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응방(金應邦)이 산청 지곡사에서 조총을 만들다.
▣ 일 시 : 2025년 07월 28일(월)~30일(수)
▣ 코 스 : 지곡사-산청문화원-상무주암
▣ 인 원 : 3명
▣ 날 씨 : 맑음
학봉은 전라도의 가장 부자 도시였던 나주 목사로 있었다. 재임 기간은 1583~1587년까지. 학봉이 나주 목사로 재임하던 시절 어느 날 허름하게 해진 옷을 입은 승려가 하나 찾아왔다고 나온다. 이름은 김응방(金應邦)이다. 원래 불가의 법명은 따로 있었지만 나중에 학봉이 유교식으로 붙여준 이름으로 추정된다. 학봉의 명성을 듣고 나주객관에 찾아왔다고 한다. 귀천의 차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 떨어진 장삼을 입고 찾아온 승려 김응방을 학봉은 만나주었다. 해진 장삼이 겨우 발목을 가릴 정도였다고 묘사되어 있다. 당시 승려는 노비계급에 속했지만 나주 목사라는 요직에 있던 학봉이 어떻게 김응방을 허락하게 되었는지도 흥미롭다.
귀천의 차이를 떠나서 나주객관에서 10여 일 정도 머무르게 하며 학봉은 김응방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나눴던 모양이다. 김응방이 아주 총기가 있고 불상을 비롯하여 각종 기물(器物)을 잘 만드는 손재주가 뛰어났다고 한다. 나주 인근의 전라도 지역 사찰 승려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학봉이 사람 보는 안목이 있었다. 사람은 대개 껍데기를 보고 판단하기 쉬운데 이야기를 나눠보니 젊은이가 머리도 좋고 내공이 있다고 여겼다. 이야기가 통했던 것이다. 두 사람은 열흘간 이야기를 나누면서 인연을 맺게 되었다.
5년 후쯤 학봉이 일본의 통신부사로 가게 되었다. 이 소식을 알게 된 김응방이 자신도 일본에 데려가 달라고 간청을 하였다. 통신사 일행이 출발하는 부산에서 미리 기다리고 있었다. 원래 자리는 없었지만 통신부사였던 학봉이 임시변통으로 자리를 만들었다. 승려 신분을 드러내지 않고 일반인처럼 머리도 기르게 하고 군졸 복을 입혔다. 노를 젓는 뱃사공 역할도 했다.
학봉이 승려 김응방을 인물로 본 이유 중의 하나는 대마도 가는 뱃길에서 폭풍을 만났을 때였다. 파도에 배가 뒤집힐 위험한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은 얼굴이 사색이 다 되었지만 승려였던 김응방은 초연한 태도를 유지하였다. 생사를 초월한 태도를 보여주었던 것이다. 죽음이 임박한 상황에서도 담담함을 유지하는 응방을 보고 학봉은 ‘이 친구가 공부가 된 인물이구나!’하고 판단하지 않았나 싶다. 일본을 다녀오고 나서 학봉이 남긴 시는 김응방에 대한 찬사가 담겨 있다.
비상한 기억력과 눈썰미가 있었던 김응방은 유황을 굽는 법도 배우고, 특히 조총을 아주 주의 깊게 관찰하였다. 김응방은 조선으로 돌아온 직후인 1591년 산청군의 지곡사(智谷寺)에 머무르며 조총을 제작하였다. 물론 학봉의 관리 감독과 지원이 있었다고 보여진다. 이때 지곡사에서 제작된 조총이 170자루. 화약(염초)이 150근이라고 되어 있다. 1년 뒤인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진주성 1차 전투에서 이 170자루의 조총도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사용되었다고 여겨진다. 170자루면 작은 숫자가 아니다. 조총부대를 이룰 수 있는 숫자이다. 1차 싸움의 승리 배경에는 학봉과 김응방이 한 팀이 되어 조선에서 제작된 조총도 큰 역할을 했던 것이다.
출처 : 조용헌의 지리산 당취(3. 산청 지곡사에서 조총을 만들다.)
김응방(金應邦)의 첩자(帖子)에 제(題)하다. 신묘년(1591, 선조 24)
학봉 김성일(1538~1593)
昔我在南時 : 전에 내가 남쪽에 있었을 적에
見汝錦城館 : 금성의 객관에서 너를 보았지
身上何所掛 : 몸 위에 걸쳤던 게 무엇이었나
破衲纔掩骭 : 해진 장삼 겨우 발목 가리었었지
手中何所有 : 손에는 무엇을 가졌었던가
摩尼光璨璨 : 마니주의 광채가 번쩍였었지
扶几導之言 : 곁으로 오라 해서 말을 시킴에
穎脫物不間 : 송곳 끝 삐져 나와 민첩하였지
技藝奪天工 : 기예 재주 조물주의 솜씨 훔쳐서
萬佛能手幻 : 많은 불상 손을 놀려 만들어 냈지
好遊公侯間 : 귀인들 사이 끼어 놀기 좋아해
城市頗亦慣 : 성중에도 또한 자못 익숙하였지
爲我留十日 : 나를 위해 열흘 동안 머무르면서
喜作方外伴 : 기쁘게도 방외 친구 되어 주었지
人事有聚散 : 인생이란 모였다간 흩어지는 것
五載成燕鴈 : 오 년 동안 제비 기러기 처지 되었지
今年我遠征 : 금년에 내가 먼 길 나그네 되어
奉使扶桑岸 : 부상 땅에 사신으로 오게 되었지
扶桑海三千 : 부상 길은 바닷길로 삼천 리라서
行者皆有嘆 : 오는 이들 모두 다 한숨 쉬었지
獨汝願從之 : 너는 홀로 따라오길 소원하여서
束髮顚其冠 : 머리 길러 묶은 위에 모자를 썼지
頎然一丈夫 : 훤칠하니 한 사람의 대장부 되어
追我蓬萊觀 : 나를 좇아 봉래로 달려왔었지
不憚充水手 : 뱃사공 되는 것도 안 꺼렸으니
風濤非所患 : 풍파쯤은 걱정할 바 아니었었지
馬海遇颶風 : 대마도서 큰 바람을 만났을 적에
一舟渾神叛 : 온 배 안의 사람 모두 혼이 나갔지
汝能外死生 : 너는 능히 삶과 죽음 초월하여서
造次猶不亂 : 위급할 때 어지럽지 아니하였지
形骸佛所遺 : 몸뚱이야 부처가 초월했던 것
汝亦善割斷 : 너 역시도 그에 대한 애착 끊었지
殊方多偉觀 : 이역 땅에 볼만한 경치 많음에
天外恣遊玩 : 하늘 밖서 마음대로 유람하였지
平生遊方志 : 평소의 먼 유람을 하려던 뜻이
今乃眞不贗 : 그제서야 거짓 아닌 진짜 되었지
有如九萬鵬 : 구만 리를 날아가는 대붕 같아서
一揮垂雲翰 : 구름 같은 날개를 한 번 저었지
扶搖上寥廓 : 바람 타고 하늘 위로 올라갈 제엔
豈復顧斥鷃 : 어찌 다시 뱁새를 뒤돌아보리
餘事逞智巧 : 도를 닦는 여가에 기술을 익혀
機變由心筭 : 온갖 변화 속셈에서 헤아리었지
金鼎煮硫汞 : 금 솥에다 유황 수은 넣어 달임에
朱丹何燦爛 : 붉은 빛은 어쩜 그리 찬란했던가
三山有丹竈 : 삼신산에 단약 짓는 부엌이 있어
仍之願一看 : 거기 가서 한 번 보길 원하였었지
經歲始回棹 : 해 넘기고 배 돌리어 되돌아오니
與我同患難 : 나와 함께 온갖 고생 같이하였지
汝眼旣已大 : 너의 눈은 이미 벌써 크게 떠졌고
汝遊亦汗漫 : 너의 유람 역시 또한 드넓어졌지
長嘯下人間 : 긴 파람에 인간 세상 내려와 보니
靑丘日未晏 : 청구 땅엔 해가 아직 안 저물었네
[주-D001] 송곳 끝 삐져 나와[穎脫] : 재능이 저절로 드러나는 것을 뜻한다. 《사기(史記)》 제76권 평원군우경열전(平原君虞卿列傳)에, “평원군(平原君)이 말하기를, ‘무릇 현사(賢士)가 이 세상에 처함에 있어서는 비유하자면 송곳이 주머니 속에 있는 것과 같다. 그 끝이 드러나지 않으면 남들이 알 수가 없다.’ 하자, 모수(毛遂)가 말하기를, ‘신을 오늘 주머니 속에 있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로 하여금 일찌감치 주머니 속에 있게 하였더라면 송곳 끝이 주머니를 뚫고 나와서[穎脫而出] 끝이 보이는 정도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였다.” 하였다.
[주-D002] 제비 기럭 처지되었지 : 서로 헤어져 있다는 뜻이다. 제비가 남쪽에서 날아올 적에는 기러기는 이미 북쪽으로 날아가고, 기러기가 날아올 땐 제비는 이미 남쪽으로 날아가서 서로 만나지 못한다.
[주-D003] 死生 : 소주에, “초본에는 생사(生死)로 되어 있다.” 하였다.
출처 : 鶴峯先生文集卷之二 / 詩(고전번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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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산청 지곡사에서 조총을 만들다 - 법보신문
반체제적 성향을 가지고 있던 ‘당취’가 호국불교로 돌아선 것이 의승군(義僧軍)으로의 변신이었다. 총칼이 부딪치는 육박전의 전쟁터에 어떻게 머리 깎은 승려들이 들어가 전투를 치를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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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곡사智谷寺
지곡사는 경상남도 산청군 산청읍 내리 지리산 기슭에 있었던 신라시대에 창건된 사찰이다. 고려 승려 진관과 혜월의 비가 건립되는 등 고려시대에 번성하였으며 조선 후기까지 선종의 법등을 이어오다 20세기 들어 폐사되었다.
신라 법흥왕 때 창건되었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진관 석초(眞觀釋超, 912~964)와 혜월(慧月)이 이 절에 머무르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크게 펼쳐 큰 절의 면모를 유지했다. 이때가 절의 전성기로 승려가 약 300여 명에 이르렀고 물방앗간이 12개 있었다고 한다. 그 뒤 조선시대 19세기까지 산음을 대표하는 선종 사찰이었다. 조선 후기 남명 조식(南冥曺植, 1501~1572) 등이 이 근방에서 활동하면서 지곡사에서 강론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20세기가 되어 일제에 의해서 실시된 조선총독부의 전국 사찰 등록시 지곡사의 암자(庵子)인 심적암(深寂庵)이 심적사(深寂寺)로 등재되어 있고 지곡사란 이름은 빠져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무렵 어떤 이유에서인가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義天, 1055~1101) 등이 편찬한 『석원사림(釋苑詞林)』 권 191에 고려 초기 문신 왕융(王融)이 찬술(撰述)한 「고려국 강주 지곡사 진관선사비(高麗國康州智谷寺眞觀禪師碑)」가 수록되어 있다. 조선 전기 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권 31 경상도 산음현 조에 의하면 지곡사에는 고려 예부상서 손몽주(孫夢周)가 지은 혜월과 진관의 비가 있었다고 한다. 두 기록의 찬자(撰者) 정보에 차이가 있는데 왕융은 진관선사비의 찬자이며 손몽주는 혜월비의 찬자이다. 두 비는 조선 후기까지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현재 절터에는 귀부만 2기가 남아있다. 이들 귀부는 혜월과 석초 비의 것으로 추정된다.
절 주변으로 석비 2기가 더 있다. 1기의 석비는 추파 홍유(秋波泓宥, 1718~1774)의 비로 1836년(헌종 2)에 건립한 것이며 또 다른 1기의 석비는 한암대사(寒巖大師)의 비로 1845년(헌종 11)에 건립한 것이다. 발굴 조사(發掘調査) 결과 통일신라부터 고려, 조선 전 · 후기 유구(遺構)가 모두 확인되며 지곡사의 실체를 확인케 하는 지곡사명(智谷寺銘) 막새가 출토되었다.
정면과 측면이 모두 세 칸 규모인 금당지에서는 불상 대좌와 소조불상편(塑造佛像片)이 노출되었다. 금당지는 조사 구역의 북동편에 자리하며 해발 200m 정도의 비교적 가파른 산야의 남동 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유구가 확인되고 있는 범위는 대체로 길이 70m, 너비 약 5m로 길게 조성된 평지인데, 이곳은 가로, 세로의 크기가 1m에 가까운 대형 암석을 수직상으로 쌓아 만든 높이 3.5m 규모의 거대한 축대가 동서 방향으로 직선을 이루며 약 50여m 정도 길게 이어진 상태이다. 따라서 금당과 관련이 있는 유구의 흔적은 축대의 상부에서 모두 확인되고 있다.
축대 위에 설치된 금당지 이외에 모두 5기의 건물지(建物址)가 부분적으로 확인되었는데, 이곳에서 통일신라시대 와편(瓦片)을 비롯한 고려, 조선시대의 와전류 및 자기류가 상당량 출토되었다. 이러한 유물의 출토 양상과 가람 배치(伽藍配置) 등을 종합하여 볼 때 늦어도 통일신라시대에는 지곡사가 존재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유구의 중복 양상을 비롯하여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걸쳐 유물이 시간적 단절없이 지속적으로 노출되었고, 그 중에는 연호 및 간지 등 절대 연대를 알 수 있는 명문 기와가 다수 있어 지곡사가 조선 후기까지 개보수를 거치며 존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국태사명(國泰寺銘) 기와도 출토되어 이 절이 한때 국태사로 불렸음도 확인된다. 홍유의 「유산음지곡사기(遊山陰智谷寺記)」에도 국태사 혹은 지곡사라 부른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조선 후기 지곡사에는 천왕문(天王門), 금강문(金剛門), 대웅전, 약사전, 극락전, 누각(樓閣) 등이 있고 암자로 심적암, 적조암, 나한암, 태자암, 서운암 등을 거느리고 있었다고 한다.
절은 20세기 초 폐사된 것으로 보이는데, 해방 후 1960년을 전후한 시기에 저수지가 들어서면서 지곡사지의 일부가 침수되었다. 산청 지곡사지(山淸智谷寺址)는 2000년 경상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산청 심적사 추파당대사 부도 및 석비와 산청 심적사 한암대사 부도 및 석비는 2003년 경상남도 시도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는데, 현재의 소속은 심적사이다.
출처 : 다음 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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