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盈科後進/고전향기

無喜無憂기쁨도 근심도 없어라[펌]

도솔산인 2012. 4. 21. 01:30

 

無喜無憂(기쁨도 근심도 없어라)

 

 

坡山之下 : 파산의 아래 나의 거처

可以休沐 : 쉬면서 머리를 감을 수 있네

古澗淸泠 : 옛 시내 맑고 시원하니

我纓斯濯 : 나의 갓끈을 이 물에 씻고

飮之食之 : 물마시고 밥 먹으니

無喜無憂 : 기쁨도 금심도 없어라

奧乎玆山 : 깊숙한 이 산에서

孰從我遊 : 누가 나를 따라 노닐까?

 

坡山 : 경기도 坡州 坡平山 澗 : 산골물간.  纓 : 갓끈영. 濯 : 씻을탁. 奧 : 깊숙할오, 아랫목오

 

성수침[成守琛 1493(성종 24)~ 1564(명종 19)] 조선 전기의 학자. 본관은 창녕. 자는 중옥(仲玉), 호는 청송(廳松)·죽우당(竹雨堂)·파산청은(坡山淸隱)·우계한민(牛溪閒民). 아버지는 대사헌을 지낸 세순(世純)이다. 아우 수종(守琮)과 함께 조광조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1519년(중종 14) 현량과에 천거되었으나, 곧 기묘사화가 일어나 스승 조광조가 처형되고 그를 추종하던 많은 유학자들이 유배당하자 벼슬을 단념하고 두문불출했다. 이때부터 경서를 두루 읽고 태극도(太極圖)를 깊이 연구했다. 또한 〈통서 通書〉 이하의 성리학 서적을 모두 모아 연구에 전념했다. 1541년 후릉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552년(명종 7) 내자시주부(內資寺主簿)를 비롯해서 여러 차례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그의 문하에서 아들 혼(渾)을 비롯해서 많은 유학자들이 배출되었다. 글씨에도 뛰어나 일가를 이루었다. 죽은 후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파주 파산서원(坡山書院), 물계 세덕사(世德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청송집〉이 있으며, 글씨로 〈방참판유녕묘갈 方參判有寧墓碣〉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파산(坡山)〉《청송집(聽松集)》

 

 

 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은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으로 평생을 서울 백악산(白岳山) 아래와 파주의 우계(牛溪)에서 살다간 은일지사(隱逸之士)이다. 그는 문자보다는 자기 수양에 힘써서 그런지 문집의 양도 소략하고 남아 있는 시도 적다.

 

 

 이 시는 그가 파주의 파평산(坡平山) 아래 우계에서 은거할 때 쓴 시이다. 성수침의 아들 성혼(成渾)이 문묘에도 배향될 정도로 유명하기 때문에 우계하면 곧바로 성혼을 떠 올리는 바로 그곳이다.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불평하지 않고 자신의 내면적 충일을 일궈가는 평담한 마음이 시에 어려 있다. 위기지학(爲己之學)에 힘쓰며 안빈낙도의 삶을 추구하는 참된 처사만이 보여줄 수 있는 시풍이다.

 

 

 3행에서 ‘옛 시내[古澗]’라고 말한 것은 저자가 1543년, 51세에 동생 성수영(成守瑛)이 고을 수령을 하던 충청도 덕산(德山)으로 모친을 모시고 갔다가 그 다음해에 동생이 형의 뜻을 알고 적성 현감(積城縣監)을 자청하여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성수침은 원래 겸재 정선의 그림(1755년 작)에도 나오듯이 백악산 아래 청송당(聽松堂) 을 짓고 살다가 1541년에 아내의 고향인 파주에서 이태 정도 산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시는 아마도 우계에 죽우당(竹雨堂)을 짓고 살 무렵에 지었을 듯하다. 그리고 4행에서 갓끈을 물에 씻는 것은 굴원(屈原)의 <어부사(漁父辭)>에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나의 갓끈을 씻는다.[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라고 한 대목에서 유래한 말로 고결한 삶의 지향을 함축하고 있는 말이다.

 

 

 필자의 과문인지는 몰라도 오늘날 현대시에는 이런 삶의 자세와 마음을 드러내는 시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 같다. 우리 현대시는 주로 열정, 시적 긴장, 새로운 이미지와 시선, 개성, 이런 방향으로 나가다 보니, 우리 전통 속에 엄연히 존재하는 이런 은일의 정신은 그 시맥이 끊어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이 시가 눈길을 끄는 것은 이 시에 담긴 자기 수양의 자세랄까, 내면의 충일감 같은 것도 그렇거니와, 이 시에 대해 임억령(林億齡), 조식(曺植), 이황(李滉), 김인후(金麟厚), 송순(宋純) 등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당대의 명사 14분이 차운(次韻)하여 시를 남기고 있는 점이다. 일종의 은거에 공감하는 당대의 선비문화를 형성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한다.

 

 

 더욱이 대략 200년이 지나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이 이 시를 본떠 자신의 지취를 드러내고 있는 것에서 그 영향을 더욱 실감하게 한다.

 

 

漢山之南 : 한산의 남쪽에

呀然一谷 : 툭 트인 골짝 하나

春耕秋穫 : 봄이면 밭 갈고 가을이면 수확하여

安分無辱 : 구차하지 않게 분수대로 사네

歌詠先王 : 옛날 어진 임금을 노래하고

尙友千古 : 천고의 현자를 벗 삼아

優哉遊哉 : 넉넉하고 한가로이

樂此踽踽 : 외로운 이 삶을 즐기노라.

 

<파산체를 본받아 감회를 읊어 잠옹(潛翁) 남하행(南夏行) 어른에게 바치다[效坡山體詠懷, 贈潛翁南丈夏行] >

 

呀 : 입벌릴하, 굴 골짜기등이 텅비어 휑 뚫린 모양, 어조사하. 尙友 : 상대의 현인을 벗으로 함. 고인을 벗으로 삼음. 踽 : 홀로갈우, 홀로 외로이 행하는 모양, 踽踽 : 고독한 모양, 외로이 행하여 친근한 사람이 없는 모양 

 

시의 제목에서 말하고 있는 파산체는 바로 성수침이 쓴 앞의 시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시의 형식과 담고 있는 지취를 따져 보면 그 근원이 《시경(詩經)》 <위풍(衛風) 고반(考槃)>에 가 닿는다. 3장으로 된 시 중에서 제1장을 본다.

 

 

考槃在澗 : 은거하는 곳이 시냇가에 있으니

碩人之寬 : 큰 선비의 마음이 넉넉하도다.

獨寐寤言 : 홀로 자고 홀로 깨어 말하나

永矢弗諼 : 길이 이 즐거움 잊지 않으리라.

 

考槃 : 은둔할 곳을 마련하여 유유자적하는 일.'考'는 '成'  '槃' 은 '樂' 또는 '盤桓'의 뜻. 일설에는 쟁반을 두드리면서 노래의 장단을 맞추는 일. '考'는 '扣' 槃은 器具의 이름.  永矢 : 諼 : 속일훤, 잊을훤(=諠)

 

<모시서(毛詩序)>에는 위나라 장공(莊公)이 선왕의 덕업을 계승하지 못하여 어진이로 하여금 물러나 곤궁하게 살도록 했기 때문에 장공을 풍자한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하였다. 선비들이 공부하는 것은 본디 자기 수양을 기반으로 세상에 나아가 뜻을 펴려는 것인데, 그런 뜻을 접고 은거한다는 것은 현실 정치에 대한 불만과 자신의 뜻을 펴 볼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성수침 역시 1519년에 일어났던 기묘사화로 신진사류였던 조광조 일파가 일망타진당하는 것을 보고 은거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또 이 시에 관류하고 있는 정신은 유종원(柳宗元)의 산수유기(山水遊記)와 아주 밀접한데 특히 마지막 두 구절은 유종원의 <영주용흥사동구기(永州龍興寺東丘記)>에서 온 것이다. 유종원은 당시 반대 당파에 의해 영주사마(永州司馬)로 좌천되어 산수에 마음을 붙이며 다소 철학적인 향취가 풍기는 영주팔기(永州八記) 등의 뛰어난 유기 작품을 썼다. 산수유기에 특히 뛰어난 그의 글과 지취가 성수침의 상황과 성향에 잘 맞아 떨어졌을 법하다.

 

 

 이렇게 보면 이 한 편의 시작품은 당대의 은거 문화를 이해할 수도 있고 위로는 유종원의 유기와 시경에 가 닿고 아래로는 안정복의 시에 그 흐름이 연결된 것을 알 수 있다. 한시의 이해는 이렇듯이 그 개별 작품도 작품이지만 시간과 공간을 연결해 보았을 때 그 의미가 더 깊어지는 것이 많다. 한 편의 시는 개별 작품으로 독립되어 있지 않고 유구한 동아시아 한시 문화의 전통 속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은 온통 남에게 보이는 학문을 하는 사람들이 세상을 이끌고 나가다 보니 이런 분들이 어디 있는지 잘 알기도 어려운 실정이다. 《논어(論語)》 <학이(學而)>편의 첫 머리에서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불평하지 않으면 정말로 군자가 아니겠는가.[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라고 한 말이 참으로 엄중하게 다가온다.

 

 

 

글쓴이 : 김종태(한국고전번역원)  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고전포럼 한시감상 서른두번째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