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崇祖惇宗/독립운동

止山遺稿와 庚戌通文에 나오는 小山 李起夏는 누구인가?

도솔산인 2018. 9. 4. 22:48

 

止山遺稿와 庚戌通文에 나오는 小山 李起夏는 누구인가?

 

 

 지산유고의 창의일기를 국역하면서 小山 李起夏 선생이 가장 궁금했던 인물이다. 1896년 2월 8일 止山 李起璨 선생이 창의를 하기 위해 구미 甘川으로 旺山 許蔿 선생을 만나러 갈 때 동행을 했고, 1910년 7월 경술통문에 동지인으로 서명한 기록이 있다. 의병전쟁이나 독립운동의 사료는 남아있는 것이 희귀하고, 그 자손들이 혹여 생존해있다고 해도 역사에 파묻힐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지난 번 경북독립기념관을 방문하였을 때 박갑로 선생과 권대웅 교수에게 이기하 선생의 동생 이기상 선생은 왕산 허위의 비서실장, 이기영 선생은 왕산의 사위라는 이야기를 듣고 지산유고와 경술통문을 다시 읽어보고 전주이씨 효령대군 세보에서 찾아보았다.

 

 

1. 止山遺稿에 나오는 李起夏

 

가. 止山遺稿 年譜

 

建陽二年高宗三十三年丙申先生四十四歲二月八日與族大人起夏(岐卿小山甁窩嗣孫)同訪許旺山蔿於州西甘川議倡義事

[1895] 건양 2, 고종 33년 병신, 선생 44, 28일 족대인 기하(자 기경, 호 소산, 병와의 사손이다)와 같이 상주 서쪽 감천에 있는 왕산 허위를 방문하여 창의의 일을 논의하였다.

 

 

나. 止山遺稿 倡義日記

○ 丙申年(1896년) 二月 八日

木川族人起夏適往甘川訪許旺山蔿慷慨士也憤不顧身魯與數三同志有措備於金山等地而方在啓行中余不敢辭 與諸益偕往趙進士東奭 柳兄道燮實左右之


 이월 팔일 木川(목천)에 사는 族人(족인) 起夏(기하)와 함께 甘川(감천)으로 가서 旺山(왕산) 許蔿(허위)를 찾아가 倡義(창의)의 일을 논의하였는데 허위는 悲憤慷慨(비분강개)하는 선비이다. 분하고 원통하여 자신의 둔함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서너 명(數三)의 동지들과 대략 金山(금산) 등지에서 준비를 조처하여 바야흐로 倡義(창의)를 시작하는(길을 선도하는) 가운데 내가 감히 사양(사퇴)하지 못하고 여러 돕는 사람들과 함께 趙進士(조진사) 東奭(동석)과 柳兄(유형)道燮(도섭)에게 갔는데 진실로 서로 의지하여 좌우에서 돕는 사람들이었다.

 

 

 

2. 庚戌通文 同志人 李起夏

 

 

 

 

 

 

3. 왕산 허위와 이기하·기상·기영 3형제의 항일 투쟁

 

 

 

 

4. 전주이씨 효령대군정효공파 세보 首卷 密山副守派

 

孝寧大君 補(1세) - 二子 ○(2세) - 六子 淸渠守 蕙(3세) - 五子 密山副守信孫(4세)- 一子 (5세) - 子 應生(6세) - 一子 承器(7세) - 四子 師閔(8세) - 一子 長馨(9세) - 一子 柱厦(10세) - 二子 衡祥(11세)[기축보 수권 457面] - 一子 如綱(12세)[기축보 見二之一769面] - 系子 若松(13세) - 系子 東世(14세) - 三子 廷梅(15세) -  子 日榮(16세) - 子 奎儀(17세) - 一子 起夏, 二子 起商, 三子 起永[18세]

 

一子 起夏(1862.12.03~1909.01.07) 仕郞(8품 문관) 보령 청라면 의평리 丑坐.(사망년 세보 乙酉(1945) 오류)

二子 起商(1871.20.02~1915.06.30) 청양군 적곡면 은곡리 後麓 卯坐.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三子 起永(1874.05.20~1918.01.07) 보령 청라면 향천리 後麓 辰坐, 건국훈장 애국장 서대문독립관 위패 의병대장 2006.11.17 봉안

 

 

 

1896년 을미의병에서 1910년 경술의병까지 참여했던 '李起夏'라는 인물에 대하여 君 派譜를 보면 확인이 가능할 것 같다. 지산 연보에서 '族大人起夏岐卿小山甁窩嗣孫'이라는 단서를 가지고 전주이씨 효령대군정효공파 세보에서 병와(甁窩) 이형상(李衡祥) 선생[1653~1733]을 찾았다. 李起永 선생은 왕산 허위의 사위이고, 이기영 선생의 손녀이며 왕산 허위 선생의 외증손녀 이정재 할머니가 현재 중국과 한국을 오가며 살고 있다. 이기하, 기상, 기영의 3형제는 의병 전쟁과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이기상, 이기영 형제가 1914년 일경에 체포되어 옥사하였다.(이기영 선생 1918.1.7옥사) 李起夏라는 인물에 대하여 주목하는 것은 止山 선생과 旺山 선생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하였고, 1896년에서 경술국치(1910년) 이후까지의 활동 기간과 활동 지역이 넓은데도 그의 행적이 전혀 드러나지 않고 독립유공자 추서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 전주이씨효령대군정효공파 세보 雲崗 李康秊 : http://blog.daum.net/lyg4533/16488073

☞ 전주이씨효령대군정효공파 세보 小山 李起夏 : http://blog.daum.net/lyg4533/16488072

 

 

이형상(李衡祥)[1653~1733] : 본관은 전주이며, 효령대군의 10대손이다. 그의 자는 중옥(仲玉), 호는 병와(甁窩순옹(順翁)이다. 1677(숙종 3) 사마시에 합격하고 1680(숙종 6) 문과에 급제했다. 호조 좌랑·성주 목사·동래 부사·제주 목사 등을 역임하면서 많은 선정을 베풀었다. 제주 목사 재임 당시에는 제주 지역에 만연하던 미신을 타파하고 유학의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 큰 성과를 이룩했다.

 

이형상(李衡祥)은 경주 부윤을 역임한 후 영천(경상북도 영천시 쌍계동)에 호연정(浩然亭)을 짓고 30년을 우거하면서 영천 일대의 많은 선비들과 학문적 교유와 더불어 후학 양성에 매진하였다. 1728(영조 4) 경상도 소모사로 이인좌의 난을 진압하였으며, 경주 부윤을 역임하기도 했다. 1735(영조 11) 영천의 성남 서원(城南書院)에 제향(祭享) 되었다. 1796(정조 20) 청백리에 오르고, 1829(순조 29)에는 제주 유생들이 그를 기려 영혜사(永惠祠)에 제향했다. 저서로 병와집(甁窩集)·둔서록·강도지(江都志)·남환박물지(南宦博物誌)·악학편고(樂學便考)·예학편고(禮學便考)·성리학대전등 다수가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李起商(1871.2.2.~1915.6.30) 독립운동계열 : 의병, 출생지 충남 청양, 훈격 애국장, 훈격년도 2005. 1907년 의병장 허위(許蔿)가 의병을 일으키자 의진(義陣)에 참여하여 비서로 활동하였다. 1908년에는 서울에서 의병의 총기 매매에 관여한 혐의로 체포되어 19086월 평리원(平理院)에서 이른바 내란죄로 유형(流刑) 7년을 받았다. 이듬해 8월에는 충남 청양에서 이용규(李容珪) 등과 함께 다시 의병을 일으켰으나 김창식(金昌植)과 함께 체포되었다. 국치 후인 19139월에 임병찬(林炳瓚)이 주도한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 활동에 참여하였다. 아우인 이기영(李起永, 허위의 사위)과 동지 김창식 등과 함께 1914년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高等警察要史(慶尙北道警察部, 1934) 177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제1124·125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2342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5157, 7257

 

 

 

♣ 李起永(1874.5.20.~1918.1.7) 애국장, 이기영, 충남 보령, 항일운동

충남 보령(保寧) 사람이다. 왕산(旺山) 허위(許蔿)의 사위로 1913년 임병찬(林炳瓚)이 조직한 독립의군부에 참여해 활동하였다. 독립의군부는 19129월 고종황제가 내린 밀조(密詔)에 의해 임병찬을 중심으로 조직된 비밀결사였다. 임병찬은 전국에 격문을 발송하고 동지를 초모하는 한편 그 조직을 확대시켰다. 임병찬은 그 총사령관이 되어 일제의 내각총리대신과 총독이하 모든 관헌에게 국권반환요구서(國權返還要求書)’를 보내 일제에 의한 조선 합방의 부당성을 천명하였을 뿐 아니라 외국에 대해서도 일제의 통치에 한국민이 불복(不服)하고 있음을 표명하는 한편 국민대중에게 국권회복의 의기를 일으켜 일제를 구축하려는 항일운동을 계획하였다. 이기영은 19144월 독립자금을 모집하던 중 피체되어 징역 10년을 받고 옥중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2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豫審終結決定書(京城地方法院, 1915. 3. 4)

·判決文(京城地方法院, 1915. 5. 12)

·判決文(京城覆審法院, 1915. 7. 23)

·高等警察要史(慶尙北道警察部) 177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1535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5158

 

출처 : 국가보훈처

 

 

☞ 이기하 선생에 대한 기록

독립유공자(공훈록) ㅣ 국가보훈처 www.mpva.go.kr

성 명 : 한양이

생몰년도 : 1883.1.16 ~ 1946.2.16

출신지 : 경북 문경 운동계열 : 의병

훈격(연도) : 애국장 (90)

 

공적내용

字 女敬 號 石樵 경상북도 문경(聞慶) 출신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을미의병 출신으로 문경 일대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한바 있던 이강년(李康秊)이 의병활동의 재개하였다. 이에 한양이는 이강년 의진에 참가하고 농토 6,700여 평을 매각하여 군자금으로 희사하였다고 한다. 이강년 의진이 의병활동을 본격화시키자 그 종사관이 되어 소모활동을 전개하면서 원주(原州단양(丹陽제천(堤川문경·안동(安東내성(乃城재산(才山) 그리고 경기도 관악산 등의 전투에 참가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19086월 청풍 까치성(鵲城) 전투에서 의진이 크게 패하고 의병장 이강년이 체포되어 의진이 해산되자, 이등(伊藤)을 암살하고자 이강년의 장남 이승재(李承宰)와 함께 전국을 돌며 동지를 규합하였다. 이에 이기하(李起夏) 등으로 결사대를 조직하여 경성으로 잠입하는데 성공하였으나 이일이 적에게 탐지되어 은신하였다가 예천군 용궁(醴泉郡 龍宮)에서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렀다.

 

1912년 출옥 후에는 문경군 가은(加恩)에서 사숙을 열고 문인을 모아 배일 사상을 고취시키는 한편 동지를 규합하였다고 한다. 1919년 동지 이응수(李應洙서상업(徐相業김찬규(金燦奎) 등과 거사할 것을 상의하고, 이듬해 4월 의용단(義勇團)을 조직하였다. 한편 해외의 길림군정서(吉林軍政署) 및 흥업단(興業團)과 연락 제휴하고, 군정서로부터 군자금모집사서(軍資金募集辭書권총·폭탄·암호문·독립신문 등의 지원을 받고, 의용단 경북간사에 임명되어 무장독립운동을 추진하였다. 1922년 동지 이응수·이대기(李大基) 등과 함께 대구 계림여관(鷄林旅館)에 비밀사무실을 열어 연락서신을 작성하던 중 적의 밀정에게 탐지되어 50여 명의 동지와 함께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4년 출옥한 후에는 신태식(申泰植김찬규(金燦奎서상업 등과 다시 군자금 모금활동을 전개하다가 옥고의 여독이 재발하여 1939년까지 입산하여 정양하였다고 한다. 1940년에 예천군 유산면(柳山面)에서 사숙을 열고 문인을 모아 배일사상을 고취하는 한편 운강문집(雲崗文集)을 정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운강창의일록 13·18

   · 고등경찰요사 209·210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2286309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07477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