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산행기록

덕유산 세한도(110114~15)

도솔산인 2011. 1. 15. 17:32

 

덕유산 세한도(110114~15)

▣ 일     시 : 2011년 01월 14일(금) ~ 15일(토)

▣ 산 행 지 : 덕유산

▣ 인     원 : 2명(오량, 余))

▣ 코     스 : 설천하우스-설천봉-향적봉-중봉-향적봉-설천봉-설천하우스

 

설천봉에는 논어 자한편 한구절['해가 추어진 연후에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이 생각나는 주목 몇 그루가 외롭게 서 있습니다.

스키장을 개발하며 슬로프 부근  주목은 대부분 고사했는데도 불구하고 온갖 역경에도 굳건히 변함 없는 추사의 세한도가 생각나는 풍경이지요?

 

향적봉 대피소는 겨울이면 <진사>님들로 만원입니다.

대피소의 기능보다는 사진하는 분들을 위한 장소입니다.

예전에는 남자 분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요즘은 남녀와 노소의 구분이 없습니다.

 

대구에서 오신 분을 만났는데

고등학교 시절 산에 입문하시고 지금은 사진을 하는 분인데

산 사진의 내공이 풍겨나오더군요.

 

함께 오신 일행은 다 출사를 내보내고

홀로 남아서 아침 밥을 짓는 모습이 남다르게 보였습니다.

 

날이 추어진 뒤에도 주목과 구상나무는 결코 시들지 않습니다.   

   * 설천봉 세한도

 

 

 

 

 

 

 

 

 

 

 

 

 

 

 

 

 

 

 

 

 

 

 

 

사진<오량>

 

세한도

 

추사 김정희(金正喜)의 세한도(歲寒圖)는 한국 회화 가운데 유명하기로 손꼽히지만 그 발문을 들여다보면 그림에 대한 이해가 더욱 높아진다. 세한도는 추사 선생이 59세인 1844년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제자인 우선 이상적(李尙迪)이 보내준 책을 받고 그 정성에 감격하여 그려준 그림이다.

 

이상적은 역관(譯官)이라 중국을 드나들며 추사를 위한 서책을 수집할 수 있었다. 양반 지인들이 자신을 멀리할 때 역관 제자가 남아 제 곁을 지켜준 것이 유독 더 애틋했는지도 모르겠다. 추사 선생은 권세와 이익에게 달려가지 않고 자신을 찾아와 준 제자에게 그림과 발문으로 극진한 고마움을 표한다.

 

이상적은 스승의 세한도를 받고 “세한도 한 폭을 엎드려 읽으매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리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歲寒圖一幅 伏而讀之 不覺涕淚交)”로 시작하는 답장을 썼다. 옛사람이 왜 그림을 ‘읽는다.’고 했는지 알겠다. 세한도는 발문까지 읽고 나서야 비로소 제대로 완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한도 오른쪽 아래 구석에는 장무상망(長毋相忘) 네 글자가 새겨진 붉은 도장이 찍혀있다. 오랫동안 잊지 말기를! 스승이 찍었든 제자가 남겼든 서로의 도타운 마음자리가 내 무심함마저 녹인다. 세한도에는 진짜배기 의리가 배어 있다.

 

<세한도 발문>

去年以晩學大雲二書寄來, 今年又以藕耕文編寄來. 此皆非世之常有, 購之千萬里之遠, 積有年而得之, 非一時之事也.

지난해에는 계복(桂馥)의 <만학집晩學集>과 운경(惲敬)의 <대운산방문고大運山房文藁> 두 책을 부쳐왔더니, 올해는 또 우경 하장령(賀長齡)이 편찬한 <황조경세문편皇朝經世文編>을 부쳐왔구나. 이는 모두 세상에 늘 있는 책이 아니라서, 천만리 먼 곳에서 사온 것이며, 여러 해 걸려 얻은 것이지, 한 때에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且世之滔滔, 惟權利之是趨, 爲之費心費力如此, 而不以歸之權利, 乃歸之海外蕉萃枯稿之人, 如世之趨權利者.

또한 세상의 도도한 물결(인심)은 오직 권세와 이익만을 따르는데, (귀한 책을 얻으려고) 마음을 쓰고 힘을 쓰기를 이와 같이 하고서도, 권세와 이익이 있는 사람에게 돌아가지 않고, 바다 밖 초췌하고 야윈 사람에게 돌아오기를 마치 세상 사람들이 권세와 이익을 따르듯 하는구나.

 

太史公云, 以權利合者, 權利盡以交疎. 君亦世之滔滔中一人, 其有超然自拔於滔滔權利之外, 不以權利視我耶? 太史公之言非耶?

태사공 사마천이 이르기를, “권세와 이익으로 합한 자는 권세와 이익이 다하면 사귐이 멀어진다.”라고 하였는데. 그대 또한 세상의 도도한 흐름 가운데 한 사람으로, 초연히 도도한 권세와 이익의 밖으로 스스로 벗어나니, 권세와 이익이란 기준으로 나를 보지 않음인가, 태사공의 말씀이 잘못되었는가?

 

孔子曰, 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 松栢是貫四時而不凋者, 歲寒以前一松栢也, 歲寒以後一松栢也. 聖人特稱之於歲寒之後.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라고 하셨다. 소나무와 잣나무는 네 계절을 지내도 시들지 않는 것이다. 날씨가 추워지기 전에도 한결같이 소나무와 잣나무이고, 날씨가 추워진 뒤에도 한결같이 소나무와 잣나무이다. 그런성인께서는 다만 날씨가 추워진 뒤에 대해서 만을 일컬으셨다(칭찬하셨다).

 

今君之於我, 由前而無加焉, 由後而無損焉. 然由前之君, 無可稱, 由後之君, 亦可見稱於聖人也耶? 聖人之特稱, 非徒爲後凋之貞操勁節而已, 亦有所感發於歲寒之時者也.

이제 그대가 나를 대함을 보면, 이전이라 하여 지금보다 더함이 없지만(잘 해준 것이 없지만), 이후라고 하여 지금보다 덜함이 없다(소홀함이 없다). 그러면 이전의 그대는 일컬을 만한 것이 없겠으나, 이후의 그대는 또한 성인에게 일컬을 만한 것이 아니겠는가? 성인께서 유독 이를 일컬었던 것(송백을 칭찬한 것)은 다만 늦게 시드는 곧은 절조와 굳센 절개를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날씨가 추워진 때에 느끼시는 바가 있었던 것이다.

 

嗚乎! 西京淳厚之世, 以汲鄭之賢, 賓客與之盛衰. 如下邳榜門, 迫切之極矣. 悲夫! 阮堂老人書.

아아! 서한(西漢)의 순후한 세상에서 급암(汲黯)과 정당시(鄭當時) 같은 어짊으로도 빈객들이 시세와 더불어 성하고 쇠하였다. 하비의 방문(榜文) 같은 것은 박절함이 극에 달했도다. 슬프다! 완당노인이 쓰다* 하비(下邳)는 하규(下邽)의 오기이다.

 

<참고>

마지막 단락에 나오는 급암과 정당시, 하규의 방문 이야기는 『사기(史記)』 급정열전(汲鄭列傳)에 나온다. 전한(前漢) 무제 때 급암(汲黯)과 정당시(鄭當時)라는 어진 신하들이 현직이 있을 때는 손님이 넘치다가 좌천되었을 때는 손님의 발길이 뚝 끊겼다.

 

사마천은 “급암과 정당시 정도의 현인이라도 세력이 있으면 빈객이 열 배로 늘어나고, 세력을 잃으면 당장 모두 떨어져 나간다. 그러니 보통 사람의 경우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다”라고 평했다.

 

이어 언급한 적공(翟公)의 사례도 마찬가지로 그 또한 해임되자 집이 한산하다 못해 문 앞에 새 그물을 쳐 놓을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여기서 문전작라(門前雀羅), 문전가설작라(門前可設雀羅)라는 고사성어가 유래되었다. 적공이 다시 관직에 오르자 손님이 다시 몰려오는 염량세태를 풍자하며 대문에 써 붙인 시는 다음과 같다.

 

一死一生 乃知交情 한번 죽고 한번 삶에 사귐의 정을 알고

一貧一富 乃知交態 한번 가난하고 한번 부유함에 사귐의 태도를 알며

一貴一賤 交情乃見 한번 귀하고 한번 천함에 사귐의 정이 드러나네.

 

출처 : 익구닷컴 -자유는 힘이 세다. 글쓴이 <새우범생>