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崇祖惇宗/청흥문중

5대 조부 조비 고조부 백씨 緬禮

도솔산인 2006. 4. 22. 16:01

5代祖·高祖 墓所 緬禮 및 床石建立

 

1. 방향
 경상북도 군위군 우보면 羅湖洞에 모신 상의공(五代祖考 五代祖비) 후손들이 청흥문중 종회를 구성한지 어언 10여 년이 되었습니다.
 본래의 목적대로 임야를 매입한 후 이장하려고 하였으나 제반 여건이 마땅치 않아 宗賢 廷稷氏의 양해를 얻어 대전 유성구 성북동 고조부 묘소 옆으로 이장 할 것을 문중 종회에서 결정한 후 일가 여러분들의 물심 양면의 후원에 힘입어 본 사업을 무사히 마칠 수 있음에 거듭 감사 드립니다.

 

2. 일반계획
 1) 일    시 : 2006년 4월 22일(토) ∼ 4월 23일(일)[2일간]
 2) 장    소 : 대전광역시 유성구 성북동 국개말(菊浦里) 선산
 3) 참여인원 : 청흥문중 회원 46명
 4) 소요비용 : 결산내역 참조

 

3. 세부계획 : 첨부화일 참조

 

2006.04.22(1일차)

 인부 3명을 얻어 06시에 대전을 출발 경상북도 군위군 우보면 봉산리에 도착했다. 동행한 사람은 종손인 진규 삼종형 성규씨 재당숙 정두씨 문중 일을 하는데 피하지 않는 분들이다.

 파묘를 하는 것이 몇 번째인지 산신제를 지내고 묘제를 지낸 후 '파묘요!!'하고 외치고 가래질을 하기 시작했다.  

 

 5대조부 조비 산소에서는 예상대로 숯이 나왔고 유골의 상태는 양호했다. 

100년도 넘은 산소를 이장하는데 나는 그 가운데에 있다.

대를 이을 자식도 없는 놈이 문중 일을 한다고.... 이번이 마지막이다.

봉산리를 떠나오면서 사진을 찍었다.

1889년 떠난 선조의 고향에서 나는 100년도 훨신 넘은 뒤에 무덤을 파서 유골을 모시고 대전을 향한다.

 

2006.04.23(2일차)

 아침 6시 서둘러 대전 유성구 성북동에 도착했다.

어제 저녁 작은 아버님과 상의한대로 하기로 하고 일을 시작했다. 중장비의 굉음소리에 어지럽다. 가족사를 아는 것이 병일 것이다.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까닭은 무엇인가?

 

 1861년 象儀公(5대조부)이 청송을 떠나 경상도 義興縣 友補面 羅湖洞으로 移居한 것은 아마 자식의 장래를 생각해 楠西 朴春立 선생에게 취학을 시키기 위해서였다.

 止山 할아버지는 37세에 우리 집안 어른이 되어 조카와 당질들을 데리고 1889년 겨울 화상주 화령 금천으로 옮겨온 것은 仲氏 諱 起燮씨의 파산이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조카들의 만류에도 庄土를 매각 형님의 빚을 갚은 것으로 문집에 나와 있다.

 

 속리산이 지척인 금천! 지금은 행정적으로 금산리라고 불린다.

1894년 동학교도들이 보은에 집결하여 경상도로 진격하려 했을 때 이곳도 난리를 피하기가 어려웠다. 영남소모사 정의묵에게 동비의 소탕에 협력할 것을 권유받지만 이에 응하지 않았고, 동학도의 창궐이 점점 심해지자 금천동약을 만들어 인근 7개 동 백성들과 천탁산에 들어가 성을 쌓아 동학도피해를 막아냈다. 결국 일본군의 개입으로 동학난은 진압이 된다.

 

 1895년 8월 20일 명성황후의 참변 소식을 듣고 통곡한 후 다음 해 2월 8일 대족인 起夏와 함께감천 왕산 허위를 찾아가 창의를 논의한 후 금릉 구성에서 창의하여 그해 4월 4일까지 금릉, 구성, 무주, 영동, 보은,화북, 문경일대에 걸쳐 50여일 간 창의 활동을 하게 된다.

 고종의 선유칙서를 받고도 의병을 해산하지 않았던 의병장 지산은 함창에 있던 일본군 병참부대를 공격하고자 참모회의를 열었으나 참모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마침내 대장직을 사임 진사 조동석 대장직을 물려주고 갈령에서 전별을 하고 금천으로 돌아온다.

 이 후 고종에게 상소문을 올렸으나 가납되지 않자 柳二江과 함께 河回로 가서 柳石湖선생 霞隱 柳臣榮 柳東濬등과 交遊한다. 

 

 1897년 제자들의 요청으로 長子 康夏에게 편지를 보내 충청북도 청원군 문의면 후곡으로 이사를 시키고 이듬해 문의 후곡으로 올라와 광거정을 짓고 후학을 기르며 저술활동을 하다가 12년 뒤인 1908년 정월 56세로 생을 마감한다. 우리 집안은 한일합방이란 또 한번의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어 일본 경찰의 압박이 심해지자 長子 康夏는 1912년 아버지인 지산의 유골과 동생인 康殷(1912년 7월 24일 졸)을 후곡의 초강(금강)가에서 화장하여 강물에 뿌린다.

 1912년 우리 집안이 풍비박산이 되었던 해이기도 하다. 사촌인 康卨(당시 39세)이 정월 23일 사망하고 康連의 처(성산여씨 : 창의를 함께 했던 여씨 집안 父日鎬)가 정월 26일 20개월 된 甲宰(1910년 5월 1일 생)를 남겨두고 사망하며 강연 할아버지 역시 다리를 저는 불구자가 된다.

 

 이강년 선생 후손의 집에서 발견된 경술 창의 격문에 강하 할아버지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사촌인 할아버지들이 일본 경찰 고문의 후유증으로 돌아가신다.

 

 결국 1912년 문의면 후곡을 떠나 대덕 진잠 성북리로 이주하게 되고 우리 할아버지(仁宰)는 16세에 가장이 되어 신탄진 삼정리로 이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는 성북동!  신라 김유신도 피해갔다는 천혜의 요해처에 백년이 넘은 뒤에 그의 후손들이 모였다.

 아! 핍박의 세월이여!

뿔뿔이 흩어진 일족의 무덤을 한자리에 모은 산 언저리에 부질없이 언젠가는 없어질 무덤을 만든다.

  

일제 교육을 받지 않은 숙부님을 비롯 우리 집안 어른들의 후손이 다 모였다. 

용렬한 후손들이여!

그 분들의 정신은 어디에 갔는가?

가족사의 아픈 이야기가 세월 속에 영원히 묻혀갈 것이다.

 










060423면례및석물입석결산.hwp

'♣ 崇祖惇宗 > 청흥문중' 카테고리의 다른 글

'06선영 금초  (0) 2006.09.10
석물축문  (0) 2006.04.26
緬禮祝文  (0) 2006.04.26
제례축문  (0) 2006.04.26
墓祭(歲一祭·時祭)  (0) 2006.0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