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盈科後進/고전향기

임금님의 상투를 지키자![펌]

도솔산인 2012. 4. 10. 11:50

 

임금님의 상투를 지키자!

 

우리나라에는 일기 자료가 많다. 『승정원일기』나 『동궁일기』처럼 정부 관서에서 기록한 일기도 있고, 『난중일기』나 『계축일기』처럼 개인이 기록한 일기도 있다. 일기는 근대에 들어와 개인의 내면 세계를 독백체로 서술한 문학 장르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긴 역사의 흐름에서 볼 때 이것은 근대에 시작된 특이한 현상으로 생각된다. 일기는 나의 심리적인 내면을 기록하기보다 나를 둘러싼 세상과 세태와 세도를 기록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를테면 18세기 호남 실학의 일인자 황윤석(黃胤錫)이 남긴 거질의 『이재난고(頤齋亂藁)』를 보면 당시의 시대상이 한 사람의 일기 안에 얼마나 상세히 담겨 있는지 경이로운 시선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일기 자료가 중요한 까닭은 일기에 담긴 세상이 다름 아니라 개인이 경험한 세상이기 때문이다. 동일한 세상, 동일한 사건이라도 사람들의 경험은 천차만별일 수밖에 없고, 어쩌면 역사학의 진정한 탐구 대상은 개인의 경험을 초월한 사회의 구조라기보다 사회의 구조가 개입한 개인의 경험일지도 모른다. 아래에 소개할 「아관일기」는 조선 말기 단발령의 실시라는 한 사건을 둘러싼 한 관리의 경험을 기록한 글이다. 단발령의 실시에 관한 교과서적 지식과 다른 그의 독특한 경험은 무엇이었을까?

 

 

을미년(1895년) 10월 어느 날 상경하였다. 수감된 아우를 보기 위해서였다. 길에서 들으니 왕후께서 해를 입으셨고 또 왕후를 폐한다는 명령이 있었다 한다. 천하 만고에 어찌 이런 변이 있는가? 가는 길에 정산(定山)에 들어가 참판 민종식(閔宗植)을 찾아가 서로 보고 통곡하였다. 이튿날 청양(靑陽)에 들어가 판서 이용원(李容元)에게 인사 드렸다. 그리고, 국태공(國太公, 흥선대원군)의 편지를 보고 같은 날 나란히 도성에 들어가 태공을 알현하고 곤전(坤殿)이 복위되어야 한다고 울며 고하였다. 이 대감 집에 행적을 감추고는 명분이 바르지 않으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뜻으로 태공에게 편지를 올렸다. 가까스로 복위된 데에는 이 대감의 힘이 크다. 상공 조병세(趙秉世)를 만나 뵈었다. 조병세가 판서 조병직(趙秉稷)을 돌아보고 말했다. “내가 독상(獨相)으로 있던 25일 동안 이른바 재상 일이라고 한 것은 안효제(安孝濟)의 유배를 풀어 준 일 한 가지일 뿐이오.”

내가 말했다. “재상 일에 어찌 한량이 있겠습니까만 불초한 안효제의 유배를 풀어준 것을 재상 일이라고 이르겠습니까? 그러나, 감히 우러러 경하하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공(公)을 위해서였지 사(私)를 위해서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 때 단발한다는 소문이 자자하였다. 하루는 이 대감이 사람을 시켜 나를 초청하였다. 내가 가서 보니 태공의 편지를 꺼내 보이며 말했다. “지금 임금께서 정부의 협박으로 단발하는 지경에까지 왔네. 그래서, 구전(口傳)으로 태공에게 하교하여 우리 두 사람이 아관(俄館)에 들어가 웨베르 공사를 만나 단발을 정지하게 하려 한다네. 그대 생각은 어떤가?” 나는 대답했다. “나라의 존망이 걸려 있습니다. 감히 명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이 날이 곧 11월 13일이었다. 다시 참봉 장지영(張志永)을 불러 대의로 깨우치니 개연히 응낙하였다. 세 사람이 함께 아관에 갔다. 통사 김홍륙(金鴻陸)을 통해 들어가 웨베르 공사를 만났다. 문자와 언어가 서로 통하지 않아 흙과 나무로 만든 인형과 대면한 것 같았다. 피차간에 믿는 사람은 오직 김홍륙 뿐이었다. 인사를 마치자 각각 명첩을 주었다.

웨베르가 물었다. “무슨 일로 여기에 왔습니까?”

이 대감이 소리내어 크게 울었다. 나와 장지영도 소리내어 크게 울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웨베르는 크게 놀라 잡아 말리고는 우는 까닭을 물었다.

내가 대답했다. “나라가 장차 망할 것입니다.”

웨베르가 말했다. “무엇 때문입니까?”

“정부의 역적들이 우리 군부를 협박하여 단발하려고 합니다. 단발하면 우리 임금은 반드시 죽을 것입니다. 우리 임금이 죽으면 나라가 망할 것입니다.”

웨베르가 말했다. “개화(開化)하는 데 단발이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또 말했다. “정부는 본국인 아닙니까?”

“본국인입니다.”

“본국인이 본국의 정치를 하는데 외국인이 어찌 간여할 수 있겠습니까? 또 우리나라에는 황제가 있고 나는 일개 공사인데 어찌 이웃 나라의 큰 정치에 간여해서 따질 수 있겠습니까? 괜찮다면 전보를 해도 되겠습니까?”

세 사람이 울며 고하였다. “일이 아침저녁으로 박두하여 만약 전보를 주고받는다면 하루 이틀은 걸릴 텐데 어찌하겠습니까?”

웨베르는 끝내 흔쾌히 수락하지 않았다.

이 대감이 눈을 부릅뜨고 크게 외쳤다. “공이 이 땅에 거주한 지 이미 몇 년 지났습니다. 이런 큰 일을 경시하고 구원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웨베르가 쌍심지 같은 눈빛으로 탁자를 치며 크게 외쳤다. “지난날 청일전쟁에서 청인(淸人)이 거듭 패배하자 아라사는 질풍같이 달려갔습니다. 하지만, 귀국은 처음부터 한 차례의 전투도 없이 속수무책으로 여기까지 왔으니 어느 겨를에 남을 책하겠습니까?”

장지영이 말했다. “이는 이 두 분의 잘못이 아닙니다. 두 분은 직간을 해서 당시 먼 섬으로 쫓겨났다가 이제 겨우 용서 받아 돌아왔습니다.”

웨베르가 마침내 기운을 누그러뜨리고 말했다. “이 두 분을 이른 것은 아닙니다. 정부에 있던 사람들을 이른 것입니다.”

또 물었다. “신표가 있습니까?”

왕명이 없이 사적으로 찾아오지 않았나 의심한 것이다.

“없습니다.”

“신표를 갖고 다시 오십시오.”

우리는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하지만, 신표를 어디에서 얻어 올 수 있을까? 때에 임금과 국태공은 함께 건청궁(乾淸宮)의 윗방과 아랫방에 계셨다. 그래서, 즉시 군복을 입고 만번 죽음을 무릅쓰고 건청궁에 들어가 국태공을 알현하고 대략 일의 기미를 아뢰었다. 그랬더니, 태공은 담장에도 귀가 붙어 있어서 전교를 얻지 못한다며 즉시 자기 명첩(名帖)을 하사하고 내보냈다.

이튿날 세 사람은 태공의 명첩을 받들고 다시 아관에 들어가 웨베르를 만나 명첩을 전하였다. 웨베르는 받아서 주머니 속에 넣고 말했다. “말씀하신 대로 구해 보겠습니다.” 그래서, 돌아가 웨베르의 동정을 기다렸다.

 

(중략)

 

이 날(=15일) 신시(申時, 오후 4시) 웨베르는 과연 외아문(外衙門)에 갔지만 어떤 대화가 있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리고, 이 날 밤 자정, 임금의 머리털이 강제로 잘렸고 단발하라는 조칙이 위협 속에 내려졌다. 인심이 들끓어 각자 달아났다. 이 대감은 내게 작별을 구하고 통곡하면서 헤어져 즉시 향제(鄕第)에 돌아갔다. 나도 왕옥(王獄)에 편지를 보내 아우 창제(昌濟)에게 영영 이별하고 눈보라를 무릅쓰고 돌아갔다. 장지영은 서울에서 시국의 변화를 관망하였지만 단발이 염려되어 향제에 돌아갔다. 서울의 정황은 아득히 알 수 없게 되었다.

 

(후략)

 

-안효제(安孝濟 1850~1912),「아관일기(俄館日記)」,『수파집(守坡集)』

※ 원문은 홈페이지 > 고전포럼 > 고전의향기 에서 서비스 될 예정입니다.

 


▶ 단발을 한 고종(황실문화재단)

 

1909년 안중근 의사가 동양평화를 위해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사살한 사건은 한국인의 대표적인 의혈투쟁으로 기억된다. 그런데, 최초의 의혈투쟁은 이보다 한 해 전에 샌프란시스코에서 발생했다. 전명운과 장인환이 스티븐스를 사살한 사건이 그것이다. 스티븐스는 1904년 내한하여 대한제국의 외교 고문으로 활동한 친일 미국인이었다. 그는 당시 수지분(須知分)이라고 불렸는데 이름에 새겨진 뜻이 자신을 고용한 대한제국에 대한 흑색 선전을 일삼은 그의 행적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영어 이름의 한자 표기에 담긴 묘한 뉘앙스는 모던 걸에서도 보인다. 1930년대 식민지 경성에서는 모던의 열풍이 불었고, 백화점이나 까페에서 이른바 모던 걸을 볼 수 있었다. 모던 걸은 단발 머리를 하고 있었고, 그렇기에 ‘단발미인(斷髮美人)’ 또는 ‘모단(毛斷) 껄’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모던의 시각적 형상화를 단발에서 추구하고 있다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어느 의미에서 단발은 모던의 첨단을 달린 근대의 중요한 이정표였고, 1935년 『조광(朝光)』이라는 잡지에서 「단발령후사십년(斷髮令後四十年)」이라는 코너를 꾸민 것도 1930년대 ‘모던=毛斷’의 기원으로 한국 근대 단발의 풍경을 추억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우리가 아는 단발은 대개 을미년(1895)의 단발령에 집중해 있지만 단발에 대한 역사적 경험은 시기별로 동일하지 않았다. 을미년 11월 16일, 한 해의 마지막 날이었던 이 날 단발령이 떨어졌고, 그 이튿날인 1896년 신정부터 양력의 개시와 더불어 단발이 강행되기 시작했다. 이능화(李能和)의 회고에 따르면 건양 원년 1월 1일 바로 그 날 조정의 관리들이 단발을 당했는데, 상투를 종이에 들고 가는 사람, 상투를 들고 통곡하는 사람 등 각양각색이었다고 한다. 이윽고 폭압적인 단발이 전국 각지에 퍼져 나갔다. 양력을 축복 속에 맞이하지 못하고 통곡 속에 맞이하였던 조선 사회의 비극을 어찌 이루 형언할 수 있을까?

 

단발의 국면이 바뀐 것은 1904년이다. 러일전쟁을 배경으로 결성된 일진회(一進會)는 스스로 단발로 무장한 가운데 조선 관리들의 수탈을 비판하고 일본군을 위해 봉사하였다. 8년 전에는 백성들이 단발을 한 관리를 무서워했다면, 이제는 관리들이 단발을 한 백성들을 두려워하였다. 일진회의 극적인 순간은 을사늑약 전야 발표한 매국적인 성명이었고, 단발은 이 시점에서 근대와 더불어 매국의 함의를 얻게 되었다. 폭압적인 근대와 부정적인 매국의 굴곡을 넘어 단발에 애국계몽의 열기가 결합된 것은 1906년 이후였다. 특히, 1909년 순종 황제의 서남 순행은 그 정치적 의도야 어떠했든 지방 사회에서 자율적인 단발의 확산을 초래하였다. 그러나, 대한제국기까지의 단발은 주로 근대와 매국과 애국이 착종된 정치 담론의 문화적 구현이었으며 그 주체는 남성에 한정된 것이었다. 이와 달리 식민지 시기의 단발은 이제 여성의 단발이 주된 논제가 되는 것이었고, 도시적 풍경 속에서 형성된 ‘모단(毛斷)’에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렇게 보면 안효제의 「아관일기」는 단발의 근대사 중에서 초창기에 있었던 한 가지 에피소드라 이를 만하다. 때는 바야흐로 단발령이 공포되기 사흘 전. 흥선대원군의 밀서를 받고 러시아 공사관에 찾아가 단발령의 강행을 막아 달라고 호소한 세 사람, 이용원(李容元)ㆍ안효제(安孝濟)ㆍ장지영(張志永)의 비장한 목소리가 아직도 귓전에 맴도는 것 같다. 세 사람이 공사관에 간 것은 무엇보다 국가의 지존인 임금의 상투를 보호해야 한다는 절박한 생각 때문이었고, 고종이 끝내 단발을 당하고 단발령이 반포됨으로써 이들은 소기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낙향하고 말았다.

 

이윽고 시간이 흘러 음력 연말이 되자 아관파천이 일어났고 상황은 반전되기 시작하였다. 일본의 지배 하에 있던 친일 내각은 붕괴하였고 폭압적인 단발령은 더 이상 강제성을 유지할 수 없었다. 1896년 양력 새해가 시작할 무렵 단발의 재앙이 들이닥쳤다가 음력 새해가 시작할 무렵 이를 걷어낼 계기가 마련되었다는 것은 무척 흥미로운 일이다. 양력의 한파로부터 음력의 춘풍으로 변화가 일어난 격이라고나 할까. 지금도 신정에는 소한 추위가 기승을 부리지만 구정에는 입춘의 따스함이 다가온다. 하물며, 단발령 직후의 신정은 얼마나 추웠겠으며 아관파천 직후의 구정은 또 얼마나 따스했을까?

 

안효제의 문집에는 「아관일기」 외에도 여러 가지 다른 일기가 수록되어 있다. 「추도일기(楸島日記)」, 「곡강일기(曲江日記)」, 「창안일기(昌犴日記)」, 「요하일기(遼河日記)」가 그것이다. 안효제는 1893년 고종와 명성왕후의 총애를 받는 무당 진령군(眞靈君)을 참하라고 상소를 올렸다가 추자도로 유배된 용기 있는 관리였다. 또, 나라가 망한 후 총독부의 은사금을 거부하고 서간도로 망명하여 철저히 항일의식을 지킨 올곧은 선비였다. 단발령을 저지하려고 투쟁하였던 행적은 그 간 잘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어쩌면 한국 근대사에서 잊지 못할 한 장면이 아닐까?

 

 

노관범

글쓴이 : 노관범

  •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박사
  • 한국고전번역원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