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崇祖惇宗/경술통문

경술통문 동지인 강병욱(姜炳旭) 강병유(姜炳裕) 강병수(姜炳修)

도솔산인 2018. 9. 22. 03:50

강병욱[姜炳旭,1871.5.6 ~ 1952.3.10]

 

요약 한말 이강년 의진에서 활약한 의병장. 1907년 국권회복에 뜻을 두고 이강년 의진에 투신해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특히 19086월 이강년이 청풍 작성전투에서 붙잡혀 사형당한 뒤에도 소백산을 중심으로 계속 항일 의병투쟁을 전개하였다.

 

1871(고종 8) 56일 경상북도 문경(聞慶)에서 태어났다. 일제가 강제로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을 체결하고, 이어 대한제국 군대마저 해산하는 등 침략정책을 더욱 노골화하던 시기인 1907년 국권회복에 뜻을 두고 이강년(李康강병욱 본문 이미지 1) ) 의진(義陣)에 투신해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이강년 의진은 충청북도 제천(堤川)을 중심으로 경상도·강원도 등 폭넓은 지역에서 유격전을 벌이면서 한말 의병사에 한 획을 그은 부대로, 강병욱은 이 의진에서 종사(從事)로 활약하였다. 특히 19086월 이강년이 청풍(淸風) 작성전투에서 발목에 총탄을 맞고 일본군에 붙잡혀 사형당한 뒤에도 소백산(小白山)을 중심으로 계속 항일 의병투쟁을 전개하였다.

 

19145월에는 동지들과 함께 다시 의병을 일으키기 위해 강원도 영월군(寧越郡) 하동면(下東面)에서 군자금을 모금하던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그해 7월 경성지방법원에서 10년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99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강병욱 [姜炳旭] (두산백과)


○ 강병욱(姜炳旭)

  강병욱은 1907년 이강년의진에 참여하여 대일항전에 나섰다. 그는 이강년의진의 종사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그러나 이강년이 1908년 7월 청풍 작성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피체되어 교수형을 받고 순국하자, 그는 소백산 일원에서 대일항전을 계속하였다. 그리하여 1914년 5월 재거의를 위해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에서 동지들과 함께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피체되어 같은 해 7월 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0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9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판결문(1914.7.3. 경성지방법원), 운강선생창의일록, 한국독립사(김승학) 전권 587쪽.



강병유(姜炳) : 전직은 주사. 호는 금산(錦汕)이며 문경 거주. 본관은 진주,  강병수(姜炳) : 문경 거주. 본관은 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