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둔산 석천암 마애 석각 침석(枕石)과 수천(漱泉)에 대하여
대둔산 석천암 암굴 입구에 양쪽에 마애 석각 枕石(침석)과 漱泉(수천)이 있는데,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 1607~1689) 선생의 필획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석천(石泉)이 나오는 암굴(巖窟) 상단 중앙에 '일엄(一广)'이라는 마애 석각이 있다. 일엄(一广)은 조선 후기 영조와 순조 때에 충남 연산에 살았던 김장생의 6대손인 김상일(金相日, 1756~1822)이라는 인물이다. 김상일(金相日)의 문집 『일엄유고(一广遺稿) 』 권지삼(卷之三) 부록(附錄) 묘지문(墓誌文)에 1805년(순조 5년) '일엄(一广)'의 나이 50세에 '大芚山에 一广枕石漱泉濯纓仁智라는 열 글자를 새겼다.‘라는 기록이 있다. 枕石漱泉(침석수천)은 '돌을 베개로 삼고 샘물로 양치질 한다.'는 의미로 '山水를 벗삼아 자연에서 살아간다.'라는 뜻이다. 탁영(濯纓)과 인지(仁智)의 석각은 확인하지 못해 설명을 유보한다. 枕石(침석)과 漱泉(수천)의 마애 석각이 우암(尤菴)의 필획이라고 하는 것은 와전(訛傳)된 것이고, 一广(일엄) 김상일(金相日)의 필획이다. 이곳 석천암(石泉庵)은 예로부터 학문을 하는 선비들이 공부를 하였던 곳으로, 해방을 전후하여 야산(也山) 이달(李達) 선생이 주역(周易)을 강론하였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원문] 一广遺稿 卷之三 附錄 墓誌文 : 弱冠遊金剛。晩年刻一广枕石漱泉濯纓仁智十字於大芚。(출처 : 고전번역원 일엄유고)
* 김상일[金相日] 1756년(영조 32) ~ 1822년(순조 22) 자는 자산(子山), 호는 일엄(一广) 또는 농수(聾叟). 충청남도 연산 출신. 김장생(金長生)의 6대손이며, 아버지는 기택(箕澤)이다.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뜻을 두고 『심경(心經)』·『근사록』 등을 탐독하여 「문견록(聞見錄)」을 지었다. 산수를 좋아하였으며 시문에 뛰어났다. 저서로는 『일엄유고』 2권이 있다.[네이버 지식백과] 김상일 [金相日]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一广遺稿 : 3권 2책. 활자본. 아들 숙(肅+心)이 편집, 1853년(철종 4) 손자 재직(在直)이 간행하였다. 서문은 없고, 권말에 재직의 발문이 있다. 연세대학교 도서관·성균관대학교 도서관 등에 있다. 권1·2에 시 298수, 권3에 서(序) 4편, 기 1편, 발 2편, 설(說) 2편, 잠(箴) 1편, 명 5편, 제문 4편, 잡저 6편, 부록으로 묘지명·묘갈명 각 1편, 그리고 『소안재유고(小安齋遺稿)』에 시 62수와 부록 등이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서(書)가 없는 것이 특이하다. 시는 곤륜(崐崙)·한라(漢拏)·금강(金剛)·지리(智異) 등 명승을 읊은 것이 가장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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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 살롱] [1242] 세상과 떨어져 있을 때
신문A29면 1단 기사입력 2020.04.27. 오전 3:18 기사원문 스크랩
세상과 차단하고 부득이 떨어져 있어야 할 때가 있다. 이 판단이 어렵다. 진퇴 문제는 고도의 판단력을 요구한다. 고와 스톱을 잘못 판단하였다가 거덜 난 인생이 한두 사람이 아니다.
1945년 해방이 되어 다른 사람들은 모두 좋아하였지만, 주역의 대가였던 야산(也山) 이달(李達·1889~1958) 선생은 걱정되었다. 주역의 괘를 뽑아 보니까 천산돈(天山遯) 괘가 나왔던 것이다. 돈괘는 숨거나 은둔한다는 의미가 있다. 갑자기 해방이 되니까 양쪽에서 나팔을 세게 불어 댔다. 그 나팔 소리에 귀가 먹먹해질 정도였다. 많은 사람이 줄 서서 어디론가 달려가는데 나만 혼자 그 줄에서 이탈하여 다른 길로 간다는 것도 쉬운 문제가 아니다. 어디로 숨어야 할 것인가? 숨는 것도 내공이다. 평소에 쌓아 놓은 내공이 없으면 어디로 숨어야 할지도 모른다.
야산은 대둔산(大芚山) 석천암(石泉庵)으로 숨었다. 논산시 벌곡면이다. 석천암의 위치는 해발 500m. 온통 바위 암벽으로 이루어진 대둔산은 험난한 악산(岳山)이다. 바위 틈새의 좁은 땅에 자리 잡은 아주 옹색한 암자이다. 먹을 것은 없고 샘물만 좋은 곳이다. 난세에 은둔해서 있기에는 좋은 위치이다. 야산의 주특기는 주역의 괘 이름과 지명이 일치하거나 비슷한 장소에서 거처하기를 좋아했다는 점이다. '遯'자도 '둔'으로 읽기도 하고 '돈'으로 읽기도 한다. 대둔산의 '둔'과 그 발음이 같다. 그래서 대둔산으로 오지 않았을까 싶다.
대둔산은 백제 계백 장군의 결사대가 황산벌 전투에서 신라군에 밀린 뒤에 최후의 저항군이 들어온 산이라고 추정되기도 하고, 동학의 전투에서도 일본군에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동학군들이 숨었던 산이기도 하다. 은둔했을 때의 문제점은 고독과 무료함이다. 어지간한 실력 가지고는 둔세무민(遯世無悶·세상과 떨어져도 근심하지 않는다)이 말처럼 쉽지 않다. 야산은 석천암에서 6·25 전까지 제자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난세에 세파에 휘말리지 않고 그 대신에 제자들을 양성한 것이다.
총선 끝나고 석천암에 가 보았더니 샘물 옆 바위에 새겨진 '침석(枕石)'과 '수천(漱泉)' 글자가 나를 반긴다. '돌을 베개 삼고 샘물로 양치질한다'는 뜻이다. 노론 명문가 자제이면서도 평생 명산대천을 떠도는 한량으로 살았던 일엄(一广) 김상일(金相日·1756~1822)이 50세 때 새긴 글씨이다. 적당한 벼슬도 충분히 할 수 있었을 텐데 일엄은 왜 이렇게 궁벽진 바위산을 떠도는 삶을 선택했을까. 상팔자였던 것일까!
[조용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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