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연 [柳時淵 1873(고종 10)~1914. 1. 29]
본관은 전주. 이명은 시연(時然)·승일(承一). 자는 박여(璞汝), 호는 성남(星南). 유연각(柳淵覺)에게 수학했으며, 어려서부터 전사(戰史)와 병서를 탐독하는 한편 수레바퀴·활·창·화약 등을 만들기도 했다고 한다. 1895년 을미사변 후 안동의병장 권세연 막하에서 선봉장으로 활약해 유선봉(柳先鋒)으로 불렸다. 안동의진이 패한 뒤 1896년 5월 29일 단양·풍기·영천·경주 등지를 거쳐 안동지역에 이른 김하락(金河洛) 의진에 합세했다. 이후 김하락이 전사하고 의진이 깨지자 후일을 기약하기 위해 유창식(柳昌植)·유인식(柳寅植)·이현규(李鉉奎) 등과 뜻을 모으고 각계 각층의 사람들과 접촉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소모장(召募將)으로 동지를 규합했다. 1906년 봄 경주 분황사에서 여러 의병장들과 회맹하고 영남의병대장으로 추대되어 진보·영덕 등지에서 전투를 벌였다. 1907년 호서와 영남 중간에서 활약하던 이강년(李康秊)이 함께 합류해줄 것을 요청한 격서를 보내자 부하 수십 명을 이끌고 삼척 방면에서 이강년을 만났다. 그러나 당시 삼남토벌대장인 친일파 박두일(朴斗日:혹은 朴斗榮)의 계략으로 본진이 깨지자, 울진십이령(蔚珍十二嶺:혹은 三陟十二嶺)에서 박두일을 사살한 뒤 영양·청송·안동 등지에서 유격전으로 일본군과 교전해 전과를 올리는 등의 활약을 하다 일본군의 추격을 받자 변장을 하면서 숨어 살았다. 1911년 8월 만주로 망명해 이상희(李象羲)·김동삼(金東三)을 찾아가서 안창호(安昌浩) 등과 같이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이후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국내에 잠입해 활동하던 중 1913년 5월 밀정의 밀고로 영주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대구복심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이듬해 순국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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