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의 호 ‘삼봉’은 도담삼봉이 아니다[펌]
최근 한국고전번역원이 한국고전선집 첫 번째 권으로 펴낸 『삼봉집』을 읽다가 시선이 멈추었다. ‘삼봉에 올라[登三峰憶京都故舊]’라는 시에서였다. 역자인 심경호 교수는 이 시의 주석에서 삼봉을 서울의 삼각산(三角山)으로 풀이한 뒤 정도전의 호 ‘삼봉’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고 밝혔다.
많은 이들은 정도전의 호 ‘삼봉’이 단양팔경의 하나인 도담삼봉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갑자기 의문이 일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알고 있는 도담삼봉설은 잘못되었단 말인가.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서 도담삼봉을 치면, 백과사전이나 단양군청의 소개글 등에서는 하나같이 정도전이 젊은 시절 도담삼봉에서 노닐었으며 호를 삼봉이라고 지을 정도로 그곳에 각별한 애정을 보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 정도전의 출생지가 현재의 단양읍 도전리이며 심지어 도담삼봉의 정자도 정도전이 세웠다는 얘기까지 전하고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전신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1991년 펴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도 예외는 아니다. 사전의 ‘정도전’ 항목을 보면 “(정도전의) 선향은 경상북도 영주이며, 출생지는 충청도 단양 삼봉(三峰)이다.”라고 되어 있다. 이 글을 쓴 이는 정도전 연구의 권위자인 한영우 교수인데, 그는 학계에 정도전을 본격 소개한 『정도전 사상의 연구』(서울대출판부, 1973)에서 ‘도담삼봉설’을 제기했다. 그는 이 책에서 정도전 출생과 관련한 전설을 소개하면서,
“아이를 길에서 얻었다 해서 이름을 도전(道傳)이라 하고, 부모가 인연을 맺은 곳이 삼봉이므로 호를 삼봉(三峰)이라고 지었다.”
라고 썼다. 한 교수는 민족문화추진회(한국고전번역원 전신)가 펴낸 『국역삼봉집』(솔출판사, 1997)의 해제에서도 같은 주장을 폈다. 이러한 한 교수의 설은 그간 학계 뿐 아니라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정설이 되다시피 했다. 신용호 전 공주대 교수가 ‘선대 사류의 자ㆍ호ㆍ시호 연구’라는 논문(『한국인의 자ㆍ호 연구』, 계명문화사, 1990에 수록)에서 정도전의 삼봉은 단양의 도담삼봉에서 호를 취한 것이라고 쓴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후 ‘삼봉’이라는 호의 유래는 도담삼봉으로 사실상 굳어졌다.
이 대목에서 ‘삼봉’이라는 호에 대해 따져볼 필요성이 제기된다. 호를 짓는 법칙 중의 하나는 자신이 생활하고 있거나 인연이 있는 지명을 호로 삼는 ‘소처이호(所處以號)’이다. 이 작호(作號) 법칙에 비추어 본다면 도담삼봉이나 서울의 삼각산 모두 ‘삼봉’의 근거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정도전의 삼봉은 도담삼봉일까, 삼각산일까. 아니면 둘 다일까. 이를 판별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정도전의 글을 살피는 일이다.
정도전은 삼봉이라는 호에 대해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삼봉집』에서 ‘삼봉’의 유래를 밝힌 문장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삼봉’의 지명이나 위치를 가늠해볼 수 있는 시를 여러 편 남겼다.
첫 번째는 이 글 서두에서 인용한 ‘삼봉에 올라’라는 시이다. 시는 이렇게 시작된다.
端居興遠思 : 홀로 있다가 먼 그리움 일어나
陟彼三峰頭 : 삼봉 마루에 올라
松山西北望 : 서북쪽으로 송악산 바라보니
峨峨玄雲浮 : 검은 구름 높게 떠 있다
故人在其下 : 그 아래 벗님 있어
日夕相追遊 : 밤낮으로 어울려 놀았지
(하략)
정도전이 경도(개경)의 옛 친구를 추억하는 이 시에 인용한 삼봉은 ‘서북쪽으로 송악산 바라보이는’ 곳이다. 개경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의미이다. 또 이 시에는 ‘공(정도전)이 부모상을 당해 경상도 영주에 살면서 3년 복제를 마치고 1369년에 삼봉의 옛집으로 돌아왔다’는 주석이 있어 삼봉이 영주에서는 멀리 떨어진 곳임을 추론케 한다.
‘삼봉으로 돌아올 적에 약재 김구용이 전송해 보현원까지 오다[還三峰若齋金九容送至普賢院]’라는 시에도 삼봉이 보인다. 이 시를 지을 무렵, 정도전은 장기간 집을 떠나 있었는데, 오랜 방랑을 끝내고 삼봉의 옛집에 돌아올 때 친구 김구용이 보현원(普賢院)까지 전송한 일을 읊은 시다. 보현원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경기도 장단에서 남쪽으로 25리 떨어진 곳에 있다고 설명되어 있다. 현재의 파주 임진강변쯤으로 추정되는데, 역사적으로는 고려 의종 때 국왕의 보현원 행차를 틈타 정중부 등이 무신란을 일으킨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여기에서 삼봉은 파주 인근의 지명임을 알 수 있다.
또 ‘산중(山中)’이라는 오언율시에는 삼봉 아래 정도전의 옛집 풍경이 잘 묘사되어 있다.
弊業三峰下 : 하찮은 나의 터전 삼봉 아래라
歸來松桂秋 : 돌아와 송계의 가을을 맞네
家貧妨養疾 : 집안이 가난하니 병 수양에 방해롭고
心靜定忘憂 : 마음이 고요하니 근심 잊기 족하구려
護竹開迂徑 : 대나무를 가꾸자고 길 돌려 내고
憐山起小樓 : 산이 예뻐 작은 누를 일으켰다오
隣僧來問字 : 이웃 중이 찾아와 글자 물으며
盡日爲相留 : 해가 다 지도록 머물러 있네
찬찬히 읽어보면 정도전의 삶터는 산봉우리 아래 소나무와 대나무가 자라는 깊은 산중이다. 강물이 휘감아 도는 도담삼봉하고는 거리가 멀다.
이밖에 『삼봉집』에 수록된 ‘이사[移家]’라는 시를 보면 ‘오 년에 세 번이나 집을 옮겼다’는 구절이 보이는데, 이곳에도 예의 ‘삼봉’이 등장한다. 이 시에는 특이하게도 다음과 같은 문집 편찬자의 주석이 붙어 있다.
“공이 삼봉재(三峰齋)에서 글을 강론하자 사방의 학자들이 많이 따랐다. 이때에 향인으로 재상(宰相)이 된 자가 미워하여 재옥(齋屋)을 철거하자, 공은 제생(諸生)들을 데리고 부평부사(富平府使) 정의(鄭義)에게 가서 의지하여 부(府)의 남촌에 살았는데, 전임 재상 왕모(王某)가 그 땅을 자기 별장으로 만들려고 또 재옥을 철거하여 공은 또 김포(金浦)로 거처를 옮겼다. 임술년(1382)”
삼봉재에 살던 정도전이 한 권력자가 집을 철거하자 부평으로 이사갔다가 그곳에서도 여의치 않자 다시 김포로 옮겼다는 내용이다. 문제는 삼봉재의 위치를 단양으로 보느냐, 삼각산으로 보느냐인데, 임시 거처를 찾아 전전했던 당시 상황을 미루어본다면 부평이나 김포 인근인 삼각산이 옳을 듯하다.
종합하면, ‘삼봉’은 개경을 조망할 수 있는 높은 산이며, 파주 임진강에서도 멀지 않은 곳이다. 또 삼봉을 중심으로 오 년 동안 세 번의 이사를 했는데, 그가 머물렀던 곳은 삼봉, 부평, 김포로 한강 주변 지역들이다. 이렇게 본다면 ‘삼봉’은 삼각산, 즉 오늘의 북한산을 지칭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북한산은 백운대, 인수봉, 만경대의 세 봉우리로 이뤄졌다 해서 예부터 삼각산으로 불렸다. ‘삼봉’으로 약칭되기도 했는데, 이 같은 사례는 목은 이색의 글에서도 확인된다. 정도전의 스승으로 학문과 사상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이색은 17세 되던 해 삼각산에서 학업을 연마한 적이 있다. 이런 인연 때문인지, 그의 문집 『목은집』에는 ‘삼각산(三角山)을 바라보며’라는 시가 실려 있다. 이 시에는 ‘삼봉이 태초 때부터 깎여 나왔는데[三峰削出太初時]’라는 구절이 보인다. 삼각산과 삼봉이 함께 쓰였다는 증거다.
정도전의 문집에 나타난 ‘삼봉’은 단양의 도담삼봉이 아닌 삼각산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당연히 『삼봉집』에 도담삼봉이나 단양이라는 지명은 보이지 않는다. 이는 정도전의 호 ‘삼봉’이 도담삼봉과는 거리가 있음을 말해준다.
이 때문인지 처음 ‘도담삼봉설’을 제기하였던 한영우 교수는 나중에 자신의 견해를 수정했다. 한 교수는 『왕조의 설계자 정도전』(지식산업사, 1999)에서 정도전 출생과 호에 관련한 전설이 사실과 다른 것 같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삼봉이라는 호는 단양의 삼봉에서 차명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의 옛집인 개경 부근의 삼각산에서 차명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한발짝 물러났다.
한영우 교수는 기록이 아닌 단양에서 전해오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정도전의 출생지와 ‘삼봉’이라는 자호의 유래를 도담삼봉으로 파악했다. 그러나 문집을 살펴보면 그러한 주장이 근거가 없음이 드러난다. 전설은 전설일 뿐이다. 정도전의 호 ‘삼봉’은 삼각산(북한산)으로 보는 게 옳다. 정도전은 자신의 옛집이 있던 북한산에서 호를 취하였고, ‘삼봉재’에서 학문을 연마하고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건국했다. 오랫동안 삼각산 아래에 살았던 정도전은 삼각산과 한강의 지리를 훤히 꿰뚫었을 것이다. 조선이 개국한 지 3년도 되지 않아 개경에서 삼각산 아래의 한양으로 천도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러고 보니 삼각산을 지칭하는 ‘삼봉’이라는 호는 ‘조선 왕조의 설계자’라는 정도전의 이미지와도 잘 어울린다.
글쓴이 : 조운찬 경향신문 기자. 문화부장, 베이징특파원을 지냈으며 지금은 문화에디터로 일하고 있다
'♣ 盈科後進 > 고전향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전칼럼 067]『마의상서(麻衣相書)』 여정(餘情) (0) | 2013.10.31 |
---|---|
中道而廢 (0) | 2013.08.30 |
[고전명구 215] 나를 묶은 자 누구인가 (0) | 2013.07.23 |
[한시감상 063] 쉽지 않은 세상살이 (0) | 2013.07.16 |
침묵(沈黙)의 효용(效用) (0) | 2013.07.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