여, 다만 여산(廬山) 폭포와 박연(博淵) 폭포만이 서로 견줄 수 있다. 전날 용추(龍湫)를 구경했던 사람들 또한 이 완폭대 아래에서 바람을 쐬었다.

 

望見天紳數百丈. 掛流香爐之側. 勢若虹起電掣. 直與廬山慱淵上下. 往日龍湫之所賞者. 亦風斯下矣.

 

8. 1697 <이명배> [남정록]

향로봉의 서쪽에 비로봉이라 부르는 봉우리가 있고, 향로봉과 더불어 서로 바라보며 나란히 서 있는데 하늘의 신선이 강림한 곳이라고들 하였다. 두 봉우리 아래에는 소위 학소(鶴沼)라는 것이 있어 시퍼렇게 바닥이 보이지 않고 암벽은 사방을 에워싸고 초목이 무성하게 우거져 있었다. 염여퇴(灎澦堆)와 구당협(瞿塘峽)을 마주한 듯, 이 자리에 서니 깊은 연못에 임하듯이 삼가는 마음이 더욱 일어났다. 그리고는 스님에게 물었다. “학소(鶴沼)라고 이름 지은 것은 어째서인가?” 스님이 대답하였다. “학의 무리가 항상 이곳에 와서 목욕하기 때문이랍니다.”

 

9. 1744 <黃道翼> [頭流山遊行錄]

불일폭포의 아래에 학연(鶴淵) 학추(鶴湫) 학담(鶴潭)이 있다. 비록 그 옆에 발을 놓고 신령스러운 물을 바라보려고 하였으나 매우 위험하고 어지러워 가까이 갈 수가 없다. 승려가, ‘어떤 사람이 아름다운 경치를 즐겨 구경하였는데 학연(鶴淵)에 가까이 갔다가 발이 미끄러워 연못(학연) 가운데로 빠졌다. 끌어당길 것이 없어 스스로 필시 죽겠구나 라고 여겼는데 물이 바위틈으로 쏟아져 나왔다. 드디어 그 틈을 따라 무릎으로 기어서 나와 살았다.’고 하였다.

 

瀑布之下. 鶴淵. 䳽湫. 䳽潭. 雖欲側足其傍. 窺見靈源. 危絶眩悸. 不可近也. 僧云. 有人耽玩奇勝. 阽跟䳽淵. 足滑墜淵中. 無攀緣處. 自分必死. 水由巖穴中流出. 遂從中俯伏膝行得出以生云.

 

10. 1807 <남주헌> [지리산행기]

불일암은 벼랑 위에 매달려 있었는데, 그 높이가 수백 길이나 되었다. 동편에 쏟아지는 폭포가 있어 물이 떨어지며 두 개의 못을 만들었는데, 하나는 용추(龍湫)이며 다른 하나는 학담(鶴潭)이다. 암자 앞에 천길 높이의 오래된 소나무가 있고, 바위에는 '완폭대(玩瀑臺)' 세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완폭대 남쪽에 향로봉(香爐峯)이 있다.

 

11. 1807 <하익범> [遊頭流錄]

동쪽 봉우리를 향로(香爐)라고 하고 서쪽 봉우리를 비로(毗盧)라고 한다. 또 동쪽을 청학(靑鶴), 서쪽을 백학(白鶴)이라고도 하니 이것은 아마도 세속에서 청학동이라고 일컫는 것이 아닐지 모르겠다. 좌우의 암석들이 우뚝 솟아 허공에 매달려 굽어볼 수 없었고 동쪽에는 백여 자나 되는 폭포가 곧장 쏟아져 내려 학연(鶴淵) 용추(龍湫)가 되는데 수심이 매우 깊었고 밤낮으로 칠흑같이 어두워 하늘과 땅이 숨겨 놓고 큰 정령(巨靈)과 교룡들이 지켜서 사람들을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듯했다.

 

12. 1808 <유문용> [유쌍계기]

왼편은 청학봉(靑鶴峯)이고, 오른편은 백학봉(白鶴峯)인데 두 봉우리가 모두 구름에 꽂혀 있으며, 그 아래로 분탕하게 물이 흐르는 푸른 곳에는 용추(龍湫)가 있는데 깊이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左靑鶴. 右白鶴. 兩峯. 皆揷雲其下漭蒼之中. 有龍湫湥不測.

 

13. 1845 <양진영> [유쌍계사기] : 꿈속 이야기

이날 밤 꿈에 청학동을 지나 향로봉에 올랐다. 학연(鶴淵)이 있는데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고, 그 아래에 있는 학담(鶴潭)은 물이 천 자나 되는 아래로 날아 떨어지는데 눈을 뗄 수가 없다.

 

是夜夢過. 靑鶴洞. 登香爐峰. 有鶴淵. 深不可測. 其下鶴潭. 水飛下千尺. 不可懸視.

 

14. 1879 <송병선> [두류산기]

골짜기 깊은 곳에는 허공에 날리는 폭포수가 천 길 아래로 떨어져 깊은 못을 이루었는데, 이름을 학연(鶴淵)’ 이라 한다고 하였다. 또 탁영(濯纓) 김일손(金日孫)의 유기(遊記)를 보니 이 폭포를 매우 칭찬하며 돌아다닌 곳 가운데 사람의 마음에 들만한 것은 오직 불일암 하나일 뿐이라 하였다. 또한 몸은 푸르고 정수리는 붉으며 긴 목을 지닌 새가 있는데, 매번 늦여름이면 이 암자 앞의 향로봉(香爐峯)에 날아와 모여들어 학연(鶴淵)의 물을 마시고 떠나가니 이곳이 곧 청학동(靑鶴洞)이었다.

 

15. 1883 <전기주> [유쌍계칠불암기]

불일폭포가 소용돌이치며 쏟아져 내려 아래에 이르러 용추(龍湫)가 되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기우처(祈雨處)라고 한다. 지팡이를 짚고 내려가 나무 사이에서 내려다보았다. 검푸른 물이 깊어 만 길이나 됨직했다. 한기가 매우 심해 오래 머물 수 없어 되돌아 올라왔다.

 

16. 1899 <하겸진> [유두류록(遊頭流錄)]

그 동쪽이 향로봉(香爐峯), 서쪽이 비로봉(毗盧峯), 그 아래 바닥도 없이 어두컴컴한 곳이 학담(鶴潭)이다. <중략>다시 맨발로 학담(鶴潭) 용추(龍湫)를 지나서 불일암으로 되돌아왔다.

 

17. 1902 <송병순> [유방장록]

동쪽 봉우리를 청학봉(靑鶴峰), 서쪽 봉우리를 백학봉(白鶴峰)이라 하였다. 그 아래 용추(龍湫) 학연(鶴淵)이 있었다. 동쪽 봉우리 어깨에서 폭포수가 천 길 높이로 쏟아져 내려 학연(鶴淵)으로 떨어져 흘렀다.

 

18. 1903 <안익제> [두류록]

지금 불일암에 도착해 보니, 암자는 무너지고 신사(神詞)만 있는데, 신사 앞에 대가 있다. 조금 평평하여 10여 명이 앉을 수 있다. 미수가 이른바 전대(前臺)’라고 한 것이 이것일 것이다. 그 아래 용추(龍湫)는 요란하게 소용돌이치는데, 깊이를 측량할 수 없다. 용추(龍湫)는 청학봉과 백학봉 사이에 있다.

 

19. 1905 <양재경> [유쌍계사기] 꿈속 이야기

청학동(靑鶴洞) 향로봉(香爐峯)은 일생동안 아름답다는 이름만 들어 꼭 한 번 보고자 했던 곳이다. 그런데 오늘도 그냥 돌아가게 되어 허사가 되었으니 슬프도다. 칠불암에서 내려와 다시 쌍계사에서 묵었다. 이날 밤 꿈속에서 청학동을 지나 향로봉에 올랐다. 학연(鶴淵)이 있었는데 깊이를 헤아릴 수 없었고, 그 아래에는 학담(鶴潭)이 있었는데 물이 천척(千) 아래로 떨어져 올려다 볼 수 없었다.

 

20. 1928 <오정표> [유불일폭기]/1928년 <주영남> [유불일폭기]

폭포의 흐름은 돌문을 따라 나와 깊은 못을 만드는데(窪然成湫) 마치 신비스런 물건이 있는 듯하였다. 가서 보려고 하니 매우 위험하여 볼 수가 없었다.

 

瀑之流. 從石門出, 窪然成湫. 若有神物伏焉. 欲往觀而危甚不果.

 

21. 1861년~1866年間 대동지지(김정호가 편찬) 하동도호부(河東都護府)조, 산수(山水)

 

불일암(佛日庵)은 서쪽으로 고개 하나를 넘어 쌍계사(雙溪寺) 10여 리 거리에 있다바위 계곡이 험준하고 갈 수 있는 길이 없다절벽 중간을 깎아 겨우 한 사람 정도 지나갈 수 있는데왕래하는 사람들이 진땀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다암자는 또 아득한 낭떠러지에 맞닿아 있는데높이가 수십수백 길이나 된다깊이를 알 수 없는 못이 두 곳 있는데 하나는 용추(龍湫)라고 하고또 하나는 학연(鶴淵)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